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송자, 착취(搾取)의 시대(5)
조선 사상계의 중추들이 얼추 모였다.
물론 사족은 무당과 함께 배석한 것이 영 내키지 않아 보이긴 했다.
그러나 내가 불렀고, 내가 괜찮은데 토를 달 수는 없다.
그냥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오늘은 대동단결해야 하는 날이니 말이다.
“내가 오늘 너무 놀라운 광경을 보았네.”
관인과 사족은 상황을 알았다.
반면, 승려와 무당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승려는 모르겠는데 무당이 저러니 참으로 괘씸했다.
“분명 중대본에서 위생 수칙의 교화를 명하였는데, 어찌하여 아직도 식전에 손을 씻지 않는 백성이 대낮에 버젓이 보인다는 말인가.”
“그것이…….”
“사대부의 교화가 언제 이토록 허술해졌나?”
“…….”
“한심하군. 참으로 한심해. 이따위로 할 거면 모두 농사나 짓게. 대체 뭐 하러 갓 쓰고 다니나?”
“……송구합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기호 지역에서 이리 나오면 나는 뭐라고 해야 하나? 왜? 송시열 보고 싶나?”
“즉시 교화를 강화할 것입니다.”
시선을 옮겼다.
눈을 부라리며 무당을 노려봤다.
이제야 상황 파악을 한 그들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보아하니 굿을 하지 않았나 보군.”
“소, 송구합니다. 시일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지. 식전에 손을 씻지 않으면 역병이 창궐한다네.”
“그, 그렇습니다. 소인들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이를 알리지 않은 자네들을 내가 어찌해야 할까?”
“소, 송구합니다.”
“내 눈에 또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보여서는 아니 될 것이네.”
“하, 하지만 굿이라는 건 접신(接神)을 해야 하며…….”
“너희들이 섬기는 신과 눈 뜨고 걸어 다니는 성현 중에서 어떤 접신이 더 빠른지 보고 싶나?”
“당장 시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와는 가장 무관한 승려들은 바라봤다.
과연 떳떳한 표정이었다.
나도 이들에게는 타박할 건 없었다.
그저 협조를 구할 뿐이었다.
“되겠나?”
“소승들이 도움이 된다면 어찌 나서지 않겠습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보태주게.”
“능히 나서겠습니다.”
“음.”
“이르십시오.”
“혹시 의서의 인쇄는 어찌 되겠나?”
인쇄는 막대한 인력과 자본이 필요한 일이다.
이를 동네 사찰의 일개 승려에게 대놓고 요구했다.
그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쩔 수 없다.
해야 할 일이니까.
“하루라도 빨리 도모하게.”
“여러 방편을 마련해보겠습니다.”
“다시 말하겠네. 서두르게.”
“그리하겠습니다.”
이만하면 됐다.
이제 마지막이다.
숨을 크게 몰아쉬며 우측을 바라봤다.
“관청에서 총괄해야 할 건데 참으로 허술하더군.”
“그것이…….”
“길거리의 똥오줌은 대체 언제 치울 건가?”
“송구합니다.”
“모조리 파직되고 싶나?”
“!!!”
불만이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만조차 짓눌러버릴 수 있는 게 나의 권력이다.
모두를 바라보며 딱 잘라서 말했다.
“오랫동안 머무르겠네.”
“!!!”
“그리고 나는 자네들이 당장 나가서 일했으면 좋겠네.”
“그, 그리할 것입니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도 늦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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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대로 나는 이곳에 상당 기간 더 머물기로 했다.
많은 이가 불편한 듯 보였으나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다 나 때문에 불편할 것이니 만인을 위해서 한곳에 오래 머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듯싶었다.
그건 그건데 정말 또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화를 낼 기력도 없어서 그냥 눈만 껌뻑이며 포졸을 바라봤다.
“자네들 뭐하나?”
“예?”
“대체 누가 심폐소생술을 이렇게 가르쳤나?”
“그것이…….”
우물쭈물하는 포졸들을 보고 있노라니 절로 눈가가 가늘어졌다.
