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개국(開國)(11)
화형식 D+4
허적의 안색은 적갈색을 띤 팥시루떡의 떡가루 색과 같았다.
속이 답답하여 숨을 쉬는 것도 힘들었다.
허기가 찾아오기에 밥을 먹지만 제대로 넘기는 것도 어려웠다.
밀어낼 수 없는 근심과 걱정이 원인이었다.
흐릿한 눈으로 수북하게 쌓인 장계를 바라봤다.
-보름이 넘게 비가 오지 않아 밀과 보리가 모두 말랐습니다.
-연일 내리는 우박과 밤마다 내리는 서리에 그나마 살아남은 작물도 모두 죽었습니다.
-큰 가뭄과 냉해가 함께 찾아와 밀과 보리가 모두 타죽었습니다.
……
-논의 볏모도 누렇게 탔습니다.
많은 글자에서 작은 웃음이라도 주는 내용은 단 한 줄도 없었다.
차마 언급도 하기 싫은 내용만 무수했다.
굶는 백성의 수는 세는 게 어려울 지경이었다.
속이 새카맣게 탔다.
언제부터인지 재해의 강도가 강해졌고, 횟수도 걷잡을 수 없었다.
방비할 수 없기에 대응이 기민하게 해야 한다.
하지만 대응책이라는 건 결국 구휼미였다.
“구휼할 여력이 있는가?”
“어림도 없습니다. 역병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백만 대군이 국경을 넘어도 이처럼 답답하지는 않을 겁니다.”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지. 지금은 일만 명씩, 일만 명씩…… 쉬지 않고 적이 국경을 침탈하는 느낌일세.”
윤선도는 짐작대로 어려운 상황에 속이 꽉 막혔다.
힘겹게 하루를 버텨도 내일이 나아지지 않는 굴레에 빠진 것만 같았다.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말했다.
“하루라도 빨리 어선을 출항(出港)해야 작게나마 보탬이 될 것인데, 참으로 답답하군.”
지금 조선의 현실을 고려할 때 어업(漁業)은 비기였다.
비가 많이 와도 가뭄이 닥쳐도 바다의 물고기는 탈이 없다.
유일한 생로(生路)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길은 여전히 험난했다.
내적으로는 어선의 건조가 절실했고, 외적으로는 청국 황제의 승인이 필요했다.
허적의 안색은 먹물처럼 어두워졌다.
중대본이 종래 조선과 기조를 달리한 건 오래였다.
실무를 책임지는 위치였기에 세세한 차이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가장 극명한 지점은 비축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미 국고는 바닥을 보였다.
무작정 탕진한 게 아니라 쌀이 있으면 유민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다.
또한, 티 나지 않는 여러 개혁에도 상당한 재원이 투입되었다.
“음. 한데, 군영을 해산하였네.”
논제와는 다른 말이 훅 치듯 들어왔다.
허적이 멈칫했다.
어두웠던 안색도 살짝 흔들렸다.
윤선도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군영 해산이 단지 군포 면제의 효과만 있지는 않을 것인데.”
“……선생. 비축해야 합니다.”
“자네, 내게도 비밀로 할 생각인가?”
“휴. 정확하게는 8만 석에 이릅니다. 한데,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선생. 본부장의 행보와는 별개로 중대본은 이제 본격적으로 비축해야 합니다. 현재 비축할 방법은 군영 해산으로 발생한 재원에 불과합니다.”
“음. 하면, 염전은 좀 어떠한가?”
허적은 이번에도 멈칫했다.
몸을 살짝 가다듬으며 말했다.
“소금을 헛되게 사용하지 않고 비축할 것을 명했습니다.”
“허. 어째서 그러한가? 사용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인데.”
“선생. 땅에서 나는 작물은 기근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류는 아닙니다. 가뭄이나 홍수에도 어류는 구할 수 있습니다. 반면, 어류는 오래 보관할 수가 없습니다. 장차 청국의 바다에서 어업을 크게 일으킬 것인데, 상하는 건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때 소금이 필요할 겁니다.”
“음. 한데, 군영 해산의 효과만 비축한다고 하였네만.”
“……선생. 원래 징수하였던 세입(稅入)은 아끼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개혁으로 확보한 새로운 세입은 비축해야 합니다.”
이미 속내를 다 꺼냈기 때문일까?
허적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데 조정은 성현 타령만 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다 죽게 생겼는데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진정하시게.”
“선생께서는 작금의 대치가 언제 종결될 것으로 보십니까.”
“솔직히 본부장이 송자를 천명할지는 몰랐네.”
