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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180화 (180/298)

180화 교향곡 제1번 ‘조선(朝鮮)’을 준비하다(10)

당혹스러운 허적의 목소리가 울렸다.

“환곡은 개혁되어야 하오. 그러나 이는 국고를 살찌는 방향이 되어야 하오. 한데, 본부장은 반대로 가고 있으니 어찌 우려하지 않을 수 있겠소이까.”

그의 말은 모두를 대변하고 있었다.

심지어 유형원조차도 나의 방안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알겠소. 그러나 그 방향은 틀렸소. 반대로 가야 하오.”

백성은 어디에나 있다.

기근으로 굶주릴 때 즉각적으로 그들을 구제하려면 군현의 구휼미가 넉넉해야 했다.

하지만, 작금의 구조는 너무나도 비효율적이었다.

1. 기근이 도래하여 군현에서 백성이 굶고 있다.

2. 수령이 장계를 올린다.

3. 중대본에서 논의하고 군왕에게 고한다.

4. 결제가 내려지면 운송을 준비한다.

이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백성이 죽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이를 방지하려면 중앙집권화와는 별개로 군현이 자체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복지’ 영역이 많아져야 했다.

이미 다른 영역으로 이는 진행이 되고 있었다.

가장 대표적으로, 위생국의 영역을 확장한 서원의 의과 대학화도 마찬가지였다.

역병이 창궐할 때마다 조정에서 의원이 파견되고 약재가 하달되는 방식은 너무나도 비효율적이다.

그러니 최대한 역량을 끌어 올리는 게 옳았다.

“모두 알 것이오. 이미 상황은 우리에게 우호적이오. 최근 단행한 정치 개혁은 오랜 세월 똬리 틀었던 군현의 부조리함을 일소할 것이오. 국고가 확보될 수 있는 넓은 공간이 확보되었거늘, 어찌 환곡을 군현에 돌리지 않을 수 있겠소?”

“국고의 고갈 아니 적자를 감내하더라도 집행해야 할 사안이라고 보는 것이오? 혹시 계산해보았나?”

허적의 곧장 김서경에게 물었다.

“대감. 소생이 정무적 판단을 내릴 수는 없으나 수치를 환산해볼 수는 있습니다. 환곡의 모곡만 무려 60만 석입니다. 여러 개혁의 성과가 당장 이조차도 채울 수 없습니다. 한데, 수백만 석에 육박하는 환곡을 군현에 되돌리면 조정은 심각한 적자에 봉착하게 될 것입니다.”

에둘러 말했으나 우려가 가득 담겨 있었다.

역시 전체 분위기는 비슷했다.

하지만, 설득까지 할 필요는 없다.

대안을 제시하면 될 일이니까.

“자고로 개혁의 모순은 빠르게 모습을 보이지만 성과는 느릴 수밖에 없소. 우리는 그 세월을 마냥 기다릴 수 없소. 하지만, 환곡을 군현에 집중하는 건 주상께서 교지를 내리시면 당장이라도 가능한 일이외다.”

그리고 사실 국고의 고갈을 넘어선 적자야말로 어쩌면 내가 오랫동안 원했던 일이기도 했다.

경신 대기근.

이건 조선의 비극이 아니다.

청나라도 개고생할 건 뻔했다.

그러면 최대한 빠르게 쌀을 한 톨이라도 확보하는 게 옳았다.

지금 이를 집행해야 한다.

나의 결론은 오직 이것이었다.

“예상되는 국고의 적자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모두 동의할 수 있다고 생각하오.”

“그래서 하는 말이외다. 이제 대청 무역을 도모할 때가 됐소.”

어……?

저건 내 대사가 아니었나?

왜 허적의 입에서 나오지?

진심으로 크게 당황했다.

“왜 그렇게 놀라시오?”

“아, 아니외다.”

“설마 반대하시오?”

“그럴 리가 있겠소? 목숨을 걸고 찬성하는 바이오.”

“목숨까지는 필요 없소.”

“아.”

“물론, 청국의 동의가 필요하오. 한데, 그들은 거절하지 않을 것이오. 과거 원이 고려의 내수(內需)를 잠식했던 사례를 떠올릴 것이니 말이외다.”

그때였다.

갑자기 문이 다급하게 열렸다.

감히 이리할 수 있는 사람은……

“급보요.”

있었다.

윤선거였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급보라고 했나?”

“밀서일세.”

“밀서?”

“발신인은 청사 뇌호일세.”

