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송자, 착취(搾取)의 시대(4)
기득권의 본능을 꺼내고 있는 이들을 자극하지 않으려면 부드럽게 웃어야 한다.
그래서 최대한 온화하게 웃었다.
물론, 몸을 움찔한 저들의 세계관을 내가 이해할 필요는 없다.
“괜한 생각은 넣어두시게. 애초 태평성대라면 발생할 수 없는 일이니까.”
“…….”
차분하게 타이르듯 말했다.
“사대부는 사대부로서의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은가. 물론, 그 와중에도 병자를 직접 살펴도 될 일이네. 또한, 지금껏 해온 대로 의원이 나서도 될 것이고. 그러나 기근으로 병자의 수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고 있네. 이를 방비하려면 큰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네.”
“의원의 수를 비약적으로 늘리고자 하시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네. 그러나 어려운 한자로는 한계가 있네. 아예 익히지 않을 수는 없으나 모두 한자라면 세월이 너무 오래 걸릴뿐더러 새로 의원을 교육하는 것도 어렵지 않겠나?”
“…….”
“난세일세. 모든 걸 동원해야 하는 어려운 시기이기에 언문(諺文)으로 의서를 필사하고 인쇄하는 것이네.”
쉽사리 동조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물론, 내가 강하게 밀고 나가면 누구도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송자로서 천명한 내용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리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지금까지 조용한 이유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개혁이 다발적으로 집행되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이런 이유였다.
언제라도 불거질 일이다.
이러한데 이 문제를 대충 덮고 강경하게만 집행한다면 필시 ‘문자’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 발생할 것이다.
이건 정말 가정조차 하기 싫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조선은 이제 다툼이 불필요하다.
아마겟돈은 끝났으니 말이다.
“언문은 고작 의서나 옮길 것이네.”
의서를 옮긴 언문은 세월이 지날수록 걷잡을 수 없는 파급을 낼 것이다.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가늠할 수 없다.
오늘 나의 언행이 거대한 밀알이 될 수도 있고, 거대한 저항에 봉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작금의 조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래서 나는 예상 가능한 어떠한 미래도 덮어야 했다.
숨을 잘게 내쉬며 여전히 불안한 눈빛을 한 사족들을 바라봤다.
저들이 가장 듣고 싶을 말을 꺼냈다.
“언문이 출사를 결정하는 과거에 개입할 일은 없을 것이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약조였다.
그리고 진심이었다.
정치는 사대부의 영역이라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니 말이다.
“…….”
“…….”
사족들이 유발한 침묵은 여전했다.
그러나 나는 괜찮았다.
이따위 침묵 따위는 아무리 길어도 좋았다.
저들의 입에서 ‘문자’의 공적 독점만 나오지 않으면 되는 일이었다.
이 땅의 위정자들이 의서의 훈민정음 필사를 잠시 놓친 것에 불과할지라도 이 시간은 최대한 길어야 하니 말이다.
“송구합니다. 하나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바짝 긴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짢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간 진행되어온 사례를 보면 사대부는 무언가를 내놓기만 했습니다. 정녕 이것이 전부입니까?”
사대부의 의무였다.
이 정도는 얼마든지 답할 수 있었다.
“그렇다네.”
“단지 사대부라는 이유만으로 너무 많은 희생을 강요당하는 듯합니다.”
아둔한 이들이 아니다.
의서의 훈민정음 필사가 가질 파급을 정확하게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에둘러서 말을 한다.
이는 불편한 충돌을 피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로서는 너무나도 반가운 화법이었다.
“솔직하게 말하겠네.”
“예. 솔직하게 답해주십시오.”
“내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네.”
“가혹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찌하여 우리는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만 합니까.”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개혁할 수밖에 없는 방향에 있을 뿐이네.”
“압니다. 작금의 개혁은 모두 소생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괴로운 건 반대한다는 것이 괴로울 정도의 시절이며, 평생 익힌 학문과 대치된다는 점입니다.”
