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교향곡 제1번 ‘조선(朝鮮)’을 준비하다(7)
문제아 유형원을 재차 언급하자 무당파는 크게 술렁였다.
하지만 나는 소란과는 무관하듯 즐기며 바라볼 뿐이었다.
“그, 그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이미 니승들은 조정의 의술 교육에 크게 감복하여 향약집성방, 의학입문, 동의보감, 의방유취. 이 네 가지 의서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1천 부의 필사를 하겠노라고 하였네.”
“후, 훈민정음이라고 하셨습니까?”
“지금 중요한 건 훈민정음이 아니라, 1천 부라는 엄청난 규모일세.”
“하지만 훈민정음이라니요?”
“시끄럽네. 어쨌거나 사찰에서는 대량 인쇄까지 준비하겠다고 하였어.”
“대체 세상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나도 돌아가는 사정을 정확하게 모르기에 파악해봐야 하네.”
“대감. 아는 바를 일러주십시오.”
“자네들, 일전에는 나를 죽이려더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훌륭한 자세로군. 실은 오는 길에 반계를 만났는데 의미심장한 말을 하더군.”
다시 문제아를 언급했다.
무당파의 긴장감이 무서울 정도로 치솟았다.
목울대로 마른침이 넘어가는 게 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바람직하였기에 분위기를 고조시키듯 약간의 정적을 즐긴 뒤 말했다.
“주상 전하를 알현하여 승려의 이동을 자유롭게 해달라고 청하였다고 하더군.”
“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 전하께서 윤허하셨다는 말은 없었네. 다만, 반계가 이러고 다닌다는 말을 한 걸세.”
“…….”
말을 하면서도 무당파들의 일렁이는 눈동자를 놓치지 않고 살폈다.
표면으로는 분노가 일렁였다.
하지만, 아주 깊은 곳에서 ‘공포’라는 감정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이 정도면 담금질은 충분했다.
“그런데 자네들은 어찌하여 이러고 있나?”
“무슨 말씀입니까.”
“저들은 조정의 방침을 전투 치르듯 수행하고 있네. 한데, 자네들은 또 연좌나 하고 있나?”
“!!!”
“이 사람들아. 승과가 중요한 게 아닐세. 의서의 필사가 끝나고 활자 인쇄를 시작하면 정말 이 자리에서 법회까지 발생할지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
“정말일세. 사대부는 연좌하고, 승려들이 목탁을 두들기면서 법회를 열 수도 있네. 일천 승려의 법회 말일세. 또, 생각해보게. 깊은 산에서 목청을 가다듬었을 그들의 목소리는 얼마나 크고 청아하겠나? ‘아니되옵니다!’만 외치는 연좌가 아니라 목탁과 불경이 가득한 법회, 그야말로 야단법석이겠군. 이런, 상상해버렸네.”
“마,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이미 자네들이 이러고 있지 않은가.”
“소생들의 연좌는…….”
“답답하군. 내가 너무 답답하다네. 승려에게도 언로를 열 수도 있네.”
“!!!”
“그리고 딱 보게. 이미 자네들이 조선의 잘못된 기풍을 세웠네. 이를 승려들까지 배우기 전에 이 땅의 사대부로서 실력 발휘라는 걸 좀 해보게.”
답답한 건 진심이었다.
숨기지 않았기에 아주 진하게 전해졌을까?
무당파의 안색이 심각하게 굳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눈알만 굴리는 꼴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혀를 차면서 말했다.
“이러다가 이 땅이 다시 불국정토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
사실 그렇다.
송자와 위대한 길의 주창은 결국 기출 변형에 불과했다.
어쨌거나 태생이 성리학자이며 성리학에서 구현되었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 말이다.
이는 결국 ‘유학’이라는 틀 안에서 다툼이었다.
하지만 불교는 아예 다른 과목이다.
현재 조선에서 가장 보수적인 스펙트럼을 차지하고 있는 무당파로서는 엄청난 공포일 수밖에 없었다.
“…….”
여전히 눈알만 굴린다.
