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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183화 (183/298)

183화 송자, 착취(搾取)의 시대(3)

다른 곳도 아니고 기호 지역에서 나의 신탁을 부정하고 있었다.

애초 백성들에게 쌀이나 나눠주며 선행이나 베풀러 온 길이었지만, 이런 엄청난 이단을 보고 어찌 참을 수가 있겠는가.

눈을 부라리며 걸었다.

아주 천천히 걸었다.

보는 사람의 숨이 넘어갈 정도로 천천히 걸었다.

시간을 넉넉하게 줄 테니 알아서 처신하라는 나의 넓은 뜻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이렇듯 성현다운 넓은 관용을 베풀며 천천히 서원으로 향했다.

당연하게도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몸을 들이밀자 좌우에 정렬한 사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나는 대충 손을 내저으며 걸었다.

눈이 가늘어졌다.

대성전 현판이 보이지 않았다.

텅텅 비어 있었다.

그동안 새로운 대성전 현판으로 교체하지 않고 오늘 부랴부랴 치웠다는 걸 의미했다.

나의 시선을 확인한 사족들로부터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아주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

사람이 너무 빡빡하게 살 수는 없는 법이지 않겠나?

이럴 때일수록 더더욱 성현다운 관대함을 보여야 하는 법이다.

대충 시선을 갈무리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다시 눈이 가늘어졌다.

“위패가 없군.”

“일찍이 치웠습니다.”

조금 전에 일찍 치웠겠지.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상호 간의 발 연기라는 건 이렇게나 피곤한 법이다.

대충 넘기듯 말했다.

“하면, 이곳은 이제 무엇을 하는가?”

“음. 응당 성현께서 내리신 가르침을 익히고 있습니다.”

“나의 가르침이라.”

“아…….”

“응?”

“예, 예.”

“한데,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데 어찌하여 백성을 구휼하지 않았나?”

“…….”

사족들은 눈치를 살폈다.

우물쭈물하는 걸 보니 애드리브도 여기까지인 듯했다.

크게 한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애드리브라는 건 해내면 좋다는 것일 뿐, 당연하게 바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저 역량이 부족한 것인데 지나치게 궁지로 몰아넣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하여, 나는 넓은 아량으로 적당하게 퇴로를 열어주기로 했다.

“내가 송자일세.”

“응당 그러합니다.”

“생각해보게. 송자가 여기까지 친히 왔네. 한데, 백성들이 어떠한 가르침도 느낄 수 없다면 대관절 나를 왜 성현으로 추대하였나?”

“아. 그건…….”

“결국, 나는 성현이라는 허명을 덮어쓴 송시열에 불과하단 말인가? 부끄러워서 숨을 쉴 수가 없네.”

“소, 송구합니다. 소생들이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찌 배움이 늦은 걸 탓하겠나. 다만, 늦게나마 익혔다면 일각이라도 서둘러서 생각하면 참으로 바람직할 것 같네만.”

“무, 물론입니다.”

정말 어수선하고 쭈뼛거리고 있다.

뭐 하려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쌀이나 들고 가겠지.

슬쩍 물어봤다.

“설마 쌀을 챙길 생각인가?”

“그, 그렇습니다.”

“!!!”

이렇게 우매한 제자들을 보았나.

정말이지 너무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답답했다.

꽉 막힌 한숨만 쉬지 않고 새어 나왔다.

“휴. 듣게나.”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이미 승려들이 구휼미로 백성을 구제하고 있네.”

“그렇습니다.”

“이때 자네들이 쌀을 들고 달려간다? 허.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지 않나?”

“예……?”

“생각이라는 걸 해보게. 백성의 눈에는 송자인 내가 석가와 다툼이라도 하는 것처럼 여겨지지 않겠나?”

“아.”

반응을 보니 전혀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나로서는 결국 화를 낼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사족들은 움찔했다.

“묻지. 나 송자가 석가와 경쟁이라도 해야 하나?”

