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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176화 (176/298)

176화 교향곡 제1번 ‘조선(朝鮮)’을 준비하다(6)

막상 생각을 이렇게 해보니 참으로 고약하긴 했다.

사대부가 불교를 억눌렀다면, 송자는 유학을 억누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고작 사대부도 한 일을 성현인 송자가 못할 게 무엇이겠는가.

고개를 돌리니 유형원이 보였다.

딱 봐도 송자의 위엄에 크게 감탄한 듯했다.

“자네가 일전에 서원을 고립시킬 수 있는 방책을 말한 바 있네.”

“물론입니다.”

“공납으로 이권을 취하는 무리였더군.”

“그렇습니다.”

“이참에 그들도 만나야겠네.”

유형원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천지가 또 개벽하겠군요.”

“방금 보지 않았나? 천년을 이 땅에 똬리 틀었던 석가의 제자들이 유학자 한 명의 한마디에 고개를 숙이는 걸.”

“듣기도 했지요. 그들과 유학자를 다투게 하려는 계책도 말입니다.”

“이 사람아. 내가 송자일세.”

“이런.”

나의 익살스러운 행동에 유형원은 피식 웃었다.

“한데, 현실에서도 도움이 있어야 할 겁니다.”

“사헌부의 수장이 나와 아주 가까운 사이일세. 실은 호형호제할 정도라네.”

“이런.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실로 대단한 인맥이시군요.”

“큭. 그렇지. 그러니 어떤가?”

하나를 던졌으니 하나를 받을 생각이었다.

유형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괴이한 생각을 하시나 보군요.”

“내가 문뜩 떠오른 생각이 있네.”

“경청하지요.”

“사족과 서원에 일러, 의술 교육에 협조하지 않을 때 승과 제도를 부활시키겠다고 하면 크게 반응하지 않겠나?”

“허. 다시 혼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아니, 생각해보게. 사대부는 나 몰라라 하는 데 승려는 나서는 거 아닌가. 하면, 조정에서도 합당한 대우를 해야지.”

나의 놀라운 논리에 유형원의 표정이 괴상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혁명에 가까운 수준의 개혁을 원하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 듣기에도 나의 언변은 대단한 것이었다.

나 역시 송시열 시절에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긴 했다.

그런데 나는 송자다.

“아니, 잘 보게.”

“…….”

“이미 유학은 종래의 위치를 상실했네. 내려갈 일만 남았어. 아주 내려가서 불교와 만나거나, 불교가 치고 올라올 수도 있는 걸세. 유학자들이 이를 용인할 수 없다면 현재 위치에서라도 딱 잡고 버텨야지.”

“…….”

“이미 우리 조선은 기근 극복에 도움이 되는 모든 걸 수용하기로 하였네. 하면, 이 땅에서 천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버틴 불교라면 거절할 이유는 없지.”

“말씀이 이상하시군요. 그들이 무엇을 하겠다고 나선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응? 하겠다고 황급히 나가는 걸 보지 못하였나?”

“……소생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나?”

“…….”

지금 유형원은 지엽적인 현상에 매몰되어 나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답답하여 손을 훠이훠이 내저었다.

“음. 우선 그러자면 승려의 이동을 아주 자유롭게 만들어줘야겠군.”

“분명 거절하셨습니다.”

“감히 나와 협상하려고 하여 딱 잘라 말한 걸세. 그러나 그와 별개로, 집행한다면 서원 세력에 엄중한 경고가 될 것이네.”

“압박이 되긴 할 겁니다.”

결국, 유형원은 동의하듯 말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엷게 웃으면서 사안의 본질을 정확하게 말했다.

“유학자에게 불교의 진흥은 지옥보다 무서운 것일세. 내 말이 틀렸나?”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사문난적, 원리주의, 위정척사…… 여러 갈래의 방향이 나타났으며 위대한 길로 귀결되었으나 유학에서 아예 벗어난 건 아니지요. 아니, 엄밀히 따진다면 실학도 유학의 변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천년이라는 긴 세월 이 땅을 통치해온 경험이 있는 불교는 아닙니다. 유학이 차지하였던 현실의 위세를 밀어낼 수 있는 존재이지요.”

