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교향곡 제1번 ‘조선(朝鮮)’을 준비하다(9)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승병은 큰 활약을 했다.
그러나 조선의 주류에게 승병은 ‘불교계’가 아니라 승려 ‘개인’이었다.
반면, 유생이 통솔한 ‘의병’은 개인이 아니라 ‘유학계’였다.
이러한 역학관계로 불교가 다시 현실 정치에 등장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작금의 상황은 아예 성질이 달랐다.
상당한 피해를 유발한 기근과 화재의 방비를 불교계가 ‘자발적’으로 결의했다.
더 정확하게는, 가장 보수적 유학자인 무당파가 수수방관할 때 불교계가 집단적 결의를 천명한 것이다.
권세를 가진 대신이 백성에게 사사롭게 구휼미를 나눠도 의도를 의심하는 세상이다.
이러한 조선의 정서를 되돌아볼 때 불교계의 행보는 낮은 수위의 정치 참여라고 봐도 무방했다.
어쩌면 200여 년 만에 불교계가 현실에 등장할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다른 말도 있었다.
-어림도 없네. ‘고작’ 승니가 결의하고 제안한 걸세.
-암. 사찰이 제대로 응할지도 미지수이네.
그러니까 이런 건 무당파의 희망 회로라고 할 수 있다.
속사정은 달랐다.
“자네, 대체 어찌 저들을 설득했나?”
“소생이 대감처럼 윽박만 지르는 줄 아십니까?”
“오. 그러면 딱 자네답게 약을 올렸나?”
“대감의 희망 사항이지요. 소생은 심금을 울리는 말로써 설득한 겁니다.”
“내 심금도 좀 울려주겠나?”
유형원은 나를 힐끗 보더니 선심 쓰듯 말했다.
“아무것도 제안하지 않았습니다.”
“뭐……?”
“그저 소생을 이용하라고 하였을 뿐입니다.”
“설마……?”
“승려가 승려인 이유는 불경을 익혔기 때문입니다. 유학을 익혔으면 유자였겠지요. 그러니 소생의 말을 잘 이해했을 겁니다. 소생이 불교의 이권을 대변하겠다는 속뜻을요.”
반계 유형원, 그냥 미친 게 아니라 진짜 미친놈이구나.
진짜 조선을 수술하기 위해서 목숨을 건 사람을 한 명 말하라면, 유형원보다 앞설 수 있는 인사는 없을 것이다.
유학자가 승려와 친분을 형성하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될 수 있는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명백한 이권을 대변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속내에 불과할지라도 이미 무당파가 보는 앞에서 본인의 의지를 보였으니 말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러한 핍박받던 불교계는 너무나도 달콤하게 들릴 것이다.
‘이권의 대변.’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엽적으로는 ‘송자’께서 승니를 핍박하자 소생이 나선 것이니 딱 아귀가 맞은 것이지요.”
그래.
유학은 불교를 탄압하고, 송자는 승니를 괴롭히고.
세상이 참으로 아름답다.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리면서 말했다.
“그게 전부인가?”
“도성의 승려 출입을 관철하였습니다. 이만하면 그들이 소생을 믿을 만하지요.”
“이보게. 그래서 하는 말일세.”
“아. ‘송자’께서는 공과를 분명히 한다고도 하였지요.”
“자네, 갈수록 대단하군.”
삼고초려 시절부터 알아봤다.
나와 중대본을 갈라치던 놀라운 솜씨를 말이다.
그게 이번에 이렇게 발휘되는 것이었다.
그 엄청난 솜씨는 여기까지 오면서 마음껏 견식할 수 있었다.
이미 무당파를 궁지에 절벽으로 밀어놓고 칼춤을 추고 있지 않은가.
내가 당할 때는 정말 미칠 노릇이었는데, 같은 편으로 상황을 도모하니 너무나도 속이 시원했다.
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어딘지 2%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슬쩍 물어봤다.
“어찌할 생각인가?”
“대감. 사찰은 비상시 엄청난 수의 백성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와. 정말 미친놈이구나.
사찰을 대피소로 사용하려고 하다니.
이 엄청난 발상에 진심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네 정말 대단하군.”
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정말이지 유형원은 조선의 피 한 방울까지 다 짜낼 생각이었다.
이쯤 되니 더 알고 싶었다.