“!!!”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물었다.

“어서 말하게. 그가 뭐라고 하였나?”

윤선거의 목소리가 중대본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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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승업은 쉬지 않고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고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으나 멈추지 않았다.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그리고 머릿속도 복잡하게 움직였다.

-변 역관. 나는 자네가 본부장과 무엇을 도모하는지 알아야겠네.

-호판 대감…….

-말하게. 아무런 탈이 없을 것이네.

허적의 목소리는 참으로 청아했다.

하지만, 조선의 내정을 책임지는 거인의 무게에서 구현되는 압박은 숨겨지는 게 아니었다.

지금도 그 무게가 느껴질 정도였다.

-대청 전면 무역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국고를 탕진하려고 했군.

-소, 송구합니다.

-또, 자네도 수시로 위생국에서 손을 떼려고 했고.

-송구합니다.

-음.

-…….

-다 알겠는데, 위생국을 지원하는 일은 계속해야 할 것이네. 목적이 정당하다고 하여 과정에서 백성의 목숨을 담보로 삼는 건 내가 용납할 수 없네. 작은 생각이라도 남지 않아야 할 것이네.

-…….

-아. 자네의 재원이 크게 동원된 건 알고 있네. 그런데 그리할 거면 시작을 말았어야지. 조정에서 억지로 강권한 것도 아니었으니 말일세. 내 말이 틀렸나?

느릿하고 차분한 허적의 목소리는 뇌리에 깊게 박혀 있었다.

-상인이기에 대가를 바랄 수밖에 없을 것이네. 때로는 만족하지 못할 수도 있네. 그러나 그걸 정하는 건 조정의 일이지.

-…….

-그래. 그랬지. 과거 인조께서 보위에 오르셨을 때 이괄이 공신 책봉의 결과에 역심을 품었어.

-대, 대감.

심장은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상대는 언제라도 상단의 뿌리까지 뽑을 수 있다는걸.

호조판서 허적은 명재상이지만 좋은 사람이 아니다.

오직 조선을 지탱하는 기둥일 뿐이었다.

-그저 감읍해야 하거늘 불만을 품으면 참으로 참담한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네.

-새, 새길 것입니다.

-하나 더 새기게.

-이르십시오.

허적은 온화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의 온화함을 볼 수 있는 대상에 ‘상인’ 변승업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본부장과는 다르다네. 언제라도 피를 볼 수 있다는 걸 잊지 말게.

-심장에 새기겠습니다.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것이네.

-예. 대감.

변승업은 이 만남을 잊을 수가 없었다.

송시열이 특별한 것이라는 사실이 심장에 새겨진 날이었다.

아무리 큰일을 맡았다고 할지라도 세상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크게 실망한 건 아니었다.

중대본의 일에 보탬이 된다고 하여 중인의 신분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으니까.

아니, 괜히 양반이 되어봤자 골치 아픈 일만 생길 뿐이었다.

지금이 딱 좋다.

그렇게 드디어 이곳에 이르렀다.

변승업은 걸음을 멈췄다.

묘할 정도로 입가에 걸리는 미소만큼은 도저히 숨길 수가 없었다.

어쩌면 오늘만을 바라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입가의 미소를 지우며 다시 걸었다.

문이 열렸다.

들어가며 허리를 숙였다.

“소인 변승업, 작은 실수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분의 차이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자세였다.

답변을 기다리며 그대로 멈췄다.

“이보게.”

익숙한 목소리, 송시열이었다.

고개를 들었다.

“전해 들은 바와 같네. 조만간 청국의 사신단이 다시 압록강을 넘을 것이네.”

그랬다.

청국에서 바다를 개방하였다.

이 소식에 미친 듯이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다.

변승업은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공식화되는 순간 어선을 출항시키겠습니다. 1차로 족히 수십 척은 가능합니다.”

“그게 아닐세.”

“예?”

아직 허적과 나눈 대화가 뇌리에 박힌 상태였다.

그러한데 송시열이 이리 나오니 불안함이 엄습했다.

어쩌면 그간 우호적으로 나눈 대화가 모두 사라질지도 모른다.

진실로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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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래?

오늘따라 변승업이 평소와 느낌이 달랐다.

그런데 지금 중요한 건 아니었다.

“우리는 이참에 뇌호에게 국경의 전면 개방을 제안할 것이네.”

“!!!”

“동의를 얻으려면 우리 조선의 매력을 최대한 보여줘야 하지 않겠나?”

“주, 준비할 것입니다.”