이들의 진심도 느껴졌다.
그래. 맞다.
이들이라고 하여 어찌 고민이 없겠는가.
대기근 방비라는 현실과 위정자의 의무라는 도덕성을 가차 없이 휘두르는 작금의 개혁이 지식인의 심장을 멍들게 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들의 양심에 대고 더 호소해야 했다.
우리의 생존을 말이다.
“이보게들. 우리 일단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
“살아야만 뭐라도 도모할 수 있지 않겠나? 그 뒤에 모든 걸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네. 하지만 일단 눈앞에 닥친 위기는 극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또한 솔직한 마음이었다.
경신 대기근을 버텨낸 조선이 다시 모든 개혁을 원점을 되돌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또한 후대의 위정자들이 결정할 문제다.
나와 중대본 그리고 이연은 머나먼 미래까지 걱정할 여력이 없다.
그저 지금을 최대한 착취할 뿐이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자네들에게…….”
나는 다시 진심을 전할 뿐이었다.
“간곡하게 청할 뿐이네.”
또한 진심을 전할 뿐이었다.
“이것이 내가 송자가 된 이유일세.”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럴 것이네.”
“또한, 두렵습니다.”
“그럴 것이네.”
“해서, 다시 여쭙습니다.”
“말하게.”
“이렇게 다 내어주어 맞이할 난세의 끝에 소생들의 자리가 있습니까.”
위정자로서 존재할 수 없다는 건 미지의 공포일 것이다.
이를 탐욕이라고 할 수 없다.
사대부로서 위정자가 된다는 건 농민이 대풍(大豐)을 기원하고, 어민이 만선(滿船)을 바라는 것과 같은 마음이니 말이다.
“있을 것이네. 아니, 당연히 있네.”
“어찌 그리 확신하십니까.”
“조선에서 위정자가 될 수 있는 건 사대부밖에 없네. 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세.”
적어도 조선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나의 말이 곧 미래를 규정할 수는 없다.
사족들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약조를 해주십시오.”
“약조라고 하였나?”
“예. ‘정치적’ 약조를 해주십시오.”
멈칫했다.
담고 있는 정치적 무게가 너무나도 거대했다.
어쩌면 조선이라는 나라의 흘러가야 할 역사의 물꼬를 막아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내어줘야 할 의무에 처한 이들로서는 할 수밖에 없는 요구이기도 했다.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네.”
“그러나 소생들도 그저 최선을 다해볼까 합니다.”
“내용을 묻지 않겠는가?”
“소생들이 그 정도로 무례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믿겠습니다.”
“알겠네.”
오늘의 ‘정치적’ 약조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또한 후대의 일이다.
그러니 이만하면 됐다.
빙그레 웃으면서 이들의 허를 찔러줬다.
“제사 지내던 비용으로 품삯을 주면 참으로 좋을 걸세.”
“예?”
“아니, 이 사람들아. 하루 먹기도 빠듯한 농민이 의술을 배우러 온 것일세. 생계를 책임져주지 않는다면 어찌 훌륭한 의원이 될 수 있겠는가? 살게는 해줘야지.”
“…….”
사족들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이미 대화는 종결되었다.
나는 송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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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회담을 마무리한 뒤 며칠을 지켜봤다.
의과 대학 설립은 차질이 없었다.
자연스레 여러 내용은 인근 군현으로 번질 것이다.
이만하면 자리를 옮길 때가 됐다.
포근하게 웃으면서 고을을 걸었다.
민심을 재차 확인한 뒤 떠날까 싶어서였다.
그런데 눈살을 찌푸리는 장면이 있었다.
절로 눈가가 가늘어졌다.
백성들이 먹고 있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무언가를 먹으려‘는’ 백성들이었다.
나는 성난 마음을 확 짓누르며 다가가며 말했다.
“멈추게.”
구휼미로 모처럼 끼니를 해결하려던 백성들은 나를 바라봤다.
정확하게는 마당으로 들어서는 나를 마루에 있던 일가가 쳐다본 것이다.
