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교향곡 제1번 ‘조선(朝鮮)’을 준비하다(2)
농자천하지대본은 조선이 지켜야 할 가치였다.
어떤 길로 나아가더라도 농업을 도외시한다면 몰락할 수밖에 없다.
작금의 조선이 총력을 기울여 농업 외 다른 영역으로 손을 뻗으려는 이유 역시 식량의 확보가 절실하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식량 생산력을 더 늘릴 수 없는 한계에 봉착하였으니 말이다.
변승업은 이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그가 가장 놀라워한 건, 이 변화를 조정에서 견인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이 모든 움직임의 주역을 바라봤다.
우암 송시열.
살아서 조선의 유일 성현인 송자가 된 초유의 거물이었다.
그런데 볼수록 놀라웠다.
어찌 사대부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 이토록 유연할 수가 있을까.
또한, 예상하지 못한 상황과 만나 당황하였는지 볼에 경련이 일어나는데도 언성 한 번 높이지 않았다.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는 그의 속이 굉장히 불편하다는 걸 말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세상 사람들의 평가와는 너무나도 상반되는 태도가 아닐 수 없었다.
“자네의 노고를 어찌 잊겠는가.”
“아닙니다. 소인이 작은 재물로 중대본의 대사에 보탬이 되었는데 이토록 큰 기회를 얻었습니다. 한데, 어찌 노고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노고일세.”
“노고가 아닙니다.”
“이보게.”
“송구합니다. 소인은 물러설 수 없습니다.”
조선 유일의 성현일지라도 상인의 세계는 달랐다.
이를 정확하게 설명해야 하기에 변승업은 마음을 다잡으면서 말했다.
“어민이 소유한 소형 선박인 지토선(地土船) 1척의 임가(賃價/임대료)가 50석입니다.”
“…….”
“수백 척의 어선입니다. 이를 어찌 그냥 내어드릴 수 있습니까.”
“…….”
“어선이라고 하였으나 곡식 500석은 실을 수 있는 규모로 건조하고 있습니다.”
송시열의 표정이 급격하게 흐려졌다.
미세한 불안함이 고개를 들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변승업은 일부러 한숨을 푹푹 쉬면서 말했다.
“휴. 조운선 사공에게 매달 쌀 20두를 내어줍니다. 격군에게는 매달 쌀 12두를 주지요. 사공은 1명이고 격군은 15명이기에 1년이면 132석 이상이 필요합니다. 한 척에 말입니다.”
“…….”
“어찌 감당하실 겁니까. 이는 역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
“청국의 바다로 가는 일은 더 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1척에 70여 명은 승선할 수 있는 어선이 필요합니다. 이를 감당하실 수 있습니까?”
송시열은 어딘가 아픈 듯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병세가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내심 걱정이 되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배를 만들지라도 일할 사람의 인건비를 나라가 감당할 수 없다.
이를 확실하게 각인시켜야 했다.
“하면, 자네 생각은 뭔가? 어획한 어류로 이익을 취하겠다는 건가?”
“이를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찬으로 사용하는 어염의 비용이 지주들은 쌀값의 10배, 가난한 이들은 쌀과 비슷한 비용을 사용합니다. 백성은 가난하지만, 수산물은 턱없이 비쌉니다.”
“아무리 많은 어류를 어획해와도 조선의 민간은 소화할 능력이 없겠지. 애초 이를 도모한 건 구휼에 보탬이 되기 위함이었으니까.”
“선박의 건조와 어류의 확보까지 소인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백 보 양보하여 선박을 백성에게 대여하거나 내어준다고 한들, 그들이 무슨 수로 험한 청국 바다까지 갈 수 있겠습니까.”
가난한 조선과 상단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의도는 하나였다.
“그렇군. 조정에서 어류의 값을 치르라는 거군.”
“송구합니다.”
“조정에서 그럴 여력은 있다고 생각하나?”
“송구합니다.”
아무리 중요한 일을 맡았을지라도 상인이다.
국고까지 세세하게 신경 쓸 수는 없다.
