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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168화 (168/298)

168화 개국(開國)(12)

화형식 D+4

내가 밖에서나 송자였지 중대본에 오면 그냥 송시열이다.

사실 여기까지 올 수 있는 건 ‘송자’ 등극(登極)을 막을 수 있는 인사들이 모두 중대본 소속이기에 가능했다.

그들이 적이었다면 등극은커녕 선언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데 이렇게 교무실로 불려오니 어색하고 뻘쭘했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거세게 치밀어 올라왔다.

하지만, 그리하는 건 조선의 유일 성현으로서 모양새가 빠지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여, 나는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응수하기로 했다.

“무슨 일이오?”

“실성하셨소?”

이런.

초장부터 윤선도의 워딩이 너무나도 강력하지 않은가.

여기서 처신 잘못했다가는 조만간 서원에서 나의 제사를 지낼 수도 있겠다.

영혼까지 끌어 올려서 무마해야 하기에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우리, 결과만 보는 건 어떻소?”

“응당 그리할 것이외다.”

호의적인 답변이었으나 목소리에는 진한 살기가 담겨 있었다.

눈빛은 날이 선 상태라서 쳐다도 못 볼 지경이었다.

어지간하면 대충 덮겠으나 조금 전에 내가 했던 발언들이 나를 위축시켰다.

“왜국으로부터 동을 구할 것이며, 장인도 육성할 것이오.”

“그래야지요.”

“서원의 진휼화도 도모할 것이오.”

“좋은 방안이오.”

“귀공의 말대로 의술 교육도 확대할 것이외다.”

“바람직하오.”

“그러니 버티시오.”

한마디에 심장 언저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하는데, 대응할 수가 없었다.

심장 언저리가 미세하게 떨려 답변할 수가 없었다.

그새 윤선도가 시선을 슬쩍 돌리면서 말했다.

“언젠가 기근이 수그러들면 서원의 진휼은 무력화될 것이오. 또한, 사족이 사사롭게 서원의 운영을 지원하는 행위도 그때는 어찌할 도리가 없소. 모두 기근을 극복하고자 사대부의 심장을 담금질하여 만든 일시적인 일에 불과하오.”

“…….”

“중대본이 무엇을 할지라도 서원의 폐단을 뿌리 뽑을 수는 없소. 또한, 서원과 정면으로 겨룰 수도 없소. 이는 가능한 일이 아니외다.”

“…….”

“하지만 화폐를 도입하는 일은 아니외다. 이를 도모해낼 수 있다면 서원은 궁지에 몰리게 될 것이오. 또한, 의술 교육의 확대는 사대부가 종래 가졌던 위상을 의원과 나누는 것이오.”

참으로 무서운 말을 편안하게 말한다.

물론 나를 쳐다보는 표정은 여전히 살벌하였지만 말이다.

“동을 구하여 동전을 주조한들 쉽사리 보급할 수 있는 게 아니외다. 얼마나 오랜 세월이 소요될지 가늠할 수 없소. 의원의 부상을 사대부가 어찌 대응할지 가늠할 수도 없소.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수면 위로 올라올 때 비로소 성과가 나올 것이오.”

“…….”

“일을 이렇게까지 만들었으니 기어이 감내하시오.”

“…….”

“조선의 모든 사대부가 귀공을 비난하더라도 참으시오.”

여전히 윤선도의 시선은 나를 향하지 않았다.

그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참으시오. 하면, 나 역시 불쾌함은 참을 것이오.”

심장 언저리가 계속해서 간지러웠다.

“미안하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나를 감내하는 것이오.”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나 역시 시선을 살짝 돌리면서 말했다.

“난세를 살아가는 선비라면 일신의 안위는 버려야 하지 않겠소?”

“…….”

윤선도는 여전히 딴 곳을 바라봤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시선을 돌렸고, 더 말하지 않았다.

다소 어색해진 분위기를 밀어낸 건 현실성이 가득한 허적의 말이었다.

“기근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소.”

숨이 턱턱 막히는 현실이었다.