“있는 그대로 말해야 할 것이다.”
“소, 송구합니다. 자세히 배우지 못했습니다.”
“뭐……?”
“문서로 넘겨 받긴 했으나 소인들이 글자를 알지 못하여 익히기가 어려웠습니다.”
“하!”
대체 언제부터 조선의 중앙집권 통제력이 이토록 엉망이 되었단 말인가.
통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저 심폐소생술이란 무엇이던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도입한 현대인의 징표가 아니던가.
이런 상징성만 있는 게 아니었다.
불시에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비기이거늘 이렇게 방치되고 있었다.
한 사람이 떠올랐다.
허목(許穆).
바로 그였다.
나의 가르침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한 자, 한 자 심폐소생술의 묘리를 적어가던 허목을 생각하니 절로 화가 치밀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
“딱 한 번만 보여주겠네.”
“예……?”
“아니지. 익힐 때까지 일러주겠네.”
“아.”
“모두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겠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심폐소생술을 설명했다.
정확한 동작까지 첨부하느라 온몸은 땀으로 범벅됐다.
그러자 관인들과 향리들도 눈치껏 동참했다.
내가 불호령을 안 내리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눈치였다.
마음 같아서는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걸 질책하고 싶었으나 허목을 생각해서 참았다.
한참을 그렇게 땀을 빼고 난 뒤 말했다.
“모두 익혀야 할 것이네.”
최소한 관복을 입거나 병장기를 든 이라면 이를 무조건 익혀야 한다.
그게 옳다.
진땀을 닦을 때, 사족 한 명이 다가왔다.
눈이 마주쳤다.
맑았다.
좋은 신호였다.
나는 엷게 웃었다.
“근처 군현의 여러 서원에서 의술 교육을 바로 집행하기로 했습니다.”
“잘됐군.”
“그리고 묘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무엇인가.”
“사찰의 승려들이 감히 ‘송자’로 호가호위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자세히 말하게.”
대강의 사연은 들었다.
일단은 문제 삼을 만한 부분이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불교’가 아니라 ‘쌀’이니까.
그런데 그 뒤의 일이 참으로 우스웠다.
“해서, 승려들이 관인을 겁박한다고?”
“그렇습니다.”
“가만히 있는 관인을 겁박할 수가 있나? 또, 관인이 그냥 있을 리도 없을 것인데?”
“송구합니다. 소생은 말을 그대로 전해드린 것입니다.”
“음.”
이게 말이 되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어찌 조처할까요?”
“아. 자네 언문을 좀 아는가?”
“물론입니다. 한데, 갑자기 언문은 왜 그러십니까.”
“간단하네. 심폐소생술 좀 언문으로 옮기게.”
“…….”
“휴. 이보게. 사대부가 물에 뛰어들어서 사람을 구한 뒤 심폐소생술을 할 건가?”
“그건 아닙니다만.”
“그러니 적게. 그래야만 뭐가 제대로 보급될 수 있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할 일이 태산이었다.
그나저나 승려의 문제도 살펴봐야 했다.
물론, 자세한 사정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러자면 애석하게도 정든 이곳을 잠시라도 떠나야 할 것 같았다.
마음이 무거웠으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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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근에 허덕이는 백성을 돕고자 힘겹게 쌀을 옮긴 승려들의 이마에는 구슬땀이 가득했다.
그런데
“돌아가시오.”
관청의 불허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진땀을 닦지도 못한 승려가 당황하며 나섰다.
“그저 쌀을 나누고자 할 뿐입니다. 어찌하여 막으시는 겁니까.”
“기근으로 민심이 흉흉하거늘 사찰에서 사사롭게 나선다면 어찌 관에서 어찌 백성을 통제할 수 있겠소?”
“그렇지만 백성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이런 사정을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토록 마음에 쓰인다면 쌀만 주고 가시오.”
“…….”
“어차피 백성을 구하면 될 일이오. 굳이 승려들이 백성을 직접 만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오.”
아무리 아둔한 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인 의도가 아닐 수 없었다.
