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교향곡 제1번 ‘조선(朝鮮)’을 준비하다(3)
이연은 또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동안도 영 별로긴 했는데 이번은 유독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송자로서 위엄을 보이려고 했는데 선수를 당했다.
“혹시 어선을 국고로 귀속시킬 생각이었소?”
아.
이거였구나.
이러면 내가 할 말이 많다.
“신이 설마 그리 생각했겠사옵니까?”
“들리는 말은 그러하오.”
“신을 시기하는 무리의 음해이옵니다.”
“하긴. 현존 유일 성현이니 시기와 질투는 당연하겠지요.”
“…….”
이연의 조롱에도 나는 굳건했다.
왜냐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알현을 청하기 전 유형원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
사실 변승업에게 어선을 뜯어낼 생각을 조금이라도 한 내가 나쁜 놈이긴 하다.
대가성으로 몇 곳의 광산 채굴권을 주긴 하였으나 냉정하게 말하자면 낙후한 조선에서 자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능히 등가교환이 된 일이었다.
“어염업은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유형원의 얼굴은 상기된 상태였다.
궁가의 면세지 박탈이라는 이슈에 흥분한 게 분명했다.
현실 정치에 몸을 담으면서 눈높이를 낮췄으나 원래 과격한 개혁을 바라던 인물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뭐라고 해야 할까?
피가 들끓는다고 해야 할까?
대충 그런 상황이었다.
“그물부터 어살 제작만 할지라도 대나무와 다양한 목재가 필요합니다. 또한, 염분을 일으키려면 염부 제작을 위한 철, 솥을 걸 수 있는 시설도 갖춰야 하지요. 어선 제작은 말로 할 필요도 없는 다량의 목재와 부자재가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숙련된 인력이겠지.”
“물론입니다. 농업만 바라보며 200년을 달려온 조선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내용이지요.”
“호판이 낙동강 인근에서 전력을 다하여 염업을 도모하고 있긴 하네.”
“중대본이라는 조선 최고의 권력 기구가 눈에 불을 켜고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탈이 생겼다면 그게 이상하지요.”
너무 맞는 말이었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인문학적 요소까지 완벽하게 갖춘 통영에서도 적자가 컸다.
관성에 젖은 관영 산업으로 일을 도모한 결과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반면, 낙동강 염전은 사정이 달랐다.
허적이 눈을 부라리고 쳐다보고 있는데 관성이 생길 수는 없었다.
더욱이 낮은 수위의 천일 제염업인 쇄염법을 처음 공식적으로 도입한 곳이었으니 관리 감독의 엄격함은 실로 엄청났다.
“그런데 조선에서 가능한 곳이 있네.”
“그렇습니다.”
이권을 노린 무리의 수탈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권력과 시설을 갖출 수 있는 자본을 가진 곳, 바로 왕실에서 분가, 독립한 궁가들을 지칭하는 궁방이었다.
“만일, 그들을 밀어낼 수 있다면 천지가 개벽할 것입니다.”
궁방의 면세지를 철폐한다는 건 단지 조세 징수와 관련한 세제 개혁이 아니었다.
그들의 권력과 자본을 모조리 중앙 조정이 장악하는 것이었다.
또한, 오랜 세월 궁방의 사업에 참여하여 이권을 취한 관료와 세력과 다투는 것이었다.
“그럴 것이네. 궁방이라는 세력이 가졌던 엄청난 이권을 민간에 위탁하고 조정은 징수만 할 것이니 말일세.”
물론, 궁방을 움직여서 조정의 방향으로 움직이게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건 근본적인 변화였다.
그래서 조선 전역을 뒤덮고 있는 이들의 영향력을 걷어내는 것이다.
서원을 밀어낸 건 사상의 영역이었다면 궁방을 치우는 건 현실에서 구체제를 끌어내리는 것이었다.
“엄청난 혼란과 문제가 발생할 겁니다.”
“반발이 거셀 것이네. 그런데 신경 쓸 일은 아닐세.”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유형원을 바라봤다.
여전히 흥분을 감추지 못한 상태였다.
*****
나는 정말 대승적인 차원으로 국고를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한 마음이었다.
다만,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졌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진심이었고 순수했다.
