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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182화 (182/298)

182화 송자, 착취(搾取)의 시대(2)

화마의 흔적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올곧게 선 가옥을 찾아보기도 힘들었다.

백성들은 무너진 삶의 터전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만 봤다.

누군가는 화마가 삼켜버린 식솔을 그리며 오열하고 있었다.

평생이었다.

하루도 편히 살아오지 않았을 백성들이었다.

치열한 삶을 온몸으로 버티며 오늘까지 버텼다.

그러나 화마는 그토록 질긴 치열함마저 뺏어버린 것이다.

관인(官人)도 무엇을 어찌할 수 없었다.

해야 할 일이 산적했지만, 절망에 빠진 백성에게 쉽사리 말을 꺼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그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이제는 하늘이 원망스럽지도 않습니다.”

“윗분들을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말이었으나 말이 아니었다.

물기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울음이었다.

“소인의 부모님이 원망스럽습니다.”

참으로 참담한 말이었다.

이어질 말을 짐작한 관인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 태어난 게 죄였습니다. 그래서 원망스럽습니다.”

하늘 아래 이보다 가슴 시린 말이 어디 있겠는가.

결국, 관인들은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수수한 법복을 입은 노승이 보였다.

주름살 가득한 노승의 눈이 화마로 피해를 본 백성들을 바라봤다.

“어찌 태어난 것이 죄가 되겠소.”

낮았으나 굵고 인자한 목소리가 맑게 울렸다.

왜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승려의 짧은 말이 화마가 만든 상처를 밀어내는 것만 같았다.

특별한 말도 아니었지만 그랬다.

모두 같은 마음이었을까?

“스님…….”

“허윽…….”

퍽퍽할 정도로 건조했던 공기에 물기가 담겼다.

순식간이었다.

폭우가 내려진 듯 사방이 축축해졌다.

백성의 울부짖음은 점차 커졌다.

“대체 어찌해야 합니까.”

“그저 살아야 하지요.”

“어찌 살아야 합니까.”

“어제처럼 그리고 지금처럼 살아야지요.”

격한 감정이 쏟아졌으나 노승은 차분하게 달래듯 대꾸했다.

그러기를 한참이 지났다.

노승은 잠시 하늘을 바라보더니 목탁을 들었다.

어느새 그의 입에서는 잔잔한 크기의 염불이 새어 나왔다.

“…….”

“…….”

“…….”

어떤 대책을 꺼낸 것이 아니었다.

거창한 말을 꺼내어 위로한 것도 아니었다.

고작 몇 마디 말에 불과했다.

흔히 듣는 염불이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고개를 숙이며 서럽게 울었다.

“마음껏 우시오. 울기라도 해야지요.”

노승의 목소리는 마음을 너무나도 크게 울렁이게 했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관인을 바라봤다.

“관에 긴히 청할 게 있습니다.”

“이르시오.”

“당분간만이라도 백성을 사찰에 머물게 할 수 있습니까.”

“…….”

“백성의 이동을 엄격히 단속하는 법도를 모르는 건 아닙니다. 다만, 터전이 재건되기 전에는 머물 곳도 없는 불쌍한 이들이 아닙니까. 그저 이를 위함입니다.”

“그리하시오. 우리도 협조하겠소.”

“승려들도 재건에 힘을 보태겠습니다.”

“고맙소.”

노승은 그저 엷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리고 하늘이 참으로 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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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명의 백성이 길게 줄을 선 장사진(長蛇陣)이었다.

침묵이 지배한 건 아니었으나 참으로 고요했다.

어떤 통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나 그러했다.

또, 백성들은 모두 포대 따위를 들고 있었다.

“…….”

“…….”

생기를 찾을 수 없는 백성들이 어떤 감정을 표출할 때가 있었다.

바로 장사진의 가장 앞에서 구휼미를 나눠주는 승려와 마주할 때였다.

그러나 특별한 말이 오가는 건 아니었다.

조심스레 포대를 내밀면, 승려가 쌀을 퍼담았다.

백성은 그저 흐느끼며 합장하고, 승려도 화답하듯 합장했다.

“…….”

“…….”

오랜 세월 이어진 기근이었으나 어떻게든 버텼다.

하지만, 올해는 유독 심했다.

속수무책이었는데 인근 사찰에서 대대적으로 구휼을 시작했다.

