소설리스트

조선을 노래하라-165화 (165/298)

165화 개국(開國)(9)

화형식 D+2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개혁이 어려운 이유가 있다.

개혁은 반드시 누군가의 ‘손해’를 동반한다는 것이었다.

반대로 누군가의 ‘이익’이 되었다.

해서, 개혁의 칼날을 휘두르고자 하는 이들은 항상 본질을 숨겼다.

누군가의 손해가 아니라 다수의 이익이라고 말했다.

반대하는 이들도 손해를 언급하지 않고 침소봉대라도 하여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래서 쌍방의 싸움은 늘 헛돌 수밖에 없었다.

진짜 속에 담은 말이 아니라 대의명분으로 고상하게 싸우기에 그러했다.

하지만 이번은 다를 것이다.

신묘한 정략으로 상대를 고립시킨 게 아니었다.

시대 정신의 요구로 탄생한 압도적 대의명분을 휘두른 것도 아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일을 저질렀다.

여태껏 존재했던 개혁과는 결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하니 저항하려는 이들도 각본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기득권의 성지를 정조준하는 일이었다.

거센 반발이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다.

나는 송자로서 가진 생명을 모두 갉아 먹을 것이니까.

이후 인간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기어이 그리할 것이다.

두려움은 없다.

이미 우리는 승리하고 있으니까.

이 싸움, 길게 가져가지 않을 것이다.

한 번으로 끝낸다.

압도적인 승리를 도모할 것이다.

선봉은 윤선거와 윤증이었다.

너무 든든했다.

그런데

[동전의 유통을 논하고자 합니다.]

연좌가 아니었다.

상소도 아니었다.

토론회였다.

그냥 난상 토론이었다.

진짜 웃음이 계속 나왔다.

바빠 죽겠는데 토론회라니 말이다.

정말 윤증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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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형식 D+3

윤증이 연 토론회는 삽시간에 도성 인근의 서원까지 전해졌다.

회합을 가진 사대부들은 헛웃음을 지었다.

“참으로 태평하오.”

“고관대작의 자제이니 세상 물정을 이리도 모르는 것이외다.”

서원을 향한 강도 높은 개혁이 예고된 이 와중에 한가하게 논쟁이나 하겠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심지어 그 논제가 동전의 유통이었다.

방식부터 내용까지 모두 불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동전의 유통이라니.”

“한가하게 그런 논의나 하고 있을 수는 없지요.”

“그러나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애초 조선은 동전을 유통할 수 있는 여건도 되지 않소.”

“참으로 맞는 말이오.”

불쾌함을 토로하던 대화는 어느새 본론으로 들어갔다.

“통문은 어찌 되었소?”

“다들 분개하고 있으나 쉽게 동참하지는 못하고 있소.”

“허.”

“아무래도 우암 대감의 졸렬한 겁박이 두려운 듯하오.”

“되었소. 우리는 최대한 의견을 규합해야 하오.”

“방책이 있소?”

“시일이 더 지나면 안동에 소식이 전해질 것이오.”

안동이라고 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아주 거대했다.

“도산 서원의 통문이 발의된다면 누가 감히 머뭇거리겠소?”

“참으로 맞는 말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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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형식 D+3

유형원은 뒷짐을 쥐고 편히 걸었다.

늘 떠들던 제자가 조용하여 슬쩍 쳐다봤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잔뜩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것이냐?”

“동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바람직한 고민이었다.

유형원은 맑은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네 생각을 내게도 말해주겠느냐?”

“동전이 유통된다면 여러 이점이 있습니다. 가령, 종래 조선의 국고는 하늘의 뜻과 밀접하게 연결된 농업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였습니다.”

“계속하거라.”

“그러하니 자연스레 조선의 국고는 만성적으로 궁핍할 수밖에 없습니다.”

김서경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유형원의 목소리는 편안했고 발걸음은 가벼웠다.

“하지만 동전을 주조하여 유통한다면 이를 크게 개선할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동전은 1년이 걸리는 농업의 성과와는 달리 빠르고 마음껏 확보할 수 있습니다. 즉, 주조할 때 소요되는 경비를 제외한 이익이 막대하니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네 말이 옳다. 하면, 이익을 어찌 보느냐?”

“소생이 들어보니 왜국으로부터 1백만 근의 동을 가져올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옳다.”

“음.”

김서경은 걸음의 속도를 유지하며 손가락을 여러 차례 접었다가 펼쳤다.