“그러니 불교의 진흥은 그들에게 공포라는 걸세.”

언급한 대로 불교는 천년의 역사를 가진 종교다.

조선의 사대부가 200년간 이들의 숨통을 끊고자 현실의 힘을 휘둘렀기에 정치 세력으로서의 존재감이 없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언제라도 부활할 수 있는 저력이 있으며, 민심도 확보한 세력이었다.

작은 숨구멍이라도 열어준다면 순식간에 유학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

“도끼를 들고 대감을 죽이려고 할 겁니다.”

“죽어도 성현인데 뭐가 두렵나?”

“그렇군요. 유학자들로서는 진퇴양난이군요.”

유형원은 내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반계. 불교가 진흥될 때 나는 유학의 최전선에 있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네.”

“좋으나 싫으나 유학자들은 대감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겠지요.”

“어떤가?”

“무조건 좋은 결과를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송자께서 버티신다면 또 모를 일이지요.”

좋다.

사실 이런 변혁적인 일은 유형원과 대화하는 게 편했다.

아니, 이러는 게 옳다.

유형원이야말로 변화의 흐름을 감지하고 뚫어보는 시선을 가지고 있으니까.

더불어 나머지 인사들은 현실의 정치 논리와 명분을 고민하니 적합하지 않았다.

싱그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할 수 있겠나?”

“어려울 게 있겠습니까?”

“도끼를 들고 자네를 찾아갈 것이네.”

“영광이지요.”

“자네만 믿지.”

유형원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냥 하면 될 일입니다.”

가벼운 미소로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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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법 시행 이전 방납 체제의 유통 구조는 복잡했다.

1. 농민-사주인(私主人)-방납인-조정.

2. 방납 이윤은 매해 쌀 47만~48만 석.

3. 5~6할은 방납인, 3~4할은 사주인, 나머지 1~2할이 국고로 귀속.

이러했다.

그러나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유통경로가 완벽하게 변했다.

농민의 부담이 경감되었다는 다분히 원론적인 상황은 중요하지 않았다.

유통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윤을 공인과 조정이 분할 점유하게 된 것이다.

즉, 조정은 전보다 더 큰 이익을 취하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본 건 이게 아니었다.

“대동법이 자네들에게 상당한 이권이 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나?”

십수 명에 이르는 방납인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 미간을 살짝 찌푸리자 순식간에 원상 복귀되었다.

어색하게 웃더니 누군가 한 명이 나섰다.

“아무래도 오해가 있으신 듯합니다.”

“오해?”

“그렇습니다. 대동법의 시행으로 소인들이 취하던 이익은 공인들에게 돌아갔습니다.”

방납인들은 주로 세력가나 도성의 부상대고였고, 사주인은 각사의 하인들이었다.

반면, 공인들은 대부분 도성의 평범한 백성이었다.

실례로 대동법으로 수취하는 20여만 석의 쌀과 344동의 면포, 1만 8천여 냥의 동전이 도성으로 집중됐다.

이때 조정은 시가의 4~10배에 달하는 공가를 공인에게 미리 지급하였다.

결과, 공인은 큰 이익을 취했다.

현상으로만 볼 때 방납인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조금 전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허. 하면, 손해를 봤나?”

“조정의 일인데 어찌 소인들이 손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대동법이 소인들에게 이권을 준 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그렇지. 그런데 왜 공인은 가난한지 모르겠군.”

“…….”

“저토록 엄청난 이권을 취하였으면 그들은 부유해야 하며 도성의 시전이 크게 활성화되어야 할 건데 말일세.”

“오해가 있으신 듯합니다.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활기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죽거리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경직됐다.

“궁방의 면세지를 거두자 훈련도감의 병졸들이 어려움을 호소하더군.”

“…….”

“어디 보자. 자네들은 거기서 무엇을 하였을까?”

“…….”

“대동법으로 발생한 모순과 궁방의 여러 사업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네.”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세간에서는 이를 무판(貿販)이라고 하더군.”

무판은 관 주도의 상업 활동을 의미했다.

원래는 왜란 이후 만성적 재정 부족을 해결하고자 관청이 직접 나서서 물품을 사들이는 제도였다.