승려들은 고소를 삼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관인들도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간단하게 생각합시다. 우리도 사찰에서 나선 게 마냥 순수한 이유만은 아니라는 걸 아오.”
“…….”
“나 역시 위에서 시킨 걸 하는 사람일 뿐이오.”
“…….”
“어쩔 생각이오?”
“……그리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소. 백성은 살리고 봐야지요.”
달래듯 말하는 관인들을 바라보던 노승 한 명이 대뜸 말을 꺼냈다.
“근처에 송자께서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
“찾아뵐 계획입니다.”
“무슨 일로……?”
“의서의 인쇄를 사찰에 명하셨습니다. 이는 실로 대사(大事)이기에 근처 사찰이 힘을 모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어찌 뵙기를 청하지 않겠습니까.”
“…….”
“다만, 관청에서 소승들의 움직임을 경계하시니 미리 말씀드린 겁니다.”
말을 마친 노승은 합장하며 물러났다.
아니, 물러나려고 했다.
“사또께 다시 말해보겠소.”
“…….”
“휴. 나 역시 하급 관리에 불과하오. 하지만, 사리 분별은 할 줄 아오. 그러니 잠시 기다리시오.”
“그리하겠습니다.”
노승은 희미하게 웃었다.
우습게도 송자가 불교계의 뒷배가 되었다.
공식적으로 불교를 가장 탄압하는 인물인데 말이다.
참으로 괴이한 일이었다.
그때였다.
“하나만 묻겠네.”
머리부터 발끝까지 윤기로 가득한 노인이었다.
또한, 명백한 하대를 보면 보통 인물이 아닐 듯싶었다.
노승은 잠시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곧장 말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어찌하여 관청과 대립하나?”
“그리 보셨습니까?”
“쌀만 주고 물러나도 될 일이었네. 한데, 굳이 달리 행동하기에 묻지 않을 수가 없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훗날 사찰의 기왓장까지 거두실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음.”
“많은 중생을 구하는 건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리 각인하지 않으면 훗날을 감당할 수 없으니 어찌 무리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누군지 아는군.”
“물론입니다. 탓하며 벌하셔도 감내할 것입니다.”
“허. 백성을 구하고자 한달음에 달려온 자네를 어찌 탓하겠는가?”
이건 미처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었다.
노승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앞으로는 더 공세적으로 내 이름을 팔게.”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일세. 나와 벗이라고 하고 다니게. 누가 뭐라고 하면 무조건 내게 알리면 될 일일세. 아. 그리고 약조한 대로 인쇄는 서두르게.”
“…….”
노승은 미처 답할 시간도 갖지 못했다.
금방 등을 돌려 걸음을 옮겼기 때문이었다.
그새 젊은 승려가 다가와서 물었다.
“스님. 혹시…….”
“송자일세.”
“허. 듣던 대로 괴이하군요.”
“그렇지. 듣던 대로 성현이었네."
노승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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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가장 시선을 뺏은 건 역시 예사롭지 않은 복색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최소 당상관이었다.
또한, 첫인상이 참으로 강렬했다.
필시 졸렬한 성격이 분명했다.
이런 상대는 말 한마디로 엄청난 불이익을 줄 수 있다.
본능이 경고했다.
수틀리면 최소 삼대가 불행해질 수도 있다고.
향리는 잔뜩 긴장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어찌 오셨습니까?”
“뭔가?”
“예?”
“나는 송자라고 한다.”
“!!!”
엄청난 거물이었다.
제대로 대응하기도 벅찬 상대였다.
향리는 버벅거렸다.
“내가 왔는데 현령이 없나?”
“소, 송구합니다. 잠시…….”
“당장 불러오게.”
“그리하겠습니다.”
향리는 발에 땀 나도록 달렸다.
나는 숨을 머금으며 하늘을 바라봤다.
“승려들이 참으로 부지런하구나.”
그리고 현명했다.
난세를 살아가는 법을 저토록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지금껏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방법까지 깨닫게 했으니 어찌 좋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아주 시원한 착취의 유형을 떠올리게 해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