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노래하라-169화 (169/298)

169화 개국(開國)(13)

화형식 D+7

죽은 성현을 데려오라고 했다.

조롱도 이런 조롱이 없었다.

보지 않고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죽은 성현의 제자들이 얼마나 분노하였는지 말이다.

그런데 저들이 나를 어찌할 수는 없다.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탄핵한들 관복을 벗는 것뿐입니다. 또한, 더 탈이 날지라도 고작 귀양이나 갈 겁니다. 그러한들 송자의 권위가 어디 가겠습니까.”

“…….”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

일장 연설을 하는데 송준길이 아무 반응도 없었다.

내 숨통을 끊을 정도의 잔소리를 구현하였던 전적을 고려할 때 참으로 의아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왜 그러십니까? 걸리시는 거라도 있습니까?”

“말씀을 전하시는데 어찌 끼어들 수 있겠습니까.”

“아…….”

“심장에 새기고 있으니 계속 이르시지요. 송자시여.”

송준길이 이렇게 나온다는 건 상당히 좋지 않은 징조였다.

필시 이런 방법으로 내 숨통을 막아버릴 것이다.

보이지 않는 불안함이 거세게 엄습했다.

조기에 진압하지 않으면 내가 죽을 수도 있다.

“설마 속에 담아 두셨습니까? 보기보다 옹졸하시군요.”

“뭐라?”

“거. 대사를 도모하기 위한 발판이었습니다. 한데, 사사로운 감정을 앞세우다니 어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나의 뻔뻔함에 송준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나는 멈출 수 없었다.

“그래요. 이왕 마음을 다부지게 드셨다면 일을 빨리 추진해야지요.”

“허.”

“형님. 더는 시일을 끌 필요가 없습니다.”

철판도 머리를 숙일 나의 태도에 송준길은 결국 고개를 돌렸다.

나는 싱그럽게 웃으며 말했다.

“하늘 위에서 펼쳐지는 이 지루한 싸움을 현실로 끌어내릴 수 있는 분은 형님밖에 없습니다.”

“되었네.”

“하하하. 하면, 물러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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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형식 D+7

공상 속에 존재하는 성현은 가만히 앉아서 말씀을 전하는 이미지였다.

그러면 다들 알아서 발에 땀이 나도록 달리고 달려야 하는데, 현실은 너무나도 달랐다.

내가 제일 바빴다.

“그렇게 앉아만 있을 거면 그냥 돌아가시오.”

까칠한 허목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처럼 위생국에 왔는데 반겨주지는 못할망정 저러고 있다.

쉴 틈도 없이 바쁜 건 어디까지나 남의 일이다.

답답하여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다 격이라는 게 있소.”

“뭐요……?”

“나는 이미 송자이거늘 어찌 공과 겸상을 할 수 있겠소?”

“하! 참으로 우습소. 성현이라고 하면 다 성현이 되오?”

“다 공의 상대적인 박탈감이외다.”

“!!!”

“그러니 부지런히 학문을 익혀 만인의 추앙을 받아 보지 그러셨소?”

“!!!”

안 봐도 허목의 눈동자가 지진을 일으키고, 얼굴에는 용암이 흐를 게 뻔했다.

그러니 굳이 목 아프게 돌려서 쳐다볼 필요는 없다.

그러다가 병자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허. 어디가 안 좋아서 왔나?”

“당연한 말이 아니오?”

“어디가 안 좋은지 물어본 거요.”

“…….”

자신을 두고 나와 허목이 다투자 병자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나는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친히 방문하여 위무하였으니 잘 살펴줄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되었다. 당연한 일이거늘.”

“가, 감사합니다.”

“혹시 누가 괴롭히거든 허 국장에게 말하게. 내가 잘 일러뒀으니까.”

“예, 예? 그리하겠습니다.”

고개를 돌리니 허목이 눈을 부라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병자들 앞에서 진흙탕 싸움을 할 수는 없기에 더 보태지는 않았다.

나 역시 더 도발하지 않고 병자들을 유심히 살폈다.

확실히 위생국의 출범 전과는 달랐다.

험한 세상이니 아프거나 다치지 않을 수는 없으나, 의원에게 병세를 말하는 자체가 편안해 보였다. 그만큼 위생국이 병자에게 낮은 자세로 다가갔다는 의미일 것이다.

문턱이 낮아진다는 건 계급이 존재하는 이 시절에서 가장 바람직한 현상이다.

허목과 유형원이라는 거물급 인사를 두 명이나 배치할 정도로 중대본이 전력을 다한 결과였다.

적당한 시간이 지났다.

어차피 허목이 직접 살피는 백성은 실질적인 병자의 수가 많지 않았다.

대부분 역병의 관리와 연결되는 위생의 보급이었다.

위생국을 총괄해야 할 허목이 병자 한 명을 붙잡고 침을 놓거나 탕약을 제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반계가 전하였소. 서원에서 의원 교육을 도모하게 될 것이라고.”