그래도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오늘은 이만하면 되었다.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조선의 왕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곤하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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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응수하는 게 법도였으나 이번만큼은 나도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일을 아주 거하게 펼치셨소?”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그리되었사옵니다.”
“참으로 당당하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사옵니다. 하온데, 어찌하여 탓을 하시옵니까.”
“허.”
이연의 눈동자가 흔들릴 정도로 놀라운 뻔뻔함을 과시했다.
그런데 괜한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오직 우국충정(憂國衷情)으로 여기까지 달려온 신은 너무나도 서운하옵니다. 심장이 따갑사옵니다.”
“대체 언제부터 우국충정에 기군망상이 포함되었소?”
“신은 전혀 모르는 내용이옵니다. 그저 최선을 다하였을 뿐이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오. 사찰을 어찌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오. 한데, 서원을 굳이 또 자극하는 이유가 뭐요?”
“전하. 신은 서원을 자극하지 않았사옵니다.”
“하면, 대체 무엇을 하셨소?”
“신은 그저 가정하였을 뿐이옵니다. 딱 그러하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소. 유형원과 호흡이 아주 걸작이오?”
이연은 결국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나는 물러설 수 없었다.
여전히 시선을 슬쩍 돌린 상태로 코를 찡그렸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속도를 내려면 어쩔 수가 없었사옵니다.”
“겸사겸사 개혁의 집행으로 생길 반발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면 좋기도 할 것이고.”
“실은 그러하옵니다.”
“묻고 싶은 건 이것이외다. 경은 두 세력의 다툼으로 무언가를 도모할 수 있다고 보시오? 애초 힘의 차이가 극명하기에 대립 구도를 구축하기도 어렵소.”
“신이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하온데, 보시옵소서. 서원이 경기를 일으키듯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사옵니다. 시작이 이토록 아름다운데 어찌 걱정하겠사옵니까.”
이연도 이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해서, 교지를 내려달라는 것이오?”
“굳이 승려의 입지를 강화할 필요는 없지 않겠사옵니까.”
“이런. 승려들은 영문도 모르고 당하겠구려.”
“그들은 지금 누리는 수준의 권한이면 합당하옵니다. 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분연히 일어설 것이니, 어찌 내어줄 것이 있겠사옵니까.”
“참으로 성현이시오.”
“과찬이시옵니다.”
“썩 물러가시오. 꼴도 보기 싫으니까.”
“성은이 황공하옵니다. 아. 하온데, 전하.”
“윤허할지도 모른다고 하면 될 것이오.”
“성은이 너무나도 황공하옵니다.”
“아무래도 실수했소. 송자에서 끌어내렸어야 했소.”
“하하하. 이미 늦었사옵니다.”
나의 호연지기(浩然之氣)에 감복한 이연은 피식 웃고 말았다.
세상이 점차 아름답게 정화되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송자의 가르침과 교화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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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순탄했다.
깜짝 놀랄 정도로 무난했다.
정말로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 뭐라고 하였나? 대량 인쇄가 어렵다고?”
“대, 대감. 여러 사찰에 알렸으나 여건이 여의치가 않다는 답변이 왔습니다.”
“혹시 내가 전한 말이라고 하였나?”
“소, 송구합니다.”
“따르지 않으면 내가 어찌할지도 안 전했군.”
“호, 혹시라도 대감께 누가 될까 우려되어 그것까지는 전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나는 격하게 소리치며 눈을 부라렸다.
니승들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너희가 감히 나를 핑계 삼아서 일을 이토록 어렵게 하는가?”
“소, 송구합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도다.”
“다시 사람을 보내서 정확하게 알리겠습니다.”
“됐다. 너희가 일을 그르친 것이다.”
“예……?”
“당장 도성에서 나가도록.”
“대, 대감.”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나가야 할 것이다.”
니승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나는 인정을 보이지 않았다.
저들의 눈에 나는 야차 그 자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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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징조도 없이 하루아침에 도성에서 쫓겨나게 생겼다.
이건 그야말로 마른하늘에서 내린 날벼락이었다.