즉, 거기까지는 모르겠으나 알아서 하라는 말이기도 했다.
괜찮았다. 사실 제안이 억지도 아니니까.
“먼 바닷길일세. 그러나 항로를 조정에서 해결할 것이네.”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는 없다고 여긴 것일까?
대뜸 송시열이 조정의 권위를 강력하게 앞세웠다.
그러나 변승업은 가볍게 밀어냈다.
“조정의 항로는 무의미합니다.”
“…….”
“개성의 벽란도에서 청국 산둥성 바다까지 2일이면 갈 수 있는 서해 중부 항로가 있습니다.”
“그걸 왜 자네들끼리만 알고 있나?”
“소인도 대체 왜 조정의 사행은 서해 북쪽으로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
“지남철(나침반)만 있으면 갈 수 있는데 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음. 나도 모르겠네. 조정에서는 대체 왜 그러는지.”
“예?”
“아닐세.”
송시열은 황급히 일어서면서 말했다.
“최대한 빨리 진행하게.”
“만일 청국의 바다가 열리지 않으면 어찌 되는 것입니까.”
“어쩌긴. 의주에서 10만 대군 집결시켜서 만력제 제사 지내야지.”
“그게 가능합니까?”
“아. 자네가 10만 명 모아야지.”
“…….”
“그러니 불길한 소리는 하지 말고 배나 건조하게나.”
“그리하겠습니다.”
오늘의 협상은 성공적이었다.
변승업은 크게 안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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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길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정적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라목을 한 관리들은 죽을 맛이었다.
“허어…….”
땅이 꺼질 듯 깊고 무거운 한숨이었다.
관리들은 황급히 바닥을 내려다봤다.
지금 눈이 마주치면 진짜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어전, 죽렴, 어조(漁條, 물고기가 다니는 통로에 설치한 그물) 따위를 설치했네. 재원이 얼마나 투입되었나?”
“소, 송구합니다.”
“재원이 얼마나 투입되었느냐고 물었네.”
“……3천 냥입니다.”
“결과는?”
“400냥의 이익을 취했습니다.”
“말 똑바로 하게.”
“……2,600냥의 손실을 봤습니다.”
싸늘하게 가늘어진 송준길의 눈동자가 관리들에게로 향했다.
겨우 고개를 들었던 관리들은 기겁하여 시선을 내렸다.
“통영은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된 곳이기에 군량 창고와 조선소가 있네. 각종 자재와 장인, 상단까지 포진하였기에 조선에서 어염업을 도모하기에는 가장 효과적인 곳일세. 한데, 이곳에서 2,600냥의 손실을 보았다?”
“소, 송구합니다.”
“송구할 필요 없네.”
송준길은 문서를 내밀었다.
관리들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내용을 확인했다.
그리고
“!!!”
“!!!”
“!!!”
눈동자가 충격으로 일렁거렸다.
송준길의 목소리가 천천히 이어졌다.
“이렇게 치부에 힘을 썼으니 곳간이 든든하겠군.”
“대, 대감. 하지만 통영의 일과는 무관합니다.”
“그, 그렇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어류를 구할 수 있는 이가 없습니다.”
“예. 그 비싼 어염을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이 어찌 구하겠습니까.”
구구절절한 말이 이어졌다.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송준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직하게.”
“!!!”
“이대로 물러나면 더는 일을 키우지 않을 것이네.”
“대, 대감. 하지만…….”
“정확하게 말해주겠네. 2,600냥의 손실이 발생한 이유가, 자네들의 말대로 백성의 가난한 삶이 원인일 수도 있네. 한데, 2,600냥의 손실이 어류가 썩어서 발생한 건지 아니면 애초 포획한 어류가 없었던 건지 궁금하군.”
“…….”
“어염은 농업과 달리 관리의 적극성에 따라서 결과가 천차만별일세. 내 말이 틀렸나?”
“…….”
“버티면 자네들이 부지런히 곳간을 채운 일이 세상에 알려질 것이네.”
송준길은 쐐기를 박았다.
