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교향곡 제1번 ‘조선(朝鮮)’을 준비하다(1)
일은 마무리가 됐다.
평가를 뒤로 하고 확실하게 한 가지가 별로였다.
아니, 최악이었다.
떠올렸다.
과거 이연에게 송자의 공인을 청할 때였다.
*****
서글서글한 웃음이 감돌던 분위기는 자연스레 밀려났다.
“사문난적, 위정척사, 원리주의, 세종의 길, 위대한 길 다 좋소.”
“…….”
“이제 어떤 변화를 촉진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전할 때가 되었소.”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놀리던 사람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자세를 가다듬고 경청해야 할 상황이었다.
“중대본 수립 이후 걸었던 길은 모두 조선이었소. 군영을 해산하여 군포를 철폐하였으니 이 역시 조선이었소. 한데, 위대한 길을 걷고자 한다면 꼭 조선이어야 할 이유는 없소. 이제 이를 세상에 알려야 할 때가 되었소.”
이연의 말대로였다.
그동안 우리는 길을 찾기에 바빴다.
동서남북……어느 방향이 살길인지 확인하기에 버거웠다.
이제는 가야 할 길을 찾았다.
그렇다면 설명해야 한다.
뒤따라올 사람들에게 이 길에는 무엇이 있으며 끝에는 어찌 되는지를.
정치는 이를 정책이라고 부른다.
“이토록 엄중한 요구가 있소. 한데, 기어이 하늘이 될 생각이오?”
“참으로 짓궂으시옵니다. 신은 원하지도 않은 자리였사옵니다. 아시지 않사옵니까.”
“하늘에 오르면 세상을 내려보게 되오. 어찌 머물고 싶지 않겠소?”
“뜻하지 않게 너무 높은 곳에 오르게 되었사옵니다. 그래서인지 어지럽사옵니다. 하오나 서둘러 내려가면 탈이 날 것이기에 적절할 때 천천히 내려갈 것이옵니다.”
송자(宋子).
유학에서 가장 지고한 위치인 성현의 반열이었다.
유자라면 누구라도 바라보며 다가가고 싶은 위치였다.
심지어 사후(死後)가 아니라 생전(生前)이었다.
어찌 영원히 머물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건 이 시절 사대부들의 소망에 불과했다.
나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궁금하오. 경이 질겁한 건 진심이었는데 갑작스레 결심한 이유가 무엇이오?”
“그저 어심을 따랐을 뿐이옵니다.”
이연의 낯빛이 밝고 산뜻하게 붉어졌다.
젊은 군왕의 오랜 번뇌가 잘 귀결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조선이 성현의 가르침을 따른 건 사실이옵니다. 하온데, 어찌 어명의 권능보다 우선할 수 있사옵니까.”
“…….”
“부득이하게 성현이 필요하다면 군왕의 권능으로 정할 뿐이옵니다.”
어제와 오늘의 조선은 성현이 신이었다.
하지만 오늘과 내일의 조선은 군왕이 성현을 선택할 것이다.
통치의 수단으로.
“필요 없다면 군왕의 권능으로 지울 수도 있어야 하옵니다.”
하여, 나는 새 시대의 제물(祭物)이 되기로 했다.
“경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을 잊지 않을 것이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마왕의 침략을 막고자 주신(主神)을 죽이고 스스로 신이 된 자의 무게란 이런 것일까.
나는 이 무게를 능히 감당할 것이다.
*****
너무나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근로 계약서는 분명히 이랬다.
일이 끝나면 송자의 정치 사회적 생명을 박탈하기로.
그래서 기다렸다.
인정전의 개국 선언 마지막에 이연이 ‘송자는 박탈하오!’라는 선언을.
그런데 그런 일은 아예 발생조차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송자는 너무 멀쩡했다.
사지도 멀쩡하고, 정치 사회적 생명도 불타오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아직 송자였다.
이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강력하게 항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전하.”
“이런. 조선 유일의 성현께서 오셨소?”
근로 계약서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는데 뻔뻔하다.
심지어 이제는 존칭까지 제대로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대놓고 보여주면서 물었다.
“신을 어찌하여 송자에 머물게 하셨사옵니까.”
“경이 아쉬울 듯하여 그리하였소.”
“전하……?”
“하하하!”
이연이 호탕하게 웃었다.
나도 썩은 미소를 지었다.
“송자가 간절한 시대라고 단언하오.”
“…….”