“혹시 아직 더 고혈을 짜낼 곳이 있나?”
“…….”
“그러면 말해주겠나? 원래 좋은 건 나누는 법일세.”
“…….”
유형원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기분이 좋아졌다.
“퇴청하나?”
“물론입니다.”
“이런. 제자를 보지도 않고 가다니, 참으로 냉정한 스승이로군.”
“무슨 말씀입니까?”
“호판이 자네 제자를 불렀다더군. 긴히 할 일이 있다고 말일세.”
유형원은 순식간에 등을 돌렸다.
제자 사랑이 참으로 지극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윗사람은 공격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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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경은 어려운 듯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숫자를 만나자 불편함과 어색함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어졌다.
“소생의 계산으로 볼 때, 화재의 피해를 해결하기 위한 구휼미는 1천 석이면 적합한 듯합니다.”
“1천 석이라. 적은 수량은 아니지만, 장계에 의하면 상당한 피해가 발생했네. 부족하지 않겠나?”
“1천 9백여 호의 민가가 불에 탔습니다. 큰 피해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는 불에 탔다는 것이지, 1천 9백여 호의 기민이나 유민이 발생한 건 아닙니다. 하면, 거주 지역을 복원할 시기의 구휼미를 조정에서 보태면 될 일입니다. 통상 정남(情男) 1인은 한 끼당…….”
남녀노소의 수와 필요한 구휼미를 분석한 말이 쉬지 않고 이어졌다.
노신(老臣)들의 시선에도 주눅 들지 않는 모습은 기특할 정도였다.
그의 말이 끝나자 호조판서 허적이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으니, 명석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경기도 기민의 일도 과거 평안도와는 사정이 다릅니다.”
이건 내가 듣기에 너무나도 의아하여 나서서 물었다.
“어째서 그런가?”
“소생이 장계의 적힌 수치를 유심히 살폈는데, 유민화의 속도가 더딥니다.”
“근거가 있는가?”
“시기와 파악된 규모를 살핀 결과입니다.”
“음.”
“송구합니다. 소생은 그저 수치를 볼 뿐이지, 세세하게 원인까지 파악할 안목은 없습니다.”
“대감. 어찌 이러십니까.”
별말 안 했는데 유형원이 끼어들어서 나를 타박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항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저 물어보지도 못하나?”
“원인 파악은 중대본의 일인데 소생의 제자를 탓하니 한 말이지요.”
“누가 들으면 내가 고함이라도 지른 줄 알겠군.”
“되었습니다.”
와. 이런 억지라니.
정말 제자 사랑이 끔찍하구나.
그건 알겠는데, 윗사람을 말문이 턱턱 막힐 정도로 공격하는 건 무슨 경우란 말인가.
“기민의 유민화가 더딘 이유는 군현의 통제가 원인으로 판단되오. 그간 집행해온 위생 및 구황 정책이 잘 정착되기도 했을 것이오.”
지켜보던 허적이 간결하게 정리하며 개입했다.
비로소 나는 유형원의 억지에서 해방될 수 있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군현의 통제가 유지되는 경기도와 구휼미 1천여 석이 필요한 화재 대책이라면 사찰이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오.”
여유롭지는 않았으나 팽팽한 긴장감도 없었다.
냉정하게 따질 때 경기도 기근과 강원도의 화재는 큰일이었다.
그러나 중대본의 공기는 전과 달랐다.
우리가 관성에 빠졌기에 이러한 것이 아니었다.
상황이 엄중하기에 위정자로서 엄밀히 대처하겠으나, 한편으로는 그간 축적한 역량과 경험 그리고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충만한 결과였다.
“물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할 필요는 있소. 당장 나서지는 않더라도 이리하는 게 옳소.”
“대비라면 어느 수준을 이르시오?”
“잊으셨소? 군영이 해산하면서 확보한 군량이 제법 있소.”
“설마 사용할 의향이 있소?”
“물론이오.”
“이런. 내일은 해가 동쪽에서 뜨겠구려.”
“해가 왜 서쪽…….”
반사적으로 따지던 허적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정도에 낚이다니 참으로 안타까울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화를 피하고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더불어 반계의 안건을 수용하는 건 어떻소?”
“…….”
“아니, 별로요? 나는 마다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 되었소. 반계.”