“그러니 위생국이 전면에 나서야지요.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일인데 아무나 맡을 수는 없지 않겠소이까.”

“승산이 있소?”

“내가 송자요.”

“썩 물러나시오.”

“하하하!”

호탕하게 웃지 않을 수 없다.

허목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일찍이 사대부가 교화로서 위생을 보급하기로 하였소.”

“물론이오. 성과가 없지는 않았소.”

“어찌할 생각이오?”

“그 권한조차 박탈할 것이오.”

“…….”

“사대부의 교화란 백성의 삶을 관통하오. 한데, 그들은 위정자가 아니오.”

그늘이 진 허목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농업을 권장하는 건 목민관의 일이며, 위생을 말하는 건 의원의 역할이 될 것이오. 단지 양반이라는 이유로 백성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시대는 이제 끝이 나야 하오.”

“하지만, 사대부이기에 많은 역할을 바라고 있소. 박세당이 주창한 원리주의만 하더라도 ‘수기치인(修己治人)’을 강조하며 사족에게 구휼미를 독려하고 있소. 한데, 가진 권한을 모두 거두면 어찌 쉽사리 나서겠소?”

“그건 말 그대로 권유이지 강제가 아니지 않소이까.”

“…….”

“그동안 분란을 우려하여 타일렀을 뿐이오. 한데, 그간 우리가 걸어온 길은 오늘을 버티는 게 전부였소. 만일, 그들의 휘둘렀던 권한을 거두었을 때 내일도 버틸 수 있다면 어찌 행하지 않겠소이까.”

나의 단호한 어조가 원인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우려를 표하였을 뿐이었을까.

허목은 더 말을 보태지 않았다.

자연스레 화두를 돌렸다.

“한데, 대체 무슨 여력으로 그 많은 의서를 편찬할 생각이오?”

“우선 선생이 의서의 초안을 내어주시겠소?”

“하면?”

“인쇄할 것이오.”

“재원을 감당할 수 있겠소?”

“선생. 그거 아시오?”

“무슨 말이오?”

“원래 난세에 서적이 많이 출간되는 법이오.”

“…….”

“재원 걱정은 하지 마시오. 내가 알아서 할 것이외다.”

피식 웃으면서 한마디를 더 했다.

“인쇄가 어려우면 필사라도 할 것이오.”

허목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

그래서 말해줬다.

“성현의 뜻은 감히 헤아릴 수는 없는 법이오. 그러니 묻지 마시오.”

“썩 나가시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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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형식 D+8

박세당의 목소리가 좌중을 울렸다.

“조선은 비축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미 국고는 바닥이 났습니다.”

묵직한 서두(序頭)였다.

“구휼미를 감당해야 하니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토록 불안한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선생께서 방법이 있습니까?”

“일찍이 우리의 선대는 사전을 혁파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우리가 부족하여 그토록 엄청난 일을 도모할 수는 없다면 비슷한 효과를 일궈내면 될 일입니다. 하여,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

“전호(佃戶)의 세율을 내리고, 지주의 세율을 올린다면 어찌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지주는 수입은 줄어들고 지출이 늘어나게 된다.

명료한 제안이었다.

사족들은 반론을 꺼내지는 않았으나 곤란한 심경을 숨기지도 않았다.

박세당은 분위기를 환기하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소생은 ‘영원히’를 언급한 게 아닙니다. 일단 백성을 구제하는 데 모든 걸 동원해야 합니다. 하여, 제안하는 겁니다.”

박세당은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십수 명의 사족을 바라봤다.

원리주의를 따르는 인물들이었기에 소집은 쉬웠다.

하지만, 더 나아가는 건 이렇게나 어려웠다.

그렇다고 탓할 수는 없다.

이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으니 말이다.

자고로 10석의 구휼미를 낼 수는 있다.

하지만 추가로 10석의 조세를 내는 건 어렵다.

아니, 이를 동의할 지주는 없다.

“선생. 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동의할지라도 사족의 9할은 반대할 겁니다.”

……

“이미 올라간 조세를 원래대로 돌리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이를 누가 동의하겠습니까.”

과연 우려의 말이 봇물 터지듯 나왔다.

다들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제안 자체를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예상한 일이었기에 박세당은 편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소생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다른 방책이 있습니까?”

“법도로 세우는 게 어렵다면, 민간에서 민간의 일로 시작하는 건 어떻습니까.”

“예……?”

“사족의 사사로운 일입니다. 난세가 끝나면 원래대로 되돌리면 될 일이니 어찌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음.”

“우리의 결의라면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나라에 내야 할 조세를 임의로 할 수는 없으니 환곡에 보태면 어찌 부당하다고 하겠습니까.”

말을 끊어서 침묵을 만들었다.

분위기를 환기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나치게 길어진다면 되려 해로울 것이니 다시 운을 띄웠다.

“선생들께서 동의하시어 일을 도모한다면 뜻있는 사족이 모두 나설 겁니다.”