“아닙니다.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한데, 너희는 석가의 제자들이 선점한 자리에 내 이름을 팔고자 하는가?”

“소, 소생들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의도는 중요하지 않다!”

“소, 송구합니다.”

“어찌 이리도 송구하기만 한 것인가?”

“그, 그것이…….”

“관복을 입으면 황공하고, 벗으면 송구한가? 참으로 답답하도다.”

매섭게 질타했다.

사족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는데 눈알 돌아가는 속도가 아주 일품이었다.

휴. 어쩌겠는가?

이토록 부족한 제자들이니 재차 가르침을 내려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일찍이 나는 서원에서 백성에게 의술을 베풀고자 하였네. 혹시 나의 크고 넓은 뜻이 아직도 전해지지 않았나?”

“아…….”

곳곳에서 터지는 깊은 장탄식(長歎息).

응당 노여움을 표출해야 마땅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참으며 성현다운 관대함을 보였다.

“세상이 어지럽기에 가르침이 전해지는 속도가 늦을 수는 있네.”

“그렇습니다. 소생들이 미처 접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렇게 알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어떤가? 오늘 내가 친히 와서 전했네. 감히 거역할 생각인가?”

“소, 소생들이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다만…….”

“아주 바람직한 말이 아닐 수 없네.”

“…….”

“시작을 과하게 할 수는 없네. 그러니 그동안 구 성현에게 제사 지내던 모든 비용을 의술 교육에 사용하게. 하면, 딱 적절할 것이야.”

“아.”

“무릇, 기근은 늘 병마를 가져오는 법일세. 석가의 제자들이 쌀을 나눈다면 자네들은 이를 살펴야 할 것이네. 알겠는가?”

“…….”

“허.”

“응당 그리할 것입니다.”

아주 개운한 건 아니지만 괜찮았다.

내가 직접 현장에서 가르침을 내리고 있는데도 따르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만약에 그토록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시 송시열을 소환하면 될 일이었다.

뭐. 이게 더 좋을 수도 있었다.

자고로 일벌백계는 생각보다 큰 효과를 낼 수 있으니 말이다.

“아. 그리고 인근의 무당을 좀 불러오겠나?”

“예……?”

“그들에게도 가르침을 내릴까 해서.”

“그, 그리하겠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손볼 게 너무 많았다.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무릇, 선각자의 길은 외롭고 바쁜 법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자네들 내 말을 듣지 못했나?”

“예……?”

“당장 무당을 데려오라고 했네.”

“소, 송구합니다.”

속히 가르침을 내리고 다른 군현으로 가야 한다.

나를 기다리는 이들이 그렇게 많은데 이렇게 머뭇거리니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를 붙잡고 싶은 너희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나. 천하가 나를 찾는데 어찌 이렇게 이기적으로 행동할 것인가.”

“예……?”

“정 원한다면 일정을 더 늦출 수 있다만…….”

“소, 속히 움직이겠습니다.”

나는 오늘 전광석화를 봤다.

흐뭇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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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으로 속이 상했다.

아니, 이렇게 잘 할 수 있는데 왜 그동안 일을 미뤘단 말인가.

정말이지 사족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눈부셨고 빨랐다.

인근의 무당을 수소문하여 내게 데려온 것도 한나절이었고, 의원을 수배한 것도 한나절이었다.

군현의 뿌리까지 지배하는 건 관청이 아니라 사족이라는 세간의 평이 허언이 아니라는 걸 눈으로 보는 순간이었다.

무당에게는 충분히 내용을 전했다.

썩 개운한 느낌은 아니었으나 일을 잘 수행할 것이라고 믿었다.

난 송자니까.

남은 건 역시 복잡하고 아름다운 의과 대학 수립이었다.

“의원의 수가 많지는 않습니다.”

“정확한 표현일세. 고작 4명이라니.”

“하지만, 제법 실력 있는 의원은 이 정도에 불과합니다.”

“음. 한데, 그 정도로 병자를 감당할 수 있겠나?”