또 그래서 더 냉정해야 했다.

“호판. 어차피 우리는 하루를 버티고 내일을 걱정해야 하오.”

“어찌 모르겠소이까.”

“그렇다면 차라리 과감한 개혁을 시도하는 게 옳소.”

“묻지요. 과감한 개혁이라는 건 대체 무엇을 이르시오? 이미 우리는 군영 해산까지 일궈냈소. 한데, 또 무엇을 도모할 수 있소?”

“그건 호판의 일이오.”

괜히 하는 말이 아니었다.

나는 이 시절에 도입할 수 있는 정책을 생산할 능력이 없다.

현재 송시열, 아니 송자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고려할 때, 말 한마디가 엄청난 파급을 낸다.

이때 설익은 정책과 섣부른 행동을 한다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하니 정책은 오직 이 시절 관리들의 영역이어야 했다.

“군영 해산이 가능했던 건 대청 협상이라는 현상이 존재하였기 때문이었소. 지금은 내가 모든 논제를 삼키고 있소. 그러니 이때 꼭 집행하여 조선의 환골탈태를 도모해야 하오.”

“…….”

“호판. 조선의 자력으로 천만석을 국고에 확보할 수 있다면 무엇을 걱정하겠소.”

물론 천만석이라는 수치는 상징적이었다.

한 톨이 아쉬운 조선의 처지를 고려할 때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환골탈태라…….”

허적은 홀로 읊조렸다.

머릿속이 참으로 복잡하고, 무수한 내용이 간지럽히듯 꿈틀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하니 속 시원하게 무언가를 꺼낼 수도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다.

무언가 건드리는 게 있다면 모조리 꺼내면 될 일이다.

“내가 버틸 것이니, 모든 걸 집행하여 조선의 환골탈태를 도모하는 게 옳소.”

“…….”

“할 수 있는 모든 걸 도모합시다.”

한마디를 더 보탰다.

“시간을 얼마나 벌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소. 그러나 중대본이 요구하는 시간은 내가 감당할 것이니 해봅시다.”

“환곡.”

정말 집요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재차 이를 언급했다는 건 단지 환곡 제도에 손을 보는 수준을 원하는 게 아니라는 의미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기어이 나를 태워죽이시려는 것이오?”

“성현이면 이 정도는 해야지요.”

“하하하. 좋소. 버티겠소.”

“오해가 있으시오. 이는 ‘송자’께서 직접 하셔야 하오.”

“하하하. 좋소. 그냥 내 몸에 불을 지르리다.”

“무운을 빌겠소.”

말과는 다른 허적의 결의가 강렬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저 시원하게 웃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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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형식 D+4

김근행의 얼굴은 상기됐다.

내 기억 속의 모습과 참으로 달랐다.

“늦었지만 감축드립니다. 그런데 왜국과 무역하여 동을 들이신다고요?”

“자네 축하 인사가 너무 간략한 게 아닌가?”

“재차 감축드립니다. 한데, 규모가 백만 근을 넘는다고 들었습니다.”

“…….”

상인의 길이란 이런 것일까?

김근행에게 송자나 주자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또 하나의 깊은 깨달음을 느끼게 해주는 순간이었다.

“소인에게 맡겨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자네 설마 백만 근을 다 하겠다는 건가?”

“해낼 수 있습니다.”

“이보게. 상황은 그게 아닐세. 가져온들 모두 동전으로 주조할 것이네. 한데, 자네에게 독점권을 준다면 조정은 더한 값을 치러야 하는 걸세. 구태여 그리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정색하며 불가함을 말했다.

김근행은 잠시 멈칫하였으나 숨을 고르더니 곧장 말을 이었다.

“어차피 어떤 대가를 치를 생각은 없으시잖습니까.”

“음.”

“아니, 조정이 그럴 여력은 없을 겁니다. 과거라면 모르지만, 중대본 수립 이후 구휼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런. 그렇게 티가 났나?”

“물론입니다.”