오늘 먹을 것도 구하지 못한 기민(飢民)으로서는 하늘의 보살핌이었다.

이리되니 오늘 혹은 내일 뭐라도 구할 생각에 떠돌고자 한 백성들도 고을에 잔류하게 됐다.

백성을 통제해야 할 관인들로서는 사찰의 움직임이 그야말로 천군만마였기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그때였다.

“조용하군.”

굳이 조용함을 강조하는 사람이 있었다.

관인들은 고개를 돌렸다.

처음 보는 노인이 있었다.

그런데 딱 봐도 생김새가 예사롭지 않았다.

관인들은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보통은 넘는 노인이라는 걸 말이다.

“아. 오해하지 말게. 줄에 끼어들려는 건 아닐세.”

“…….”

그런 생각은 애초 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아무도 하지 않았다.

왜……?

구휼미를 받으려는 사람치고는 복색이 아주 고관대작처럼 보였다.

아니 너무 노골적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누가 봐도 고관대작이었다.

최소한 당상관이었다.

눈이 달렸다면 감히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관인들은 속닥거렸다.

“영감?”

“대감.”

“대감?”

“영감일까?”

“판단 잘해야 하네.”

“암. 내가 관상을 좀 보는데, 성질이 보통은 넘을걸세.”

“영감인데 대감이라고 하면 좋아할 것이고, 대감인데 영감이라고 하면 우린 죽을 수도 있네.”

“이럴 때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 있네.”

“무엇인가.”

그는 대답하지 않고 노인에게 다가갔다.

“귀인께서 어찌 오셨습니까.”

“허. 한눈에도 그리 보였는가?”

“그렇습니다.”

과연 노인의 입가에는 흡족함이 가득했다.

어느새 사람들의 시선이 한 번에 쏠렸다.

“오늘 이곳에서 구휼이 이뤄진다고 하여 들렸네.”

“아. 예. 뭐. 인근 사찰에서 구휼미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네. 딱 봐도 저들은 승려가 아닌가. 설마 자네들, 내가 늙었다고 괄시하는 건가?”

“예?”

“치우게.”

“아.”

갑자기 노인은 화를 냈다.

관인들은 어안이 벙벙하였으나 범상치 않은 상대였기에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다만 숙덕거림이 커질 뿐이었다.

“설마 어사일까?”

“수많은 어사의 일화 중에서 저렇게 고관대작이라는 걸 표출하는 예는 없었네.”

“그건 그렇지.”

어느새 노인이 승려들에게 다가갔다.

“사찰의 쌀을 모두 가져왔나 보군.”

“아닙니다. 일부에 불과합니다.”

“허. 하면, 대체 그동안 얼마나 비축했다는 건가? 여기에 있는 것만 해도 족히 100석은 넘어 보이는 수량이거늘.”

“수십 석에 불과합니다.”

“허. 어찌 다르다는 말인가.”

“…….”

“더 내어 올 수는 없는가?”

“부족하면 그리할 것입니다. 다만, 아직은 이 정도로 충분하기에 그러했습니다.”

“자네도 비축을 중시하는군.”

“예……?”

“잘 비축해두게. 중히 사용해야 할 쌀이니까.”

“예……?”

“어허.”

“예, 예.”

참으로 비범한 대화였다.

관인들은 눈을 껌뻑였다.

“한데, 백성에게 구휼을 베푸는데 어찌 수령은 보이지 않나?”

갑자기 화살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런데 무려 수령을 찾고 있다.

관인들은 본능적으로 느낌이 왔다.

어처구니가 없게도 정말로 상대가 ‘어사(御史)’일 수도 있었다.

게다가 추정되는 나이와 복색을 보면 고관대작 어사일 가능성이 농후하였기에 몸을 사려야 했다.

하지만, 아직 이건 예상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일단은 버텨보는 게 좋다.

“관청의 업무가 있기에…….”

“갈!”

“!!!”

노인의 사자후가 예사롭지 않았다.

무시하면 관직 생활이 괴로울 것만 같은 느낌이 강렬했다.

-사또를 불러와야 한다.

뇌리를 흔드는 확실한 경고였다.

그러나 역시 확실하게 해야 한다.

만일 어사가 아니라면 사또의 화를 감당하기도 어렵다.

본능의 경고가 아무리 엄중할지라도 현실의 위계가 엄연히 존재하는 법이다.