“원리주의란 대체 무엇입니까.”

누군가의 물음이었다.

박세당은 드디어 올 게 왔다고 여겼다.

그간 모호하였던 원리주의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은 저변에서 일어나고 있었으니 말이다.

“소생이 원리주의를 주창하였으나 명확한 길을 제시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비로소 알게 되었으니, 오늘 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무엇입니까.”

“결국, 수기치인(修己治人)이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성리학은 참으로 말이 많습니다. 하지만, 가장 근본은 수기치인이었습니다. 이는 대체 무엇이었는지 되돌아보고 되돌아봤습니다. 결론은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사대부가 짐은 무겁게 들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

“그간 우리 사대부는 짐을 백성에게 들게 하고, 말만 하였을 뿐입니다. 이 역사는 이제 멈춰야 합니다.”

이는 사대부가 백성을 부양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참으로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책임감이 필요했다.

원리주의의 끝은 성리학의 복원이 아니라 사대부의 희생일지도 모른다.

사족들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실제로 돌아가는 상황은 심상치가 않았다.

“서원에 의술 교육을 보급하고 동전을 유통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하지요. 반길 수만은 없는 일입니다. 모든 걸 내어주고 남는 건 서책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입신양명만이 학문을 익히는 이유는 아닙니다. 아무리 학문의 경지가 높더라도 백성이 구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수기치인의 끝은 나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소생은 이를 보고 있습니다.”

“…….”

“우리의 걸음은 끝내 조선의 법도를 바꿀 것입니다.”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박세당은 이를 원하지 않았다.

“조선의 역사에 이 길을 걸었던 선각자는 오직 한 분이 계십니다.”

“누굽니까.”

“개국 공신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조준) 대감이십니다.”

“결국 위대한 길로 진입하길 원하는 거군요.”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한데…….”

반론일까?

합의할 수 없다면 원리주의는 멈추게 될 것이다.

박세당은 땀이 찬 손을 꽉 쥐며 쳐다봤다.

“우암 대감의 송자 선언은 어찌 대처할 생각입니까.”

예상과는 다른 물음이었다.

하지만, 작금의 정국에서는 결국 나올 수밖에 없는 말이기도 했다.

박세당은 이미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내렸다.

길게 끌고 갈 생각은 없기에 차분하고 가볍게 말했다.

“더 직설적으로 말씀을 드리지요. 소생은 개입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선생들께서 고민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목소리를 내십시오. 하면, 될 일입니다.”

“어째서 불개입을 결정하셨습니까.”

속이 쓰렸다.

여전히 조선은 백성의 실질적인 삶을 좌우할 정책이나 결단보다는 사대부의 세상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백성에게는 ‘그들의 나라’에 불과한 일입니다.”

“…….”

“백성은 아무런 관심이 없기 때문이지요.”

“…….”

“누가 성현이 되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미증유의 난세를 극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백성을 진실로 위한다면 성현이 ‘그들의 나라’가 아니라 ‘우리 고을’의 성현이 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소생은 필시 이렇게 생각합니다.”

박세당의 말이 울림을 일으켰을까?

사족들의 표정은 참으로 복잡해졌다.

그리고

“우리 고을의 성현이라. 그거 참으로 탐이 나는군요.”

“좋습니다. 소생은 나서보겠습니다.”

“역사에 남는 성현이 위대하지만, 고을을 지키는 성현도 나쁘지 않지요. 아니, 오히려 더 좋지요.”

사족들이 찬성의 뜻을 밝혔다.

박세당은 환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더 보탰다.

“정책이 아니라 사족의 걸음으로 정책을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해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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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의 다툼은 민생과 직결해야 한다.

더는 정신과 정신의 다툼을 일궈내지 않을 것이다.

역시나 이들은 쉬지 않고 공중전만 펼쳤다.

5현을 복원한다면 모든 싸움을 정리할 수 있으니 그리하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조선의 역사는 늘 이렇게 진행되었으니까.

모든 논의는 성현의 가르침이었으며 농업 국가의 전형을 만드는 것으로 진행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내가 송자였기에 싸움은 기존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시작되었다.

도산 서원의 통문이 발의되었다.

그러나 저들이 5현을 붙잡고 나를 공격할 동안 모든 건 마무리됐다.

저들은 무지하여 지상전에서 아군이 국경을 넘어 보급선을 길게 잡고 미친 듯이 때리고 있는데 오직 공중전만 집중했다.

그리고 아군의 보병이 어느새 적의 숨통을 잘라 버렸다.

모든 조건이 마련되었다.

그리하여 죽은 성현의 무리가 발을 디딜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현실은 경세가의 자리이니 말이다.

빙그레 웃으며 읊조렸다.

“조선판 아마겟돈이군.”

저들의 등판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그리고 정신과 정신의 싸움은 이 한 번으로 끝을 낼 것이다.

이제 조선은 밥상과 밥상의 논쟁을 펼칠 때가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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