“선생. 그간의 언행을 되돌아보십시오. 송자를 취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의 성정을 되돌아보면 거절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은 하긴 했네. 다만 반쪽에 불과하더라도 탐하는 수준이라고 여겼네만, 공식화되었으니 당혹스럽긴 하다네.”
“그의 성정만 보십시오. 그저 당연한 일에 불과하였습니다.”
송시열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은밀하게 이뤄졌다.
윤선도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면서 말했다.
“성현이 자리한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경험하지 못했네. 그러니 다시 땅에 두 발로 서는 데 걸리는 시간을 가늠할 수가 없지 않겠나.”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수도 있다는 말씀이군요.”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크겠지. 여진이 상당할 테니까.”
“휴. 필요한 일이지만 현실이 너무나도 버겁습니다. 조정과 사족이 하나로 단결해야 하는데 이토록 장기전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참으로 답답합니다.”
“나 역시 자네와 같은 생각일세. 하지만, 그간 우리가 한 방책으로는 도무지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지 않은가.”
“만일, 위대한 길이 무산되면 어찌 되리라고 보십니까.”
“생각하지 않아야 할 상황이겠지. 위대한 길의 무산은 중대본의 아사(餓死)와 직결할 것이니 말일세.”
말하고 나니 조선이 참으로 가년스러웠다.
200년을 넘게 종묘사직을 이어온 나라가 어찌 이토록 가붓할 수 있을까.
탄식하듯 말이 이어졌다.
“점진적인 변화로 오늘에 이르렀다면 어찌 탈이 생길 수가 있겠는가. 그러하지 못하였기에 일시에 변화를 도모할 수밖에 없네. 조선이 생존하려면 변환이 필연적인 시대가 된 지 오래니까.”
“그러나 선생. 어찌 결과를 쉽사리 예단할 수 있겠습니까. 이럴 때 중대본은 수세적으로 행동하는 게 옳습니다. 어떤 일이 발생할지라도 우리는 기근을 대비해야 하기에 그러합니다.”
만에 하나 송시열이 작은 실수라도 한다면 중대본은 뿌리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세종의 길 혹은 위대한 길을 지탱하는 전선의 실체는 결국 중대본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호판. 실은 그 말을 하고자 찾아왔네.”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우리는 더 강한 개혁이 필요해.”
개혁이 어려운 이유는 개혁이 무조건 옳은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단행되었을 때 발생할 문제가 세상을 더 어지럽게 할 수도 있다.
조선의 사대부는 이처럼 개혁의 모순을 정확하게 분석하여 반대했다.
그런데도 개혁을 도모하고자 하는 이유는, 예상되는 모순보다 현실의 고통이 더 거대하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개혁이라는 화두는 늘 절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살얼음판보다 아슬아슬한 작금의 정국에서 개혁은 독초(毒草)보다 무서울 수 있다.
이러한데 윤선도가 강경한 어조로 개혁을 언급하는 건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허적의 목소리는 자연스레 낮아졌다.
“무엇입니까?”
“우리는 본부장에게 환곡을 언질 주었네.”
“그렇습니다. 관련된 내용입니까?”
“서원의 진휼화(賑恤化)일세.”
“…….”
“서원으로 유입되는 재력을 진휼에 사용할 수 있다면 참으로 큰 도움이 될 것이네.”
“선생. 서원과 싸울 수는 없습니다.”
“호판. 지금이야말로 적기일세.”
허적의 눈동자가 혼탁해졌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개혁은 위정자에게 칼을 대는 것이다.
서원은 조선의 기득권 그 자체였다.
이를 도모하려면 정치 생명을 걸어야 했다.
하지만 승산을 장담할 수도 없다.
그러나 고작 정치 생명을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일신의 안위를 걱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중대본의 존폐와 직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중대본으로 여파가 번질 일은 없을 것일세.”
“무슨 말씀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송자를 탓할 것이네.”
“…….”
“물론 모든 일을 어찌 쉽사리 예단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중대본은 이때야말로 일을 더 강한 개혁을 도모할 수 있지 않겠나? 모든 화살이 송자를 향하고 있으니 말일세.”
“그의 뒤에 숨어 일을 도모하자는 것입니까?”
“숨는 게 아니라, 일을 도모하기만 할 것이네.”
세상의 모든 시선이 송시열에게 쏠려 있다.
이러할 때 중대본이 과감한 개혁의 칼을 휘두른다면 어찌 되겠는가?
화살은 일제히 송시열에게로 향할 것이다.
즉, 그가 버틸 동안 개혁을 단행하자는 의미였다.
“호판. 수백 개의 서원을 진휼청으로 바꿔낼 수 있다면 아사(餓死)하는 백성의 수는 확연하게 줄어들 것이네.”