그래서 물었다.

“호, 혹시 어사이십니까?”

“갈!”

“!!!”

“나를 고작 어사라는 단어에 넣으려고 한단 말인가?”

“!!!”

노인의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관인들은 온몸이 경직되는 것만 같았다.

아들의 출사도 막힐 수도 있다는 묘한 본능의 경고가 강렬하게 치밀었다.

“하, 하면…….”

“세상은 나를 일컬어…….”

노인은 멋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그 꼴이 참으로 경박스러웠다.

관인들은 당혹스러웠으나 감히 내색할 수 없었다.

“송자라고 한다.”

“!!!”

“!!!”

“!!!”

“!!!”

송자?!

송자라고 했다.

믿을 수 없으나 믿어야 했다.

조선에서 누가 감히 송자를 사칭할 수 있겠는가.

사돈과 팔촌 그리고 삼대의 출사를 포기하는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이런 대우라니! 참으로 불쾌하도다!”

애초 어사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사상 초유의 거물이었다.

군왕을 제외하면 조선 최고의 거물이 아닌가.

“당장 귀경할 것이다!”

“!!!”

만일 송자가 이대로 귀경하면 다 끝이다.

이는 사상 초유의 난세였다.

관인들은 미친 듯이 달렸다.

이 엄청난 일을 사또에게 전해야 한다.

여기서 더 작은 실수라도 보탠다면 삼대의 관직 생활이 위태롭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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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짢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하늘 아래 이런 망신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눈을 부라리며 좌우를 바라봤다.

좌측에는 수령 이하 관인, 우측에는 이 지역의 사족이 앉아 있었다.

딱 잘라서 본론부터 말했다.

“내가 송자일세.”

“어찌 모르겠습니까.”

“아는데 이런 참담한 일이 발생했나?”

“관인들이 견문이 짧아서 감히 알아보지 못하고 어사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무례를 가볍게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갈!”

“!!!”

좌우가 깜짝 놀라서 고개를 숙였다.

“엄히 다스리겠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풀어주십시오.”

이런 답답한 일이 있나.

나는 오만상을 다 찌푸리면서 말했다.

“눈이 있으면 보라!”

“관청에서 내쫓겠습니다!”

“허. 자네는 무슨 말을 하나? 관인들을 왜 내쫓나? 나를 못 알아볼 수도 있지.”

“그, 그렇습니다.”

“답답하군. 하나씩 이르겠다.”

“새기겠습니다.”

“승려들이 백성을 구휼하는 데 작은 불편함도 없어야 할 것이다. 이는 중대본의 본부장으로서 하는 말이다.”

“무, 물론입니다.”

수령에게는 여기까지 본론으로 들어갈 때다.

우측을 바라봤다.

“석가의 제자들은 백성들에게 쌀을 베풀고 있다. 한데, 나를 ‘섬기는’ 너희는 대체 무엇을 하는 것이냐?”

“!!!”

“내가 석가의 눈을 쳐다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보다 참담한 일이 하늘 아래 어디 있단 말인가.”

“!!!”

이것 봐라?

반응이 왜 이래?

놀라기만 하잖아?

눈이 가늘어졌다.

“자네들 설마, 아직도 서원에 구 성현의 위패를 모셔뒀나?”

“그, 그것이 아니라…….”

“하.”

“…….”

“석가의 제자보다 못한 놈들.”

“!!!”

고개를 움직였다.

정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성현의 반열에 오르기 전 송시열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공기는 묘해졌다.

좌우 모두 눈을 껌뻑이며 나를 쳐다봤다.

그러나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송시열은 산림의 영수였다.”

경기도와 충청도를 일컫는 기호(畿湖) 지역은 송시열의 세력권이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송시열로 시작하고 송시열로 끝나는 곳이었다.

바로 이곳이었다.

“근데 송자는 산림의 영수가 아닐까?”

“!!!”

“이름 석 자 지우는 건 일도 아니지.”

“!!!”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앞을 바라봤다.

그리고 걸었다.

“서원에 구 성현의 위패가 있다면 이 지역의 사족은…….”

준엄하게 타일렀다.

“산림에서 제외다.”

“!!!”

“나는 지금, 서원으로 갈 것이다.”

“!!!”

사족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 새끼들도 무당파구나.

감히 내 영역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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