유형원은 제자의 속도를 맞추며 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짧은 기다림의 끝에 김서경의 손가락이 멈췄다.

“족히 5할 이상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지금 암산하였느냐?”

“손가락을 사용하였습니다.”

“참으로 대견하구나.”

유형원은 포근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한데, 문제는 없느냐?”

“동이 안정적으로 확보되어야 합니다. 아니라면 동의 가치가 오르기에 조정의 수익은 1할까지 하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면, 어찌 되겠느냐?”

“동의 원래 가치보다 훨씬 비싼 값을 책정한 동전을 유통하게 될 겁니다.”

“문제는 무엇이겠느냐?”

“조정은 주조의 이익을 취하겠으나, 1전의 원래 가치를 가진 동전이 100전이 된다면 민간이 소란스러워질 겁니다.”

“근거는 무엇이냐.”

“숫자가 아니겠습니까.”

오직 숫자로 동전의 이익과 예상되는 문제를 도출한 것이다.

놀라운 일이었다.

참으로 기특하여 유형원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 간의 웃음이 잔뜩 머금어질 때였다.

“어려움이 있으나 조정이 노력하면 이익이 큽니다. 한데 어찌하여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습니까? 특히 서원이 경기를 일으키니, 소생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서원이 사대부를 위정자로 만든다는 말을 기억하느냐?”

“어찌 잊겠습니까. 불과 이틀 전입니다, 사부님.”

“네가 고민이 많으니 혹시나 하여 한 말이었다.”

“심려치 마십시오.”

사제는 걸음처럼 가벼운 농을 주고받았다.

“위정자라면 백성을 무엇으로 ‘통치’할 수 있더냐.”

“법도가 있을 겁니다.”

“그 전에 무엇이 필요하더냐. 아니, 백성이 있으려면 무엇이 선행되어야 하겠느냐?”

“백성이라 하면 응당 땅이 있어야 하지요. 조선도 이 땅이 있기에 백성을 통치할 수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것이다.”

“예?”

“서원을 거치며 위정자로 새로 태어난 양반은 가문의 사전으로 백성을 지배한다. 조선은 사전이 넓을수록 더 많은 백성을 거느릴 수 있다. 어찌하여 이것이 가능하겠느냐?”

“백성이 삶을 도모하려면 농업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까?”

“옳다. 참으로 옳다.”

유형원은 크게 외쳤다.

지나가던 백성들이 쳐다봤으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직 농업만을 중시하는 나라이기에, 토지가 있어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하면…….”

“토지는 사대부가 백성의 숨통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날카로운 현실의 무기가 되는 것이다.”

유형원은 조소를 잔뜩 머금었다.

몇 번을 되새겨도 참으로 부조리한 구조였다.

“한데, 동전이 보급된다면 많은 백성이 토지를 이탈할 길이 열리게 된다. 즉, 토지로 백성의 목숨을 쥐던 양반의 현실적 수단이 무력화되는 것이니, 어찌 경계에 나서지 않겠느냐.”

백성이 위정자를 두려워한다.

가장 두려운 원인은 그들의 손짓에 삶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교화는 통제의 다른 말이다. 즉, 동전의 전면적인 보급은 서원이 백성을 통제할 수 있는 현실의 무기를 상실하는 것이다.”

만일, 위정자들이 만든 경제적 구조에서 이탈한다면 두려움은 크게 옅어진다.

아니, 거대한 변화가 시작될 수 있었다.

“모든 사전을 몰수하여 공전을 배분하지 않는 이상 농자천하지대본에 목숨을 거는 조선은 이를 극복할 수 없다. 하지만, 말 그대로다. 농자천하지대본만 조금 옆으로 밀어내어 자리를 마련한다면 능히 바뀔 수 있다.”

“…….”

“그리고…….”

유형원은 김서경을 슬쩍 쳐다보며 낮게 읊조렸다.

지나치는 백성은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조정이 군현을 완벽하게 통제할 길이 열리게 된다.”

조선이 수령을 파견하여 통치를 안정화하였으나 향촌의 자치를 인정하는 나라였다.

즉, 유형원의 말은 단순한 제도상의 통제가 아니라 실질적인 제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를 상기한 김서경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유형원은 지나치듯 말을 이었다.

“이는 너만 알아야 할 것이다.”

“무, 물론입니다.”

정겨운 대화를 이어가며 걸었다.

어느새 난상 토론이 이뤄지는 육조거리에 이르렀다.

