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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178화 (178/298)

178화 교향곡 제1번 ‘조선(朝鮮)’을 준비하다(8)

충격의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정신을 바로 잡은 누군가가 험악하게 눈을 부라리며 다가갔다.

과연 200년 조선의 정수를 담은 무당파다운 기세였다.

그러나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의 개입으로 미수에 그쳤다.

“무슨 문제라도 있소?”

바로 유형원이었다.

윤휴와 더불어 조선에서 가장 까칠한 인사의 등장에 무당파는 멈칫했다.

그러나 보수의 심장으로서 물러설 수는 없는 법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오?”

“승니들이 의서를 필사하오. 이는 조정의 일이오.”

“누가 그걸 몰라서 묻소? 어찌하여 육조 거리의 공간을 차지하오?”

“안 되오?”

“!!!”

유형원의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러면서 좌우로 고개를 돌리더니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송자께서 저들을 내치셨기에 오갈 데가 없소.”

나를 굳이 언급하는 유형원이었다.

그리고 참으로 잘한 행동이었다.

과연 무당파의 시선이 내게로 확 쏠렸다.

아주 우호적인 성질을 가진 눈빛들이었다.

“그러나 조정의 지엄한 명을 거스를 수 없기에 여기서 필사하는 것이외다. 문제가 있소?”

“송자께서 내치셨다면 응당 도성을 나가야 하오. 한데, 육조 거리라니 가당치도 않소!”

“육조 거리는 언로를 수렴하는 곳이오. 누구라도 사용할 수 있소.”

억지였다.

조선에서 언로의 파생과 수렴은 오직 사대부의 특권이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건 이 시절의 당연한 원칙이었다.

하지만, 이를 대놓고 따질 수 없는 이유는 있었다.

어쨌거나 행사의 주재자가 ‘사대부’인 유형원이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집회 신고자가 명망 있는 ‘성리학자’였기에 쉽사리 시비를 걸 수가 없었다.

물론, 이미 유형원이 떡밥을 던졌기에 무당파의 선택지가 없는 건 아니었다.

“좋소. 다 좋으나 저들은 이미 송자께서 내치셨소. 한데, 어찌 이를 거역할 수가 있소?”

정말 잘 물었다.

찰랑거리면서 말이다.

그 순간 유형원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세상은 그의 손에 있는 물건을 향하여 ‘교지(敎旨)’라고 불렀다.

“전하께서 승려의 도성 출입을 윤허하셨소.”

“!!!”

“!!!”

“!!!”

무당파들의 안색은 하얗게 질렸다.

유형원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명이 내려졌거늘 송자의 말을 앞세우시오?”

어림도 없다.

번복을 청하는 상소와 연좌가 발생할 수는 있으나, 절대로 내 말이 어명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

절대로 썩어 가는 속내를 표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여, 이 순간 육조 거리는 유형원의 낭랑한 목소리가 지배했다.

“비켜주시겠소? 잠시 후 더 많은 승니가 오기로 하여 공간이 좁을 듯하오.”

“!!!”

“이런. 당분간 육조 거리는 구성현(舊聖賢)의 제자 대신 석가의 제자들이 차지하겠구려.”

“선생도 유자이거늘!”

“나는 유자가 아니오.”

“뭐, 뭐요?”

유형원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세상 만물을 다 수용하는 실학자요.”

“!!!”

여기까지.

나는 일기당천 유형원을 뒤로하고 뒷짐 쥐고 물러났다.

그래야 했다.

나와 유형원이 싸우는 그림은 설계도에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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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에서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무당파들이 몰려왔다.

아주 그냥 사색이 된 상태였다.

참으로 우스웠다.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나를 죽일 듯 규탄하던 무리가 이제는 살려달라고 온 것이니 말이다.

기득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현실의 정치는 참으로 살아 숨 쉬는 게 분명했다.

속으로 크게 비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뭐라고 했나?”

“하, 하지만 이토록 전격적인 상황이 발생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습니다. 교지라니요. 승려의 도성 출입을 윤허하는 교지라니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조선을 건국한 성리학자들이 가장 먼저 한 건 이데올로기 싸움이었다.

천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버티며 이 땅을 지배한 불교는 성리학자가 척결해야 할 대상이었다.

물론, 당시 불교는 치워야 할 적폐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200년의 싸움으로 압도적 우위를 점하였거늘 오늘에 이르러서 틈이 발생했다.

공포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이성적 논거를 떠나서 본능이 이를 꺼낸 것이다.