김근행은 변승업과는 달리 직설적인 화법으로 협상의 주도권을 가져갔다.

이리되었는데 계속하여 아닌 시늉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옅게 웃으며 말했다.

“무엇을 원하나?”

“정확하게는 독점권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소인이 독점하여 동을 조정에 바치는 것입니다. 무려 100만 근이나 말입니다.”

“그렇지. 그 노고를 어찌 모르겠나? 모든 관세를 제외해주겠네.”

“전혀 셈이 맞지 않습니다.”

“한데, 화폐가 유통된다면 자네도 좋지 않나?”

“거짓을 말하지 않겠습니다. 조정에서 이토록 의욕적으로 동전을 보급한다는 건 상인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입니다.”

“종래 굳건하였던 사족의 향촌 지배권을 무너뜨릴 수도 있을 테고.”

“예.”

“이런. 자네, 속을 숨기는 방법을 모르나?”

“다 아시는데 왜 그리하겠습니까.”

“큭. 좋군.”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이 정도면 더 내어줄 건 없을 듯한데.”

“하면, 소인도 나서지 않겠습니다.”

“광산을 내어주겠네.”

“광산‘들’을 내어주십시오.”

“정확하게 말하게.”

“조정이 안정된다면 더는 소인에게 동을 맡기지 않을 겁니다. 그때까지 소인이 마음껏 광산을 캘 수 있게 해주십시오.”

무제한 광산 채굴권이었다.

조선의 지하자원을 넘기고 상단으로부터 동을 얻는다.

지금 조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묘수였다.

어차피 썩어서 굳어 버린 자원이니 말이다.

거절할 이유가 없다.

“물론일세. 그러나 자네가 말한 바와 같이 이 모든 건 조정의 안정까지일세.”

“물론입니다. 그걸 다 끌고 가는 건 소인에게도 부담이지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 조선도 동전을 가질 때가 되었지.”

“지금도 많이 늦었습니다. 그러니 더 늦출 수는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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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형식 D+5

밤새 나라 걱정하느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인지 목이 뻐근했다.

손으로 살짝 목을 누르며 쳐다봤다.

좌측에서는 윤증이 토론회를 이어갔다.

정말 다양한 화두가 오고 갔는데 핵심 사안은 이미 중대본의 논의로 상정되었다.

그중 상당히 주목할 안건이 하나 있었다.

일관되게 상업의 확대로 뻗어가던 윤증의 토론회가 광업(鑛業)에 손을 댄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답게 말을 돌려서 어렵게 하였으나, 한마디로 숨죽이던 광산을 대대적으로 개발하자는 말이었다.

그간 조선의 위정자들이 바보라서 광산 개발을 도모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또, 윤증에게 기성세대가 촘촘하게 만든 정책적 그물을 훌쩍 넘어설 수 있는 경륜은 없었다.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과 세밀한 정책을 도출하는 건 다르다.

정도전이 역성을 주창하였으나 주된 정책은 조준이 도모한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 성리학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윤증이 이리 나온다?

뻔했다.

이 시절에 궤를 벗어난 사고를 하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으니까.

인기척이 느껴졌다.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가 거들었나 보군.”

“소생은 그저 거들기만 하였습니다. 모두 송자께서 이르셨던 내용을 귀동냥으로 전해 들었으니 말입니다.”

유형원의 목소리에는 잔잔한 웃음이 담겼다.

“성현의 가르침을 배우는 건 당연하지. 안 그런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군요.”

“한데, 언제 윤증과 이렇게 가까워졌나? 정책을 제안할 정도라니.”

“가히 조선 최고의 인재라고 해도 무방한 인사입니다. 그러한데 졸렬한 스승을 만나서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듯하여 손을 내밀었지요.”

“그 손을 잘라버리고 싶군.”

“오늘은 ‘송자’께 내밀고자 왔습니다.”

육조 거리에서 대놓고 주고받는 대화였으나 밀도가 엄청났다.

물론, 누구도 들리지 않게 목소리의 크기는 적당하게 조절하였다.