한데, 관청이라는 우월한 지위를 가진 권력이 상업에 개입하자 심각한 시장 왜곡 현상이 발생했다.

과정은 아주 간단했다.

지역에서 발생하는 물가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차익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지독할 정도로 잘 연결된 조선의 중앙집권 시스템을 관과 결탁한 거대 자본 세력이 교란했다.

“무판은 종래 있던 관행이었습니다.”

“아니지. 그런데 자네들의 맹활약으로 현물의 값이 6배 이상으로 오른 군현이 한두 곳이 아닐세. 묻지. 현물의 고리대가 옳은 일인가?”

무판이 휩쓸고 간 지역은 물가가 거세게 올랐다.

이 과정에서 백성과 영세 상인은 죽어갔다.

“덕분에 백성은 땅과 집을 팔았네.”

“…….”

“여기서 하나 더 묻지. 공인은 공인의 일을 하는 걸까, 아니면 자네들의 일을 하는 걸까.”

“…….”

“멈추게.”

“…….”

아무런 답변이 없다.

그들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서원에서 의술 교육을 진행할 것이네. 여러 물품이 필요하니 보태게.”

“…….”

“오해하는 거 같아서 말하겠네. 나는 동의를 구하는 게 아닐세.”

“…….”

“통보하는 걸세.”

“!!!”

“법도를 운운하지 말게. 그 법도는 오늘이라도 당장 바꿔줄 수 있으니까.”

내가 송자다.

불편할 정도로 분위기가 경직되었으나, 다들 눈치만 살필 뿐 여전히 답이 없었다.

더 정확하게 말해주기로 했다.

“자네들의 사가 앞에서 산림의 사대부가 도끼를 들고 호통치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제대로 처신해야 할 것이네.”

“!!!”

“결론을 말하지. 자네들이 버티는 이유는 결국 뒷배가 아니겠나? 그래서 말하겠네. 서원의 사족과 손을 놓게나.”

“대감…….”

“이런. 내가 경황이 없었네. 상인이니 이익이 있어야겠지? 내가 좋은 정보를 하나 알려주겠네. 이만하면 셈이 맞을 걸세.”

“무슨 말씀입니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사찰 세력이 현실로 내려올 것이네.”

“!!!”

“그러면 여기서 질문. 과연 서원은 자네들을 지켜줄 수 있을까?”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송자라는 게 중요했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이 현실의 지각변동이었기에 더 중요했다.

엄청난 무게를 가진 침묵이 장내를 짓눌렀다.

이만하면 되었다.

상단을 과하게 몰이사냥하는 건 곤란했다.

언제라도 조정의 눈을 피하여 이권을 취할 수 있는 무리였으니까.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

“며칠의 말미를 주겠네.”

“말미라고 하셨습니까.”

“세상이 변화하는 걸 보고 결정하게. 그 뒤에도 화답이 없으면 나는 나대로 일을 꾀하겠네.”

“혹시 미리 알 수 있습니까?”

“아. 조선의 대사헌이 나와 호형호제하는 사이일세.”

“예……?”

“자네들에게 사헌부의 감찰을 견식해볼 기회를 주겠다는 의미였네.”

“!!!”

사헌부가 일개 상단을 감찰한다?

유례가 없는 일이지만 그냥 하면 된다.

반대로 상단으로서는 사헌부의 감찰에 노출된다는 건 공포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살아날지라도 지금의 부와 명예는 모조리 사라질 것이다.

너무 자세하고 친절하게 말해줬다.

나머지는 저들의 선택이었다.

싱긋 웃으면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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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아니나 다를까 무당파의 연좌가 발생했다.

일전에 이연이 연좌만 하는 작태를 질타하였는데도 이런다.

정말로 신념의 강자들이 아닐 수 없다.

“대감! 반계 유형원이 승과의 부활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렇다고 하더군.”

무당파들의 말에 나는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예상과는 다른 행동이었을까?

당혹감이 물씬 느껴졌다.

분위기를 슬쩍 몰아가기로 했다.

“반계의 상소가 관철될지도 모르네.”

“!!!”

한탄하는 듯한 큰 한숨은 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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