밥상을 차리기가 무섭게 내가 등장하자 그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끼 얻어먹으려는 나그네나 성질 더러운 관리로 본 것만 같았다.
됐고.
나는 바로 용건을 꺼냈다.
“뺏어 먹으러 온 거 아니니 걱정은 하지 말게.”
“참으로 다행입니다.”
“……평소 누가 많이 뺏어 먹나?”
“꼭 그렇다기는 보다는…… 한데, 어찌 오셨습니까?”
“손이 왜 그런가?”
“예?”
“왜 그렇게 지저분하냐고 물었네. 아니, 식구가 다 그렇군. 설마 안 씻었나?”
“예……?”
이 반응은 뭐지?
질문을 바꿔서 물었다.
“하나 묻지. 혹시 밥 먹기 전에 손을 씻으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나?”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말하게.”
“송구합니다. 하루에도 듣는 말이 수백 가지입니다. 세세하게 기억하는 건 너무 어렵습니다.”
“허.”
경악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위생 수칙을 교화하라는 한 게 언제인데 아직도 이 모양 이 꼴이란 말인가.
“밥 먹기 전에 손 좀 씻으라고 했건만.”
“예?”
이건 기억의 어딘가에 숨어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냥 머릿속에서 삭제된 것이다.
아니면 아예 처음 듣거나.
한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심지어 무당을 따로 불러서 ‘굿’을 정성스레 하라고 한 게 무려 며칠이나 지났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진심으로 노발대발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성난 마음을 숨기지 않고 등을 돌릴 생각을 할 때였다.
“혹시…….”
눈치를 살피며 말을 걸었다.
너무나도 노여운 상태라 미처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과연 분위기는 흉흉해졌다.
“소, 송구합니다.”
“됐네. 말하게.”
“가시던 길을 붙잡으려 한 건 아니었습니다.”
“말하라고 했네.”
“소인의 아들놈이 의원 되겠다고 서원으로 갔습니다.”
“좋은 일이군.”
“말을 들어보니 의술도 가르쳐주고 품삯도 준다고 들었습니다. 정말입니까?”
“이런.”
“소, 송구합니다.”
한숨을 푹 쉬면서 말했다.
“정말이니까 믿어도 좋네.”
“그, 그렇습니까?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시험은 볼 것이니 기대부터 하지는 말게.”
사람의 생명을 다스리는 학문이다.
지식은 없을 수밖에 없으나 머리는 좋아야 한다.
최소한의 암기력은 확인한 뒤 입학시킬 예정이었다.
의과 지망생 부친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잘될 것이네. 너무 걱정은 할 필요는 없을 걸세.”
“하, 하면 혹시…….”
의과 지망생의 식구들은 이것저것 물었다.
경쟁률부터 합격 이후의 생활까지 다양하게.
물론 송시열과 달리 송자는 부드러웠다.
나는 표정 관리까지는 하지 않았으나 모두 답해줬다.
“그러면 손부터 씻고 먹게.”
“아.”
“역병은 손에서 시작되는 걸세.”
“!!!”
“자네의 아들이 의원의 길에 나섰는데 자네가 이러면 되겠는가?”
“다, 당장 씻겠습니다.”
“잘 생각했네.”
적당하게 대화를 마무리하고 마당을 벗어났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길거리에 똥오줌이 아주 많았다.
없을 수는 없는데 너무 많지 않은가.
이걸 왜 이제 봤는지 내가 한심할 정도였다.
이래서야 어찌 위생 강국을 선포할 수 있겠는가.
너무나도 화가 났다.
그래서 총소집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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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을 바라봤다.
관인들이 있었다.
우측을 바라봤다.
사족들이 있었다.
정면을 바라봤다.
승려들이 있었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무당들이 눈치를 보며 들어왔다.
그랬다.
오늘 나는 조선을 지배하는 대표적인 사상계의 인사들을 총집중시킨 것이다.
이것이 대동단결이 아니면 무엇이 대동단결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