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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175화 (175/298)

175화 교향곡 제1번 ‘조선(朝鮮)’을 준비하다(5)

동부 지역은 인산인해였다.

수천 명의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러나 혼란은 없었다.

“내가 몇 번을 말하나? 때가 되면 어련히 부를 것이라고.”

유형원의 강력한 카리스마가 수천 명을 휘어잡았기 때문이었다.

“소, 송구합니다.”

“자네 손에 적힌 순번을 부를 때 나오면 될 일이네.”

“하, 하지만 글자를 읽지 못하니 답답하여 여쭤봤습니다.”

“134번일세. 분명 적을 때 일러줬을 건데? 설마 적어주기만 했나?”

“아, 아닙니다. 소인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허. 기억하고 있는데 왜 부르나?”

“소, 송구합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살 집에 들어가 보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그랬다.

오늘은 드디어 동부 신도시 입주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오랜 세월 노숙하던 유민들이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유형원은 정말 까칠했다.

“잘 보게. 이곳에 자네만 있나?”

“아, 아닙니다.”

“분명하게 말하겠네. 한 번만 더 차례를 묻고자 나와 관리들을 부르면 자네는 마지막으로 밀려날 것이네.”

“!!!”

유형원의 강렬한 경고에 입주민은 사색이 됐다.

내가 민망할 정도였다.

오죽하면 그들이 나를 향해서 구해달라는 시선을 보내겠는가.

그러나 나도 처지가 영 궁색하여 개입할 수는 없었다.

원래도 공적 업무를 볼 때 까칠한 유형원을 더 날카롭게 만든 원인 제공자가 바로 나였기 때문이었다.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유민의 수보다 훨씬 많은 입주민이 있었다.

바로 훈련도감 병졸의 식솔들이었다.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저들이 당도하였을 때 나를 쳐다보던, 악귀보다 무서운 유형원의 눈빛을.

-대감…….

-그리되었네.

-도성의 포화를 막고자 체계적으로 준비한 동부 지역입니다. 한데, 계획에도 없는 인원을 상의도 없이 수용하면 소생은 어찌해야 합니까?

-공간이 남는 건 이미 알고 있네.

-그건…….

유형원의 목울대로 무언가 거세게 움직였다.

필시 욕이었을 것이다.

-소생이 조금만 더 못 배웠으면 험한 말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늘 자네의 스승이신 허목 선생을 존경하였네. 그야말로 명사이시지.

-…….

그러했다.

나는 말할 자격이 없었다.

가끔 유형원과 눈이 마주치면 재빨리 먼 산을 쳐다보는 건 기본이었다.

물론,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른 건 아니었다.

다 깊은 뜻이 있으나 유형원의 상태가 예사롭지 않았기에 잠시 미뤘을 뿐이었다.

“기다리라고 몇 번을 말하나! 안 되겠군. 자네를 일벌백계하여 규율을 잡아야겠네. 마지막에 배정할 것이야!”

“!!!”

쩌렁쩌렁한 일갈이었다.

진짜 까칠했다.

자고로 화는 피하는 게 옳다.

자라목을 하고 잠시 자리를 옮기려고 할 때였다.

창경궁 방향에서 십수 명이 걸어왔다.

수천 명이 운집한 곳이니 십수 명이 대수로운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평범한 이들일 때나 그렇다.

저들은 바로 니승(尼僧/비구니)이었다.

창경궁 근처에는 문정왕후의 내원당(內願堂)으로 5천 명의 니승을 수용했던 자수원과 인수원이 있었다.

지척이니 지나가다가 인파를 보고 온 것이었다.

니승들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좌우를 살폈다.

나는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며 그들을 바라봤다.

그들에게 다가갔다.

니승들이 나를 확인하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렇지 않아도 너희에게 할 말이 있었다.”

짤막한 말에 니승들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런.

보아하니 부처님의 자비로움이 니승들에게 미래를 예지해준 게 분명했다.

크게 감탄하며 걸음을 옮겼다.

유형원과 시선이 마주쳤다.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허목과 나눈 대화를 상기했다.

*****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아니, 정말 어려웠다.

“끙…….”