어쩌면 다시 불교가 성리학과 자웅을 겨룰 수도 있다는 현실의 공포 말이다.

나는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들은 아직도 모르겠나? 작금의 조선은 누구의 손이라도 빌려야 하네.”

“소생들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되돌아보게. 과거 터졌을 때 승병이 일어났네. 그때 조정에서 막았나? ‘어디 감히 승려가 조정의 일에 개입하고 병장기를 휘두르느냐!’ 이리하였나? 아닐세. 또, 혹은 사대부들이 불씨잡변이라도 꺼내서 연좌하고 상소를 올리며 반대했나? 아닐세. 모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환호했네. 내 말이 틀렸나?”

“…….”

“작금의 난세도 마찬가지일세. 이 나라 조선은 하루를 겨우 버티고 있네. 때마침 의술 교육을 확대하는 데 승려의 도움이 절실하니 이런 상황이 만들어진 걸세.”

원론은 여기까지.

슬며시 무당파의 기운을 복 돋아주기로 했다.

“물론 나 역시 불교의 세력이 확대되는 걸 바람직하게 바라보지는 않네. 하여, 그들에게 의서 필사를 명하였으나 주제를 모르고 나설까 우려되어 퇴출을 명하였네.”

나는 무언가를 더 할 수 없다는 명확한 선을 그었다.

그때였다.

“소, 송자이십니다.”

이런.

“조선의 유일 성현으로서 이를 어찌 방비하실 수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생존한 성현이십니다.”

아.

얄궂은 나의 운명이여.

어느새 무당파까지 나를 추앙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한숨을 푹 쉬면서 말했다.

“자네들 혹시 내가 전하와 겨루기를 원하나?”

그렇다고 한들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송자?

성현?

다 필요 없다.

사약 한 사발이면 그냥 죽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군왕이 통치하는 조선이었다.

심지어 작금의 상황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전선이 구축되었다.

대놓고 무엇을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여, 타이르듯 말했다.

“내가 성현의 위치에 올랐다고 한들 전하의 신하라는 건 변함이 없네. 한데, 어찌 섣불리 나설 수 있는가?”

“…….”

“…….”

“…….”

“…….”

사람이 민망할 정도의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절로 이를 살짝 악물었다.

“송시열은 잊게.”

그랬다.

송시열이 쌓은 위대한 역사가 조금 전 한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으니 말이다.

무당파들은 여전히 어색하게 웃었으나 나는 손을 훠이훠이 내저으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다시 말하겠네. 자네들도 나서게.”

“소생들도 나서라니요?”

“잘하는 거 하게. 잘하는 거.”

“예?”

“승니의 옆에서 연좌하며 고함을 지르거나 도끼라도 휘두르게.”

“…….”

“자네들도 아니라고 생각 든다면 필사라도 거들게. 하면, 될 일이 아닌가.”

“…….”

여전히 답변이 없다.

보수를 보수하는 일은 이렇게나 어렵다.

진짜 장삼봉을 데려와야 하나.

낮게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효용성을 입증하라는 말일세. 조선의 조정에 승려가 보이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말일세.”

“…….”

아.

이것은 소림사와 무당파의 대립이란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천하제일 문파를 가리는 대회인가?

참으로 흥미롭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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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를 살피던 허적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의 저변에서 참으로 희한한 움직임이 포착된 것이다.

가장 직접적인 원인을 하나 선택해야 한다면 역시 군영의 철폐였다.

표면적으로는 군포의 폐단을 치웠다는 쾌거였으나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은 일들은 더 거대했다.

“여기에 궁방의 면세지를 거두었더니, 소수의 무리가 독점적으로 취했던 이권이 백일하에 나타났습니다.”

“방납인들도 발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더군.”

“누구보다도 조정의 정치 구조에 관심이 많은 이들입니다. 일제히 서원을 흔드니 새로운 거래 상대를 찾고자 나서는 것이지요.”

윤선도도 엷게 웃으면서 말했다.

“사찰이라면 아주 매력적인 상대일 것이네.”

“그렇습니다. 눈치 빠른 그들이라면 송자와 반계의 행동을 보고 무언가 깨닫는 게 있을 겁니다.”

“자네 지금 송자라고 하였네.”

“…….”

“이런. 실은 진실로 감화되었군.”

“실언한 것입니다.”

되돌릴 수 없는 치명적인 실수를 깨달은 허적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윤선도는 흥미롭게 쳐다볼 뿐이었다.