“내가 대사헌이라는 건 잊지 말게.”
그때였다.
“나도 보고 있다는 걸 잊지 말게.”
훅 치고 들어온 송시열의 목소리에 관리들의 안색은 하얗게 질렸다.
송준길에게 애써 사정하려던 관리들은 순식간에 태도를 바꿨다.
“다, 당장 사직하겠습니다.”
“부, 부디 가문만큼은…….”
“사돈의 팔촌까지는…….”
“송자시여…….”
가자미눈을 한 송시열은 그들에게 딱 잘라서 말했다.
“조용히 사라지게.”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평생의 은인이십니다.”
“과연 대범하십니다.”
엄청난 태세 전환을 보여준 관리들은 황급히 물러났다.
송시열은 고개를 절레 저으면서 털썩 앉았다.
“거. 일을 왜 어렵게 하십니까. 한마디면 해결되는데.”
“그게 한마디로 해결한 건가? 평생을 걸쳐서 입증한 것이지.”
“우리 지금 싸웁니까?”
“괜한 말은 넣어두게. 그래. 변승업은 잘 만났나?”
“역시 형님의 예상대로였습니다. 건조될 어선은 국고로 환수하긴 어려울 듯합니다.”
변승업이 아무리 뛰어난 상인이라고 할지라도 중대본 대신들의 경륜을 넘어설 수는 없다.
나라를 경영한다는 건 상단을 일궈내는 것과는 결이 다른 일이기에 그랬다.
“그게 순리지. 옳은 일일세.”
“소제도 그리 생각합니다만 아쉬워서 그렇습니다.”
“되었네. 통영에서 그런 적자를 보았네. 조정에서 수백 척의 어선을 거둘지라도, 제대로 운영이나 되겠는가? 어림도 없네. 이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할 상단이 알아서 운용하는 게 맞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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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길은 놀랍게도 조정의 역할을 축소하고자 했다.
정확하게는 각종 이권이 걸린 일에서 조정은 조세를 징수하는 수준으로 물러나자는 것이었다.
시장 경제에 익숙한 나로서는 공감이 쉽다.
하지만 이 시절 조선으로서는 쉽사리 용인하기 힘든 일인 건 분명했다.
송준길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도 빤히 쳐다보려다가 선수를 점하기로 했다.
“집행하시면 됩니다.”
“알고 있네. 하지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걸세. 하여, 또 고민할 뿐이네.”
“그 강을 건너야 삽니다. 사방 수천 리밖에 안 되는 나라에 너무나도 많은 제약이 있습니다. 이를 모두 제거해야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허적은 각지에서 올라오는 장계와 싸우고 있다.
하루도 쉬지 않고 기근이 발생하니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방어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두들겨 맞고 있다고 봐야 했다.
송준길은 쓰게 웃었다.
“한 가지 더. 변화를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
“형님. 늘 그랬습니다. 늙은 대신들이 변화를 두려워하여 젊은 유생들의 열의를 막았지요.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우리가 시작하고 그들이 뚫어낼 것입니다.”
덧붙였다.
“이미 시작된 변화가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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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지났다.
어깨를 만지작거리면서 걸었다.
멀찍이서 변승업이 보였다.
점차 가까워졌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선박을 마음껏 건조하게.”
“하면…….”
“조세만 제대로 내게.”
“예……?”
“선박세.”
“예?!”
눈을 껌뻑이는 변승업을 보고 있으니 미소가 걸렸다.
“조선은 이제 많이 변할 것이네.”
“변한다고 하셨습니까?”
“염전까지 모든 걸 민간에 위탁할 것이야.”
“!!!”
“조정은 징수만 할 것이니 자네가 재주껏 이권을 취해보게.”
변화가 아니라 환골탈태였다.
정확한 의미를 인지했을 변승업의 눈이 커졌다.
“그, 그것이 가능합니까?”
“물론 가능하지.”
싱그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궁방(宮房)의 면세지를 모조리 철폐할 것이니까.”
“!!!”
궁방의 권한을 거두는 것이 농자천하지대본 개혁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