보고 있노라니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원인을 제공한 건 바로 그간 조선이 축적해온 방대한 양의 의서였다.

진짜 그냥 수백 권을 훌쩍 넘는 분량이었다.

“왜 그러오? 생각보다 적소?”

“허 국장. 설마 이 모든 의서를 다 인쇄하길 바라오?”

“왜 이러시오?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하라고 한 건 본부장이외다.”

“물론이오.”

“됐소. 어차피 이리 나오리라 생각했소.”

“잘 알면서 굳이 의서로 산을 만들어 나를 위축되게 한 것이오?”

“시끄럽소.”

허목은 손을 훠이훠이 내저으며 의서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몇 종류의 의서를 간택하듯 잡았다.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 그리고 동의보감이오.”

대표적인 조선의 의서들이다.

그런데 낯선 제목이 보였다.

“이건 뭐요?”

“명나라 사람 이천이 만든 의학입문이오.”

“명국이라.”

“괜한 말은 넣어두시오. 중원이 조선보다 의술이 뛰어난 건 사실이니까.”

“누가 뭐라고 했소? 아무튼 좋소. 하면, 4가지 의서의 인쇄를 준비하겠소. 한데, 의술을 가르칠 의원은 확보되오?”

“조정의 내의원이나 위생국의 의원을 차출할 수는 없소. 도성의 병자를 감당하기도 어려운데 군현으로 보내는 건 어불성설이오.”

“하면, 어찌하오?”

“사족 중 의술이 뛰어난 이와 군현의 명망 있는 의원을 수배해야 하오.”

“쉽지 않겠구려.”

결국 비용이었다.

서원에 의과대학을 설립하려면 일단 교수가 필요하다.

그런데 힘들게 초빙할지라도 월급을 주지 않으면 누가 버티겠는가.

이건 정말 중요한 문제였다.

만인에게 불타오르는 의무적 수기치인을 내미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이건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이다.

“하지만 답장 집행하지 못한 건 또 아니외다. 수백 개의 서원이 결합할 것도 아니니 말이오.”

서원은 엄연히 민간의 소유였다.

왕권이 아무리 하늘을 향하고, 내가 송자라고 할지라도 강제하는 건 어려웠다.

자고로 사적 소유권은 권력이 가장 건드리기 애매한 영역인 법이다.

이를 침해하면 권력이 절정기를 맞이할 수 있으나 곧 몰락이 시작되기도 한다.

어쨌든 허목의 말대로 서원이 괜한 짓을 하지는 않겠으나 폭발적인 동참을 기대하는 건 어려운 실정이었다.

우습게도 이러한 현실이 의과대학 수립에 숨통을 트이고 있었다.

“한데, 굳이 사찰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오?”

“승려들이 사대부만큼은 아니지만, 학문에 능통하오.”

“그렇긴 하지요.”

“그들이니 의서를 읽고 훈민정음으로 옮기는 일이 수월할 거요.”

“허.”

“단지 그 이유요.”

“설득할 수 있겠소?”

“설득을 왜 하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내가 송자요.”

“석가와 벗이라도 할 기세요?”

“못할 것도 없지요.”

“실성하셨소?”

“살아 있는 성현으로서 석가를 섬기는 승려에게 말을 전달할 뿐이오.”

“드디어 실성했구려.”

“하하하!”

설득은 나와 힘이 비슷한 상대와 하는 것이다.

송시열도 설득하지 않을 상대에게 송자가 할 이유는 없다.

*****

생각을 거뒀다.

어느새 유형원의 집무실에 당도했다.

적당하게 앉아서 니승들을 바라봤다.

모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처지가 딱하여 짧게 끝내주기로 했다.

“길게 말하지 않겠네.”

바로 본론을 꺼냈다.

“의학입문, 동의보감, 향약집성방 그리고 의방유취. 이 네 가지 의서를 알 것이다.”

“소승들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게.”

“……훈민정음이라고 하셨습니까.”

“음. 힘에 부치면 여러 사찰에 도움을 청해서라도 시일 내로 하게.”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내 말만 했다.

니승들은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외 다른 일은 없습니까?”