어쨌든 예상되는 반대의 무리는 딱 두 종류였다.
전통적 질서를 고수한 무당파와 궁방의 각종 사업에 참여하여 수익을 올린 관료들이었다.
하지만, 진짜 복병은 따로 있었다.
궁방의 수익이 왕실의 자금줄도 된다는 것이었다.
“왕실에서도 개별 궁방의 경영이 절실하다는 걸 알고 있소?”
“가난한 백성이 강산의 이익을 공유하며, 차별적인 큰 이익을 거두거나 이익을 독점할 수 없다는 종래의 산림천택 공유론은 폐기해야 하옵니다.”
“…….”
“결국, 조선의 잠재력을 조정이 짓누른 것인데 어찌 이를 두고만 볼 수 있사옵니까. 또한, 이 모든 건 성리학적 농본주의에서 시작한 것이옵니다. 능히 폐기할 수 있사옵니다.”
“…….”
“위대한 길로 들어선 조선은 마지막 남은 모래 한 알까지 사용할 수 있어야 하옵니다. 신은 진실로 이렇게 생각하옵니다.”
“…….”
“그러하옵니다.”
“참으로 어이가 없소.”
“어찌하여 그러하옵니까?”
“내 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내용을 꺼낸 것이 아니오?”
“아니옵니다. 신은 가장 중요한 원칙을 고하였을 뿐이옵니다.”
나의 뻔뻔한 행동에 이연은 실소를 머금었다.
여러 번 헛웃음을 짓다가 말했다.
“나라 전체라 기근으로 백성이 굶고 있는데 어찌 왕실이 욕심을 내겠소이까.”
“성군이시옵니다.”
“…….”
“하오면 곧장 집행할 것이옵니다.”
“기군망상이라는 말이 두렵지 않소?”
“이미 살아서 성현이 되었는데 무슨 미련이 있겠사옵니까?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사옵니다.”
“…….”
나의 당당함에 이연은 다시 실소를 머금었다.
그러더니 몸을 앞으로 슬쩍 내밀었다.
“나는 이를 강행하여 궁방이나 여러 이권 세력과 다툴 생각이 없소.”
“신은 늘 전하의 신묘한 계책을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난리가 평정되면 경은 큰 화를 당할 것이오. 내게.”
“늘 기다릴 것이옵니다.”
“시끄럽소. 어쨌든 왕실이 모든 기득권을 내리는 선언이나 다름이 없소.”
이런.
나도 모르게 눈동자를 크게 떠버렸다.
어찌하여 이를 생각하지 못했단 말인가.
나의 심리적 동요를 읽은 이연의 입꼬리가 시원하게 올라갔다.
“그러나 이를 조선 전역의 기풍으로 연결하는 건 송자의 일이지요. 사상은 성현의 가르침이 통하니 말이외다.”
이런.
제대로 한 방 먹었다.
하지만 내가 송자다.
“이미 신의 가르침이 박세당의 입을 통하여 사족에게 전해졌사옵니다. 모두 크게 깨우쳐 큰 결심을 하였으니 어찌 어려움이 있겠사옵니까. 하면, 현실은 어떠하옵니까.”
이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유효타였다.
기분 좋다.
-----
송시열의 말보다는 입가에 걸린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되돌아보면 사상의 영역에서 치열한 쟁투(爭鬪)가 진행되었다.
반면, 현실의 정책으로 확실하게 구현된 건 없었다.
이를 꼬집은 것이다.
그러니까 현실을 책임져야 할 군왕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다.
하지만 이연은 금세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변승업에게 전하시오. 올해 내로 어선의 건조를 완수하지 못하면 크게 난처할 것이라고.”
“……그건 결국 신의 일이 아니옵니까?”
“경은 송자요? 본부장이요?”
“전하……?”
“성현이요? 신하요?”
“…….”
송시열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본 이연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기분 좋게 본론을 꺼냈다.
“궁방이 크게 반발할 것이외다. 이는 내가 알아서 짓누르겠소.”
“가능하겠사옵니까?”
“하하하!”
이연은 박장대소했다.
“송자가 되더니 작금의 왕권이 어디까지 뻗었는지 잊으셨소?”
송시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 안색도 어두워졌다.