“예. 대감. 괜찮으십니까.”
“……주상께서 교지를 내리시면 일거에 집행될 일이네.”
“응당 그러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또한 정치적 부담이 아니겠습니까.”
“정치적 부담이라. 그렇군. 왕명으로 수행한 일이라면 공과가 분명할 것이니까.”
“그렇습니다.”
엄밀히 따질 때 작금의 조선에서 불교가 오래전 누렸던 성세를 되찾을 수는 없었다.
이때 왕명이 내려지고 사찰이 온몸을 던진다면 승려들의 정치적 공간을 억지로 확보하는 결과가 발생한다.
미래를 감히 가늠할 수는 없으나 어쩌면 예상치 못한 곤혹스러운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다.
우리로서는 이를 피해야 할 일이었다.
아무리 답답하다고 할지라도 채권을 남발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상황을 더 엄중하게 본다면 왕명이 합당할 수도 있네.”
“대감의 우려를 모르는 건 아닙니다. 사찰이 전면적으로 나서는 게 좋으니 말입니다.”
“오히려 진통이 적을 수도 있네. 왕명으로 그들을 동원한다는 건, 반대로 생각하면 공을 세울 기회가 아니라 과업을 내리게 되는 것이니 말일세. 물론, 이리할 이유는 없겠지.”
“물론입니다. 왕명이 내려지는 순간 잔뜩 몸을 움츠리고 있는 서원의 기가 살 건 당연합니다.”
정치는 이렇게나 복잡했다.
불교가 자발적으로 나설 때와 왕명을 수행하는 경우 모두 무당파로서는 환영과 경계가 공존하니 말이다.
그래서 간단하게 정리해주기로 했다.
“어차피 저들에게는 ‘불교’ 자체가 문제일 것이외다.”
“모처럼 맞습니다. 아주 핵심이지요.”
“치우게. 결론은 어떤 과정이라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요즘 유형원과 손발이 너무 잘 맞았다.
가끔 가만 안 두고 싶긴 하지만 결과가 워낙 좋아서 가만두는 중이었다.
“그런데 확실한 건 있소. 이대로 진행된다면 서원 세력의 고민이 깊어지겠으나, 왕명이 내려진다면 또 다른 싸움이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오.”
“모처럼 맞습니다. 아주 핵심이지요.”
나는 방금 2차 회귀했다.
하지만, 회귀자는 당황하지 않고 제 할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다.
“호판. 일전에 내게 환곡을 이르셨소.”
“…….”
“지금이야말로 적기가 아니겠소?”
허적의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김서경을 바라봤다.
“가능하겠느냐?”
“물론입니다.”
김서경은 대답과 동시에 붓을 만지작거렸다.
수치가 크니 계산이라도 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달리 곧장 붓을 내리면서 말했다.
“소생이 간략하게 계산하였을 때 환곡 총액은 500만 석에 미치지 못합니다. 이 중 6할~7할을 분급하여 60~65만 석의 모곡(이자)을 징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중 군현의 몫이 총 1만 8천여 석입니다.”
“계속하게.”
“전체 331여 개의 군현이 균등하게 배분된다고 가정할 때 한 곳당 50여 석이 지급됩니다.”
“많은 수량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송구합니다. 소생이 정무적 판단을 내릴 능력은 없습니다.”
“왜 계속 소생의 제자를 탓하십니까.”
유형원이 개입하자 손을 훠이훠이 내저으며 말했다.
“환곡을 이대로 둔다면 군현은 적극적인 대처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말한 걸세.”
“그러나 더 나눈다면 국고는 적자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불가합니다.”
“자네 말이 옳지. 가뜩이나 부족한 국고를 더 어렵게 하겠지.”
“그런데도 소생의 제자를 닦달한 이유가 있으실 겁니다.”
“대체 내가 언제 그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동안 생각해봤네. 구휼미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고작 50여 석으로 군현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심지어 이는 군현의 재정으로도 사용되는 게 관행인데 무슨 백성을 구휼할 수 있겠는가.
이를 손질해야 한다.
작금의 모든 개혁은 바로 이곳으로 귀결되고 있다.
“백 번을 고민해봤소. 결론은 하나요. 군현의 재정적 자립을 도모해야 할 시기가 되었소.”
이는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는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재정적 자립’이 핵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