“보시오. 송자의 가르침이 내려지자 어명으로도 어려웠던 일들이 얼마나 순탄하게 진행되었소?”
이것은 마치 일 잘한다고 의사도 묻지 않고 잔업을 시키는 행위와 마찬가지였다.
아니다.
고작 그 정도가 아니라 퇴사 의사를 밝혔는데 마음대로 계약 연장을 한 것이다.
고용주가 마음대로 도장까지 찍어 버린 격이나 다름이 없었다.
심지어 비정규직이며 연봉도 동결이다.
이런 엄청난 고용 사기를 치고서도 어찌 이토록 뻔뻔할 수가 있는가.
이를 갈면서 말했다.
“전하.”
“가르침을 내리시오.”
하늘 아래 이런 밑장 빼기는 존재할 수가 없다.
이를 더 빠득빠득 갈면서 말했다.
“그러하니 어명으로 송자의 권위를 박탈하면 될 일이옵니다. 그리하시오면 누가 감히 어명의 권위를 넘을 수 있겠사옵니까.”
“그렇소.”
“그러하옵니다!”
“방금 언급한 바와 같이 송자의 권위는 종래 어명보다 상징성이 있었소. 그러하니 ‘계획대로’ 권위를 박탈해야만 어명의 위엄이 바로 설 수 있는 조선이었소. 이 얼마나 애달픈 일이오?”
내가 흥분해서 실언하고 말았다.
악덕 고용주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박탈한다고 할지라도 결과를 감히 장담할 수 없소. 그러한데 어찌 군왕으로서 경솔하게 행동할 수 있겠소?”
“전하…….”
“미증유의 기근이 도래한 난세요. 한데, 편하고 안전한 길을 두고 대체 왜 힘들게 산을 넘어야 하오?”
“…….”
“그러하니 신하로서 양보하시오.”
“이럴 때만 신하가 되옵니까?”
“이런. 내가 실언했소. 조선의 유일 성현이자 살아 있는 성현인 송자로서 종묘와 사직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주시오. 긴히 부탁하오. 송자.”
실언 한번 했다고 열정 페이를 노골적으로 요구한다.
수염까지 파르르 떨렸다.
“하하하! 혹시 아오? 사후 유일 성현으로 대성전에 추존될지.”
“전혀 바라지 않사옵니다!”
“하하하! 그렇겠지요. 이미 성현이거늘 무엇을 바라겠소이까.”
이연은 좋아 죽으려고 했다.
나는 그냥 죽으려고 했고.
“신이 오늘은 절대 잊지 않을 것이옵니다.”
“물론이오. 송자를 재결의한 날이니 어찌 잊으시겠소이까. 하하하!”
“…….”
“하하하!”
시작부터 틀렸다.
예송논쟁부터 강력하게 1년 복을 주장했어야 했다.
그래서 그냥 미친 송자가 되어 왕 위에 군림했어야 한다.
조선을 송자와 그들의 나라 즉 신성 조선 제국으로 만들어야 했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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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연의 말이 꼭 틀린 건 아니었다.
사상의 영역이라는 건 그렇게 가볍게 정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무려 200여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이 땅을 지배하였던 무당파의 시조들을 밀어내는 일이었다.
단적으로 얼마 전 무당파는 진심으로 감복한 게 아니라 이연이 일방적으로 찍어 누른 것이었다.
언제라도 무당파의 상소가 빗발쳐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근로 계약서 위반과 고용 사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이성의 영역이었다.
화가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터벅터벅 걸어갈 때였다.
“송자께서 어찌 이리도 천박하게 걷소?”
주먹을 꽉 쥐게 만드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윤선도였다.
씰룩이는 볼을 숨기지 않고 쳐다봤다.
“왜 부르셨소?”
“허. 어찌 성현의 언행이 이리도 가볍소?”
“죽으면 무거워질 것이외다.”
“그렇소? 한데, 어선은 대체 어찌 되어가고 있소?”
그렇지 않아도 이 문제도 정리해야 했다.
청나라의 답변을 떠나서 바다야말로 식량의 보고(寶庫)인 건 확실하니 말이다.
화가 나고 열이 뻗쳤으나 일을 안 할 수는 없었다.
“따라오시오.”
“과연.”
“…….”
하.
다 불태워버리고 싶다.
씩씩거리며 걸어갈 때였다.
“안 그래도 찾았소.”
까칠한 목소리가 들렸다.
허적이었다.