“그래야겠지. 보아하니 윤증을 통하여 그간 속에 품어두었던 정책을 쏟아낸 듯하니 말일세.”

“허. 정녕 그리 보셨습니까?”

“하면, 아니겠나?”

“그렇다면 되겠습니까?”

“선문답 말고. 어려운 걸 꺼내 보게.”

“광산 개발인데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이거 왜 이러나? 단지 광산 개발로 그칠 생각이 없지 않은가. 딱 보이는데 이러나? 그리고 손을 내밀러 왔으면 제대로 해야지?”

“다 아시는 듯하니 세세한 내용을 전해드리지 않아도 될 듯해서 말입니다.”

“아니지. 대충 그런 느낌을 받았을 뿐이라는 걸세. 그러니 친절하게 말해보게나.”

다시 재촉했다.

유형원은 옅은 미소를 거두며 말했다.

“…….”

말을 끊지 않고 들었다.

아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였다.

그야말로 조선의 산하를 한계치까지 몰아넣는 수준이었으니까.

과장을 조금 보태서 해내기만 한다면 천지개벽이었다.

“평시라면 불가능하지요. 하지만, 난세에 송자께서 등장하셨습니다. 어찌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자네는 어렵지 않겠지. 나만 힘들지 않겠나?”

“그럴 생각으로 송자가 되신 거 아닙니까.”

다들 송자 코인에 탑승한다.

이쯤 되면 속에 담아뒀던 정책을 이룰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는 것 같다.

그래도 대동법을 어찌하자는 말이 안 나오는 게 어딘가 싶다.

나는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대감!”

우측에서 어디서 왔는지도 알 수 없는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물론, 누군지 알고 있었다.

성현의 위패를 내리고 의술 교육을 도입하겠다는 선언을 한 서원이 등장했다.

그 수가 한자리에 불과할지라도 경직된 조선에서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단지 반발을 넘어 큰 혼란이 되었고, 화살은 내게로 쏠렸다.

저들이 바로 활을 들고 화살을 쏘러 온 무리였다.

물론, 나 송자에게는 생채기조차 낼 수 없다.

그저 가소로울 뿐이었다.

또한, 저들은 연좌라고 말하겠으나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냥 오합지졸의 민원에 불과했다.

좋게 봐줘도 내게 ‘면담’을 요청하는 것이다.

“대감.”

“대감……? 나를 불렀나?”

“그렇습니다. 대감.”

“자네들 아직도 내가 대감으로 보이나?”

“예……?”

이런 발칙한 무리를 봤나.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이미 내가 성현이거늘 대감이라고 하였나?”

“!!!”

“죽은 성현의 시체나 부여잡고 있으니, 산 성현이 눈에 보이지 않나?”

“그, 그것이 아니라…….”

“갈!”

“!!!”

사실 허적의 우려대로 이 싸움이 더 길어지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데도 줄을 놓지 않는 이유는, 누군가의 반대가 내게로 귀결되어야만 중대본이 개혁 입법을 도모하고 집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응대의 방식은 전과 다를 수밖에 없다.

하나씩 들어주며 설득할 시기는 지났다.

이건 중대본 수립 전후나 사문난적을 주창할 때 했던 일이다.

“이미 조선은 죽은 성현을 섬기지 않는다.”

“대, 대체 누가 그것을 규정할 수 있습니까?”

“이러한데 무엇이 문제인가?”

“하지만 서원은…….”

“자네가 나를 가르치는가?”

“!!!”

길게 말하고 싶지 않다.

그냥 내치면 그만이다.

“죽은 성현이 제사를 지내라고 하였다면, 살아 있는 성현은 산 사람을 우선할 뿐이다.”

지긋이 쳐다봤다.

손을 내저었다.

“굳이 할 말이 있으면 자네들이 모시는 성현을 데려오게.”

“!!!”

“그 정도는 되어야 격이 맞지 않겠는가?”

“!!!”

“겸사겸사 그들의 의사도 물어보겠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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