유형원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동전이 유통된다면 백성이 사치를 부리게 될 것인데, 이를 어찌할 건가?”

“평생 검약을 익힌 사대부도 사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네 말처럼 사대부도 쉽지 않은 일인데 백성이 어찌 가능하겠나?”

“괴이하군요. 사대부는 제 의지로 한 것이고, 백성은 강제한 겁니다.”

“내 말을 제대로 듣게. 백성이 분수를 모르고 사치한 생활을 탐닉한다면 결국 더 궁핍해질 것이네. 이를 어찌할 건가?”

“교화하시면 됩니다.”

“!!!”

육조거리의 난상 토론을 주도하는 이는 바로 윤증이었다. 그의 말을 들은 유형원은 피식 웃었다.

문자로 내용을 봤다면 송시열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과연 그 스승에 그 제자였다.

“동전은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을 넉넉하게 하기에 토지와 함께 민생의 근본이 됩니다.”

“어림도 없는 말! 어찌 토지와 같다고 할 수 있나!”

“곳곳에 상설 점포를 구하고, 농업을 위축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상업을 진흥시킨다면 동전은 크게 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여, 무본억말책(務本抑末策)이 아니라 이말보본책(以末補本策) 즉 상업으로 농업을 보완하는 것입니다. 어찌 해가 되겠습니까.”

“무릇 백성은 부지런하게 농사지어…….”

“왜국으로부터 동을 가져올지라도 어찌 동전을 유통할 수 있는가.”

사대부의 뻔한 말을 뚫고 낭랑하게 외쳤다.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고개를 돌려 유형원을 본 윤증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걸렸다.

아니, 즐거움이 잔뜩 담겨 있었다.

“선생. 동이 있으면 동전을 주조할 수 있습니다. 한데, 어찌 유통할 수 없습니까.”

“없네.”

“혹여라도 과거의 유통이 실패한 사례를 고려하여 우려하신다면 괜찮습니다. 소생에게 방책이 있습니다.”

“자네라면 능히 방책을 찾았을 것이라고 여기네. 하지만, 나의 우려는 그것이 아닐세.”

“하면, 무엇입니까.”

“주조하여 발행된 동전이 일관적이지 않다면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게 되는 법일세.”

그 말과 함께 윤증은 붓을 들었다.

유형원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필기란 성장의 척도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과연 그 부친에 그 아들이었다.

“모르거나 부족하면 적고 익혀 탐할 일입니다. 하면, 이르시지요.”

“조정에서 부족한 동전을 주조하여 내어놓으면 민간에서 얼마든지 모방할 수 있네. 이리되었을 때…….”

방대한 양의 지식이 하나씩 열거되었다.

윤증의 붓은 쉬지 않고 빠르게 움직였다.

말하는 이와 필기하는 이의 대결이었다.

모든 걸 뚫는 창과 모든 걸 방어하는 방패라고 해야 할까?

사람들은 그저 바라보며 경청할 뿐이었다.

어느새 유형원의 말이 끝났고, 윤증의 손도 동시에 멈추었다.

치열한 대결다운 마무리였다.

“하면, 무엇이 가장 우선되어야 합니까?”

“우리나라는 동전을 주조할 때 품질 및 중량 그리고 형태를 정확하게 측정할 기술과 기구가 없네. 그러니 응당 미숙한 주조 기술을 보완해야 하는 법일세.”

“그러자면 많은 인력이 필요할 겁니다.”

“최소 50대의 주전로와 각종 인력이 1천여 명은 필요하네.”

윤증이 묻고 유형원이 답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모든 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왜국 무역과 장인의 숙련을 따로 가져갈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참으로 명쾌하십니다.”

유형원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하나 더 꺼냈다.

“이참에 나도 화두 하나를 던지고자 하네. 괜찮겠는가?”

“소생 윤증. 부지런히 탐하겠습니다.”

“나라에서 의원을 육성하는 건 어찌 여기는가?”

“의원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지. 유독 의원의 교육은 민간의 일이지 않은가.”

평소 깊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참으로 그랬다.

윤증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의 뜻을 밝혔다.

“이제 이를 조정의 일로 만들면 참으로 좋을 것 같네만.”

“한데, 기구라고 하셨습니까?”

“도성만이 아니라 조선 팔도에 이를 세우는 걸세.”

“어찌하여 그렇습니까?”

“백성에게 사대부 100명보다 명의 한 명이 더 절실하지 않겠는가?”

참으로 날카로운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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