“솔직히 의견을 드린다면 굳이 이리할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뭐라?”

“흩어진 4명을 이곳에 모아낸 수준에 불과합니다. 더 많은 병자를 감당하는 경우가 될지가 의문입니다. 오히려 거리가 멀어진 병자의 불편함을 가중하지 않겠습니까?”

너무 맞는 말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고.

그러니 어찌 방긋 웃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렇지. 그래서 내가 생각이 바뀌었네.”

“예?”

“사실 당장 이곳에서 병자를 수용할 수는 없을 것 같네. 너무 시기상조일세.”

“그렇습니다. 의원의 수도 적을뿐더러 약초도 부족합니다.”

“내 말이 바로 그 말일세. 자네 참으로 탁월하군.”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내 말의 요지는 시기상조라는 걸세.”

“예?”

“그러니 어쩌겠는가. 당장은 의원 육성에만 집중해야지. 안 그런가?”

“예……?”

“의원을 불러서 교육을 진행하도록 하지.”

“하면, 병자를 살피는 데 차질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병자도 살피긴 하겠으나 주된 일은 의원 육성일세. 물론 과정에서 불편함은 생기겠으나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일세.”

과정과 결과가 모두 완벽하게 아름다울 수는 없다.

의과 대학의 수립은 의원의 시간과 역량을 소모하는 것이기에, 피해를 보는 병자는 발생할 수밖에 없다.

두렵지만 응당 감내해야 할 일이었다.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잘 듣게.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재주가 있다면 모두 익힐 수 있어야 할 것이네.”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하셨습니까?”

채찍만 계속 사용하는 건 과하다.

때로는 허상일지라도 당근을 내리는 게 옳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고작 의술을 익히는 일인데 양반이 나서서 될 일인가?”

“…….”

“그래서 준비했네.”

때마침 무려 ‘훈민정음’으로 만들어진 의서가 몇 부 도착했다.

벌써 인쇄가 대대적으로 이뤄진 건 아니다.

중대본과 긴밀히 연계하였기에 나의 발끝이 향하는 곳에 먼저 택배를 보냈을 뿐이다.

사족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나는 이유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의술 교육의 확대라는 화두 내면에는 사대부가 의술을 독점할 수 없다는 기득권적 생리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만 해도 불편한데, 새로운 ‘문자’로 교육이 이뤄진다는 건 실로 두려운 일이었다.

훈민정음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과는 아예 별개의 문제였다.

사사롭게 편지나 주고받을 때 사용하던 글자가 교육이라는 핵심적인 영역에 진입하는 것이니 말이다.

과거 니승들이 필사할 때 무당파는 이를 확인하였으나 미처 챙기지 못했다.

각종 정책이 서원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전선조차 제대로 구축할 정신이 없었던 이들이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사실상 주적이었던 내게 도움을 청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대치 국면에 서지 않은 사족은 본능적으로 이를 경계하고 나선 것이다.

복잡할 정도로 개혁 입법이 쏟아지는 와중에 이를 파악한 것이다.

정말이지 기득권의 본능이라는 건 이토록 무섭다.

나는 조금 더 차분해졌다.

나 역시 알고 있다.

절대로 사대부에게 ‘문자’로 전선을 구축하면 안 된다는 걸.

이들이 이를 쟁점으로 부각하는 순간 모든 게 허사로 된다.

일찍이 전면적으로 선언한 의술 교육이 아직도 제대로 집행되지 않은 현실이 아닌가.

도성과 그리 멀지 않은 군현에서도 이토록 이해가 낮다는 건 별로 호의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니 더 조심해야 한다.

원칙과 현실 모두 내가 신중함을 요구했다.

내가 미치지 않은 이상 문자의 확대로 사대부를 도발하지는 않는다.

하여, 진심으로 나는 거대한 변혁을 꾀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의술 교육을 확대하기 위해서 ‘한자(漢字)’보다 쉽고 간편한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선택했을 뿐이다.

이 진심, 아니 진실을 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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