니승들은 서러움에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상대는 성현의 반열에 오른 송자였기에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법복을 입은 이상 조선에서 그가 나가라면 나가야 했고,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 해야 했다.
심지어 그의 손짓 하나에 사찰의 모든 권한이 박탈당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그저 서러울 뿐이었다.
흐느끼며 짐을 꾸릴 때였다.
“이대로 모두 떠날 생각인가?”
나타난 이는 유형원이었다.
니승들은 모두 일어나서 예를 갖췄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가 불교의 처우 개선을 주장한 사실을 모르는 니승은 없었다.
물론, 유형원이 추상과도 같은 송자의 말을 번복하게 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알 수 없는 기대감이 생기는 것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송구합니다. 어찌할 방법이 없어서…….”
“답답하군. 지금 물러나면 다시는 도성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걸 모르는가?”
“그렇지만…….”
“허. 어찌 물러서는 게 이토록 익숙한가?”
혀를 차며 질책하는 유형원의 말에도 니승들은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일러주는 방책대로 시도라도 해볼 생각이 있나?”
“바, 방책이 있습니까?”
“결과를 무조건 장담할 수는 없네. 그러나 이미 최악의 상황인데 더 나빠질 게 있겠는가?”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송자가 너무나도 두려웠기에 섣불리 동의할 수가 없었다.
“나도 거들겠네.”
“서, 선생께서요?”
“그렇다네. 하면, 나설 수 있겠는가?”
“혹시 이리 도와주시는 연유를 알 수 있습니까?”
그 옛날 불교가 어떤 성세를 일궜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작금의 불교가 가지는 현실적인 위치는 너무나도 비루하다는 게 핵심이었다.
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승병이 그토록 큰 공을 세웠으나 공신으로 책봉된 이는 단 한 명도 없는 게 현실이었다.
불교계로서는 조선 조정이 참으로 가혹하며,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고 여길 만도 했다.
“나는 불교라는 집단이 미증유의 기근을 극복함에 힘을 보태길 바랄 뿐이네.”
유학자는 늘 대의명분을 내세운다.
그런데 이것을 가장 경계해야 했다.
니승들이 아무리 좋게 보더라도 유형원 역시 정치적 의도가 가득한 ‘유자’일 수밖에 없다.
“내 말을 그저 표면상으로만 들으면 될 것이네.”
“…….”
“조선에서 정치적 목소리를 내려면 대의명분을 가져야 하네. 가장 압도적인 건 누가 뭐라고 해도 민심일세.”
“그 말씀은…….”
“나의 의도를 깊게 고민하지 말게. 자네들도 나를 이용하면 되는 것이니까.”
“따르겠습니다. 방책을 일러주십시오.”
“어렵지 않네. 하던 일을 계속하되 장소만 바뀌는 걸세.”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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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 했던가.
그렇게 힐난하였건만 무당파들은 오늘도 어김없이 육조 거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저럴 시간이 지필묵을 챙겨서 의서 필사라도 하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의서 필사가 어떤 결과로 귀결되는지 훤히 보였으니 쉽사리 나선다는 건 어려운 일이긴 했을 것이다.
보수가 괜히 보수가 아니다.
보수하지 않아서 보수다.
어쩔 수 없긴 할지라도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사대부의 광화문이라고 할 수 있는 육조 거리에 이질적인 존재들이 모습을 보였다.
상황 파악을 하려고 휘둥그레진 눈을 껌뻑거리던 무당파들의 미간이 와락 일그러졌다.
“저, 저런…….”
“백주 육조 거리에서 이 무슨 해괴한…….”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게다가 점차 격해졌다.
“예가 어디라고 감히!”
“썩 물러나지 못하겠느냐!”
“감히!”
하지만 그들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다.
이질적인 존재들…… 바로 니승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곧장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지필묵을 꺼내어 ‘필사’를 시작했다.
“…….”
“…….”
이 기괴한 장면에 무당파는 말문이 닫히고 말았다.
개국 이래 200년간 유자‘만’의 성지였던 육조 거리에 다른 정파(政派)가 공간을 차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