“다른 일은 없네. 단, 의서당 천 권이 필요할 뿐이네.”

걷잡을 수 없는 황당함이 사방을 에웠다.

물론, 나는 이를 가볍게 밀어내며 현실이라는 걸 일러주기로 했다.

“시일이 촉박하니 서두르게.”

“대, 대감. 필사를 그렇게나 많이 해야 하나요?”

“필사해도 좋고, 활자로 찍어도 좋네. 한데, 결국은 활자를 만들긴 해야 하니 처음부터 이리하는 게 더 좋겠지.”

1차로 1천 부.

그 뒤로는 활자 인쇄로 대량 생산을 시도하겠다는 말을 전했다.

니승들의 표정은 정말로 컴컴해졌다.

“대, 대감. 어려움이 있습니다.”

“비용이라면 사찰을 중건하지 않으면 될 것이네.”

“대, 대감.”

“인력이 부족하다면 알아서 채우게.”

“…….”

“대가가 있네.”

정말 의외의 말이었을까?

정말로 조용해졌다.

“자수원과 인수원. 폐쇄하지 않겠네.”

한마디로 살려는 드린다는 의미였다.

니승들의 공기는 침통해졌다.

“나는 사찰과 구태의연한 논쟁을 펼칠 생각이 전혀 없네.”

작금의 현실에서 불교가 가진 문제를 언급할 생각은 없었다.

너무나도 고루한 논쟁이니까.

“또한, 대화와 타협? 이런 고아한 단어를 꺼내지도 않을 것일세.”

내어주고 얻는 정치적 협상은 필요 없다.

무당파와도 안 했는데 저들과 할 이유는 아예 없다.

“선택지는 없네. 하거나 하지 않거나가 아니라, 그냥 해야 할 것이네.”

“겨, 결정할 위치가 아닙니다.”

“내가 결정했네.”

“…….”

“분명하게 말하지. 아무리 고승이라고 할지라도 내게는 의미가 없네. 동자승이나 고승이나 내게는 그저 석가를 섬기는 중에 불과하니까.”

싸늘하고, 고압적인 태도였다.

니승들로서는 숨이 턱턱 막힐 것이다.

“그런데도 누가 말을 보태면 내게 전하게.”

“…….”

이 시절 불교는 조정의 방침에 반발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아예 그럴 힘이 없었다.

무엇보다 조선을 지배하는 세계관이 그러했다.

유학자와 승려가 사사롭게 교류하는 사례는 여전히 많았다.

친분과 우정이 깊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 땅의 세계관은 유학자와 불자의 위계를 너무나도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었다.

실제로 승려의 문집에 붙인 서문에 유학자는 불교를 모욕하는 말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적었다.

무례하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행위였으나 유학자는 이를 숨 쉬듯 당연하게 여겼다.

이는 이 시절 유학자가 불교를 얼마나 하찮게 인지하였는지 너무나도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안이었다.

이러한데 송자에 이른 나의 말에 토를 달 수 있는 불자는 존재할 수 없다.

“서두르게. 일단 천 부였으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있었다.

하여, 한 번 더 말하는 관용을 베풀었다.

“서두르라고 했네.”

“하, 한데. 대감.”

누군가가 조심스레 나섰다.

“승려의 도성 출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를 조금이라도 완화해주신다면 더 수월하지 않겠습니까.”

“모든 사찰의 노비와 위전(位田)을 군현의 관청이 관할하는 건 보고 싶나?”

“!!!”

엄포가 아니었다.

조선은 이연의 말 한마디로 불교의 손발을 아예 잘라버릴 수 있는 나라였다.

무조건 가능한 일이었다.

정치권력을 확보하지 못한 세력은 이토록 무기력했다.

“이제 나는 더 할 말이 없네. 서두르게.”

“그, 그리하겠습니다.”

니승들은 귀신이라도 본 듯 황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오늘의 모든 과정을 되새겼다.

서원을 강제하지 못하는 현실과 너무나도 극명하게 대비됐다.

그런데 어찌 보면 200년 만에 사찰을 무력화시킨 조선의 사대부가 정말 대단하긴 했다.

그래서 이참에 더 나가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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