“준비라.”

“청국도 절대 손해가 아니라는 걸 각인시키겠습니다.”

“이런. 자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군.”

“예……?”

말뜻을 제대로 전해주기로 했다.

엷게 웃으며 말했다.

“전면 무역이 아니라 국경을 아예 개방한다는 걸세.”

“…….”

“조정의 허가를 받은 상단이라면 누구라도 국경을 넘을 수 있다는 말일세.”

“그 말씀은…….”

“반대로 청국 상단도 조선으로 들어올 수가 있다는 말이지.”

“!!!”

조선 상단이 청국으로 넘어가는 것과 청국 상단이 조선으로 넘어오는 건 아예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국경이 개방되는 것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나는 평소 이러한 견해를 꾸준히 밝혔으나, 보수적인 조선을 상기했을 변승업의 상상력은 여기까지 미치지 못한 듯했다.

“하면, 과거 고려와 원의 사례를 답습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위험천만한 일이지. 그러니 우리가 준비를 잘해야지. 또 이 정도는 내밀어야만 청이 쉽사리 동의하지 않겠나?”

청국으로서는 조선의 내수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동의할 것이다.

사실 조선으로서도 이건 엄청난 도박이었다.

시장 경제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상황에서 청국의 거대 자본이 내부로 침투하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 외에 방책은 없었다.

“해서, 나는 우리 상단이 철저하게 준비하길 바란다네.”

“소, 소인이 할 일을 일러주십시오.”

“조선 조정이 튼튼하고, 군현에서 생기가 돌아야지. 안 그런가?”

“그 말씀은…….”

“우선, 무역으로 확보하는 이익 일부를 쌀로 받을 것이네. 1할이 될 수도 있고, 5할이 될 수도 있네.”

“소인에게 조율의 권한이 있습니까?”

“아. 물론일세. 자네 의견을 들어야지.”

정확하게 부정했다.

조율이 아니라 의견이라고 말이다.

“자네도 청국으로부터 쌀을 많이 구해오게.”

“물론입니다.”

“확보하는 쌀은 국고로 들어올 것이네.”

“물론입니다.”

“국경을 오가는 자체로도 값을 치르게 할 것이네.”

변승업의 안색이 괴이하게 변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말을 이었다.

“청국의 상단이 국경을 넘을 때도 마찬가지일세. 그들에게는 은을 받을 것이네. 하면, 조정은 이를 자네에게 내릴 것이니 따로 쌀을 확보하게. 물론, 필요한 인건비 따위도 포함할 것이네.”

“한데, 대감. 조선이 그리하면 청국도 통행세를 치르게 할 것입니다.”

“조정이 부담할 게 아닌데 무슨 상관인가?”

“…….”

“그러니 한 번 넘어갈 때 단단히 준비해야지. 안 그런가?”

“……소인이 명심할 것입니다.”

몇 마디를 주고받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변승업은 10년은 더 늙은 것 같았다.

나는 마음이 안 좋아서 하던 말을 서둘러 마무리해주기로 했다.

“대가가 변했네.”

“예?”

“광산과 염전 따위를 가지는 대신, 조세를 내게 될 것이네.”

변승업의 눈동자가 거침없이 흔들렸다.

나는 얄미울 정도로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등가교환(等價交換)을 하기로 하지.”

변승업의 얼굴에서 웃음이 실종됐다.

그간 보여준 놀라운 사회생활 능력을 고려할 때 이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대, 대감. 하지만 일전에 분명 소인과 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는가. 바뀌었다고.”

“하, 하지만…….”

“송상을 만나볼까?”

“예……?”

익살스럽게 웃어줬다.

변승업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지길래 더 웃으면서 말했다.

“1개 상단에 독점권을 내릴 것이네.”

“!!!”

“청국과 통하고자 하는 상단은 독점 상단과 거래해야 할 것이네.”

“!!!”

“전통적으로 진행된 청국과 왜국의 중계 무역만이 아니라 조선 상단과 청국의 중계 무역마저 가능한 것이니, 이익을 어찌 가늠할 수 있겠는가.”

“!!!”

“나는 자네를 생각하여 이를 제안하였는데 내키지 않는 듯하니 참으로 안타깝군.”

“대감. 소인은 늘 많은 조세를 내고자 했습니다. 한데, 오늘 비로소 드디어 뜻을 이루게 되었으니 어찌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이래야 변승업이지.

그리고 전광석화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태세 전환을 본 노신들은 헛웃음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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