“……어쨌거나 작금의 대립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론일세.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네. 서원은 사찰의 준동에 시선을 집중하느라 수면 아래를 볼 수 없을 것이니까.”

“듣자니 아직도 행보를 결정하지 못한 듯합니다.”

“그냥 두시게. 그들이 변화는 조선의 마지막에 이뤄질 것이네.”

뼈 있는 한마디였다.

어떠한 반론을 제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원은 조선에서 가장 경직된 세력이었다.

“한데, 공백이 발생한 이권이나 새롭게 도모할 염전 혹은 광산은 어찌 배분할 것인가.”

“본부장이 흥미로운 제안을 했습니다.”

“무엇인가.”

“조세를 많이 낼 상단에 맡기자는 것이었지요.”

참으로 송시열다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윤선도는 고개를 절레 저으면서 말했다.

“이권을 취하고자 조정에 많은 조세를 낸다면 임부의 고혈을 짜게 될 것인데?”

“나 역시 그 말을 하였더니 본부장의 답변이 가관이었습니다.”

“뭐라고 하던가?”

“우리, 너무 위대해지려고 하지 맙시다.”

“…….”

옳고 맞는 말이었다.

애초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방책은 없다.

그런 이상을 그릴 정도로 중대본은 어설프지 않고, 현실은 가혹했다.

작금의 조선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고를 채우는 게 최대 목표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말문이 딱 막히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현재 윤선도의 감정을 이미 경험한 허적은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파악하니 제법 괜찮은 동광이 있습니다.”

“그런가?”

“이를 먼저 시도해볼 생각입니다. 머지않아 조선에서 동은 곧 상권을 의미하게 될 겁니다. 필시 많은 이가 나설 겁니다.”

“좋군. 한데, 해당 광물을 징수할 것인가?”

“아닙니다. 어디에 쓰겠습니까. 당연히 쌀을 받을 것입니다. 또한, 구하는 건 그들의 일이지요.”

“이런. 자네 본부장과 아주 같은 말을 하는군.”

“선생…….”

“하하하. 내가 실언했네.”

그때였다.

다급한 보고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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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본으로 황급히 달려가는 파발을 보았다.

화급을 다투는 내용이 분명했다.

궁금하였으나 허적의 영역이었다.

알려야 할 수위의 일이라면 그가 전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일을 하는 게 옳았다.

그런데 정말 장삼봉을 부활시켜야 할까 보다.

그렇게 잘 타일렀거늘 무당파는 아직도 쭈뼛 쭈뼛거렸다.

소림사 제자들은 정말 열심히 붓을 움직이는데 말이다.

나의 못마땅한 표정을 보았는지 무당파는 눈치를 살폈다.

당장 더 할 말도 없었다.

그때였다.

저 멀찍이서 또 파발이 달려왔다.

늘 있는 일이긴 한데 다급함이 너무 강렬하게 전해졌다.

일제히 시선이 쏠렸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그는 말에서 내리며 황급히 말했다.

“기근이 발생했습니다.”

“…….”

“기민의 수는 족히 수천 명에 이릅니다. 파악한 바에 의하면 수백 명의 유민도 발생했습니다.”

기민 수천 명, 그리고 유민 수백 명.

더 중요한 정보가 있었다.

“경기도에서 발생했습니다.”

도성의 지척이었다.

육조 거리는 조용해졌다.

그리고

“화재가 발생했소.”

허적이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나와서 나를 찾을 정도면 작은 화재가 아니라는 걸 의미했다.

“강릉, 삼척 등의 고을에서 발생한 산불로 불탄 민가가 1천 9백여 호, 타 죽은 이가 100여 명에 이르오.”

좌중은 침묵에 휩싸였다.

다만, 나와 허적, 둘 중 누구도 전처럼 팽팽한 긴장감을 보이지 않았다.

기근과 화재의 발생은 분명 중대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껏 우리가 걸어온 길은 ‘이 정도’의 고난은 이제 수월하게 극복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되었기에 그러했다.

허적과 눈이 마주쳤다.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또 다른 역량을 확실하게 현실에 꺼내야 할 때였다.

그래서 중대본은 나서지 않을 것이다.

“무릇 난세는 공을 세우는 이가 주역이다.”

내 말의 의미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소승들이 나서겠습니다.”

“가능하겠는가.”

“사찰을 설득할 수 있습니다.”

“대가는 없을 것이다.”

“대가를 원하였던 승려는 이미 200년 전에 죽었습니다.”

심장을 울렁이게 하는 명언이었다.

그러나 무당파는 아직도 나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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