“음.”
“명분은 이미 충분하지 않은가.”
“명분이라고 하셨습니까?”
“백성이 굶고 있네. 군영마저 해산한 마당에 사대부의 학문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가.”
“…….”
“입신양명(立身揚名)만이 사대부의 존재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하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기에 고민이 더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윤선도의 말처럼 지금이 적기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때였다.
밖이 과할 정도로 소란스러웠다.
관리 한 명을 불러 사유를 불었는데 내용이 걸작이었다.
“서원에서 의술을 교육해야 하자고 합니다.”
“허. 대체 누가 그런 말을 하였나?”
“예? 송자께서 이르시길 중대본은 모두 무릎을 꿇고 감격하였다고 했습니다.”
“뭐……?”
이어진 말에 허적과 윤선도의 표정이 ‘악귀(惡鬼)’처럼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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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祭物)의 명단을 살폈다.
정확하게는 몇 곳의 서원이 신탁을 따르겠노라 확인했다.
“…….”
생각만큼 많지 않았다.
10곳이 안 되었다.
물론, 규모를 떠나서 이는 엄청난 상징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간 서원이 조선에서 누려온 모든 명예와 권력을 내려놓겠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의 성에 찰 수는 없었다.
“허. 100여 명의 학자가 가져온 서원의 수가 고작 이 정도인가? 하면, 나는 대체 누구를 믿고 대사를 도모하겠나?”
“송구합니다. 하지만, 시일이 급박하여 일을 더 진행하기 어려웠습니다. 점차 많은 서원이 결합할 것이니 노여움을 거두어주시길 바랍니다.”
일리가 있다.
대충 고개를 끄덕일 때 소란이 일었다.
나도 모르게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바로
“대체 이게 무슨 말이오?”
“이게 무슨 일이오?”
허적과 윤선도였다.
오랜만에 만난 거물이었기에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색할 수 없기에 방긋 웃으면서 맞이했다.
“참으로 잘 오셨소.”
“본부장.”
“갈!”
“!!!”
어찌 노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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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대화가 필요했다.
그래서 불렀다.
그런데
“갈!”
갈……?
백 보 양보해서 송시열의 학문이 더 뛰어나긴 하다.
또, 중대본의 수장도 송시열이다.
그런데 꾸짖을 ‘갈(喝)’을 주고받을 관계였던가?
아니다.
목숨을 걸고 아니다.
그런데 ‘갈!’이라고 했다.
심지어 백주에 저 많은 사람 앞에서 말이다.
그냥 황당했다.
미칠 정도로.
“지금 뭐라고 하셨소……?”
“이미 내가 성현의 반열에 올랐기에 만인이 ‘송자’라고 부르오.”
“…….”
“혹시 이를 부정하시오?”
어이가 없었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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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평생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던가.
그런데 오늘 들었다.
심지어 송시열에게 들었다.
윤선도는 어이가 없었다.
그때 다시 들리는 목소리.
“이미 공들은 나의 가르침에 크게 감화되었거늘 대체 이 무슨 무례한 행동이오?”
아무래도 송시열이 실성한 듯싶었다.
그게 아니고서는 저따위 말을 백주에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지껄일 수는 없다.
“설마 성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생각이오?”
수치심에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더는 곤란했다.
“내가 조선의 유일 성현이외다.”
“…….”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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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당혹스러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당혹스러워만 해야지.
나는 더 고삐를 당겼다.
“호판.”
“…….”
“왜국으로부터 동을 구하여 화폐를 주조해야 하는데 여러 기술이 부족하다 하오.”
“…….”
“나의 가르침을 귀동냥으로 전해 들은 유형원이 이를 제기하였다는데, 어떻소?”
“…….”
“중대본에서 전격적으로 집행하면 바람직하지 않겠소?”
“…….”
두 사람의 눈동자에서 상당한 살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섣부른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여기서 뭔가를 했다가는 판을 엎게 된다는 걸 잘 알 것이니 말이다.
나는 더 박차를 가했다.
“중대본에서는 이를 수용하여 집행해야 할 것이오.”
“하지만…….”
“집행하면 길은 열릴 것이오.”
“…….”
“내가 그리할 것이니 더는 머뭇거리지 마시오. 반론은 허용치 않을 것이외다.”
“그리하겠소.”
허적과 윤선도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내 쪽으로 왔다.
중대본은 반대 방향인데 말이다.
살짝 긴장했다.
나를 지나칠 때였다.
“따라오시오.”
“대화라는 걸 해봅시다.”
등골이 오싹했다.
신이시여.
나를 보호하소서.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