-----
그 왕권 내가 만들어 준 거잖아.
황당해서 표정 관리도 어려웠다.
“하면, 신은 그 일에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물론이오. 송자는 송자의 길을 가시오. 나는 군왕의 길을 걸을 테니까.”
내가 단군이고, 이연이 왕검인가?
이것이 제정 분리가 아니면 무엇이 제정 분리겠는가.
실로 완벽한 분업이 아닐 수 없다.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을 때 이연이 툭 던지듯 말했다.
“최근 유형원이 알현을 청하더니 아주 흥미로운 말을 하였소.”
“그러하옵니다. 참으로 주목할 만한 안건이었사옵니다. 아니, 획기적인 일이었사옵니다.”
말과 동시에 유형원과 나눈 대화가 빠르게 스쳤다.
*****
혁명을 꿈꾸던 개혁가가 혁명과 비슷한 수위의 개혁을 맞이하였을 때 이러할까?
유형원은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대감. 동부 지역의 역사가 완성단계에 이르렀습니다.”
“바람직한 일일세.”
“동부의 요충지에 쇠고기 전매권을 독점한 변 역관의 점포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조선 팔도로 뻗어나갈 기반을 쌓게 되겠군.”
“결과 동부 지역은 명실상부한 도성의 신흥 상업 지역이 될 것입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동부 지역을 도성 안의 도성으로 만들어 내는 일입니다. 어떠한 기근과 역병도 넘어설 수 없는 성역이지요.”
“좋군. 아주 좋아.”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 번영을 도성 전역으로 연결해야 할 것이네.”
“물론입니다. 동부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고민하지 않았다면 동부로 국한하지도 않았습니다.”
툭 던지듯 가장 중요한 내용을 물었다.
“한데, 거주지가 가장 오래 걸린 이유도 역시 그것인가?”
“물론입니다. 조선은 이제 추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지.
소빙하기라는 재앙이 닥쳤을 때 사람이 굶어 죽지만은 않을 것이니 말이다.
*****
짧은 상념을 밀어냈다.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전하. 유형원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조선은 추위에서 벗어날 수 있사옵니다.”
유형원이 느닷없이 광업에 집중한 이유는 오직 한 가지였다.
“흑토를 최대한 확보해야 하옵니다.”
흑토.
나는 이를 석탄이라고 불렀다.
-대감. 평양성 동쪽 10리 지역 문수봉, 정동 10리 예미현 및 동북쪽 30리 고방산에도 모두 흑토가 납니다. 불이 붙어도 연기가 나지 않으니 어찌 이롭지 않겠습니까.
열기가 담겼던 유형원의 말은 내 심장을 미친 듯이 요동치게 했었다.
전혀 생각을 해내지 못했다.
연료라고 하면 그저 땔감을 떠올렸을 현대인이었던 내가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채취할 방법이 있는가?
-물론입니다.
-확실한가?
-큰 대나무 속의 마디 부분 막힌 곳을 파 없애고 그 끝을 뾰족하게…….
-됐네.
-…….
석탄 캐는 방법까지 내가 알 필요는 없다.
유형원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전하. 평양부에서 흑토의 존재가 확인되었사옵니다. 또한, 이 땅 어디에 얼마만큼 흑토가 존재할지 감히 가늠할 수 없사옵니다. 이를 모두 확보해야 하옵니다.”
“정확한 용도를 이르시오.”
“연료(燃料)이옵니다. 땔감을 전혀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아니옵니다. 하오나, 석탄까지 보탤 수 있다면 어찌 이롭지 않겠사옵니까. 조선의 백성은 더 이상 추위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석탄을 대량으로 확보할 수 있다면 온돌 외에도 난방 시설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난방이 아니라 길목에 불을 지펴 걸인이라도 살릴 수 있다.
“이는 조정에서 모두 확보해야 하옵니다.”
“역을 동원해야 한다면 큰 혼란이 있을 것이외다.”
“훈련도감이 있사옵니다. 우선 평양부의 흑토는 이들에게 맡기면 될 일이옵니다.”
“우문현답이오.”
이연은 흡족하게 웃었다.
나도 빙그레 웃었다.
조선의 위대한 길은 역사상 가장 따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