“김근행이 동을 구하기로 했다고 들었소. 또, 여러 광산도 있고.”
대외 교역과 내정 개발이다.
허적의 깐깐한 눈썰미가 필요하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
“가면서 정리하지요.”
“참으로 듬직하오.”
계약서를 꼼꼼하게 확인하지 못했더니 고용주 측근들이 이렇게 날뛰는구나.
내가 누구를 탓하겠는가.
이를 악물며 걸어가는데 불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종일 찾았습니다.”
과연 유형원이었다.
“소생이 일전에 전한 내용이 어찌 되었나 하여 찾아왔습니다.”
조선을 변혁할 수 있는 내용이다.
절대로 가볍게 넘길 수 없고, 한시라도 빨리 일을 도모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따라오게.”
“과연 송자이십니다.”
하늘이여, 땅이여…….
한탄하듯 한숨을 다시 내쉴 뿐이었다.
처량하게 걸어가는 데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계셨습니까!”
박세당이었다.
“사족을 설득하여 전호의 처우를 개선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대대적으로 확대할 수 있다면 어찌 크게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난세에 영웅이 등장한다고 하였던가.
세상이 이렇게 어지러운데 제 이익보다는 백성의 곳간을 생각하는 착한 지주가 있다.
너무나도 바람직한 현상이었기에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생각을 말해보게.”
“역시 방책이 있으셨군요.”
당신 생각을 말해보라고.
내가 방책이 어디 있겠냐고.
지금부터 찾아봐야지.
무거운 가슴을 억누르며 걸어갈 때였다.
“일은 펼쳐놓고 이리 방치하면 어쩌자는 것이오!”
대뜸 허목이 등장하여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그런데 왜 왔는지 안다.
내가 부추긴 일이 있지 않았던가.
썩은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알겠소.”
“말만 할 일이 아니외다!”
말만 하는 게 아니라 이제 막 무당파를 내쳤다.
직후 근로 계약서를 검토했을 뿐이다.
내가 노느라 일을 미룬 게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앓느니 죽는다.
시름시름 앓으며 걸어갈 때였다.
“여기 있었나? 상업 확대에 대해서 논의하기로 하였는데 어찌하여 이리도 대화가 힘든가.”
윤선거였다.
내가 놀았냐고.
속에서 무언가 거세게 치밀어 올라왔다.
그런데 윤증과 함께였다.
아무리 그래도 아들이 보는 앞에서 면박을 줄 수는 없는 법이다.
썩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단 가지. 그런데 잠시 기다리게. 선수가 많으니 말일세.”
“답답하군. 참으로 답답해.”
아들 앞이다.
참아야 한다.
“한데, 사부님. 위대한 길은 유자만이 걸을 수 있습니까?”
“어찌 그러하겠느냐. 조선의 모든 걸 끌어내야 할 것이다.”
“하면, 가르침을 주십시오.”
제자가 이렇게 요청하는데 어찌 미룰 수 있겠는가.
하지만, 미뤄야 할 상황이었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건가?”
짜증이 잔뜩 담긴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절로 발걸음을 돌리고 싶었다.
송준길이었다.
“대사(大事)를 떠넘기더니 한가롭게 거닐고 있단 말인가!”
“형님. 소제가 지금 아주 바쁩니다.”
“하! 어림도 없네. 당장 따라오게!”
“때가 되면 찾아가겠습니다.”
“하!”
미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갑자기 더워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눈을 부라렸다.
“한 마디라도 해보게. 가만두지 않을 것이네.”
“…….”
당연하게도 윤휴였다.
눈을 껌뻑이며 나를 쳐다보는 표정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몇 걸음을 걸었다.
그런데 더워져서 그런가?
무서울 정도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몸을 돌렸다.
송자를 착취하려는 고용주의 측근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입가에는 미소까지 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황당함을 밀어내며 선언하듯 일갈했다.
“내가 모두 책임질 것이오. 그러니 원안에서 한 치도 물러섬이 없이 집행하시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화답했다.
“하하하! 그 말을 기다렸소.”
“진작에 그러셨어야 했소.”
“과연 송자십니다.”
“지금도 늦었소. 하지만 당장 집행하리다.”
“우암. 자네만 믿겠네.”
“사부님. 존경합니다.”
“역시 내 동생답군.”
“소생은 아직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동지들의 미소가 보였다.
동지들의 답변이 들렸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나만 믿으시오.”
그리고 동지들은 더 진한 미소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