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송자, 착취(搾取)의 시대(6)
현령은 자라목을 하며 바닥만 쳐다봤다.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고.
“현령.”
“예, 예. 대감.”
“대감……?”
조선 시대에 구석기 이야기를 하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정말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머금었다.
“자네는 내가 아직도 송시열로 보이나?”
“!!!”
관대한 성현 말고 졸렬한 송시열을 원한다고 하니 응해줄 수밖에 없다.
“송시열을 원한다고 하니 응당 그리해주겠네.”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현령의 떨리는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봤다.
말했다.
“낙향하게.”
“!!!”
고개를 돌렸다.
사족들을 쳐다봤다.
“모두 제명일세.”
“!!!”
다들 얼어붙었다.
대체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미간을 와락 찌푸리며 말했다.
“사찰의 승려들이 구휼하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백성을 통제하는 주도권을 빼앗기는 건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것이 사정이 있습니다.”
“혹시 그 사정이라는 건 승려들의 행사를 막다가 보기 좋게 물러난 일을 말하나?”
현령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한숨을 푹 쉬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네.”
정말 호소하듯 말했다.
“그들이나 우리나 모두 전하의 백성일세.”
“응당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석가의 제자이고, 자네들은 나의 제자가 아니던가.”
“예……?”
당황하는 현령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는 더 당황했다.
미간을 찌푸리자 냉큼 당황한 티를 없앴다.
“결국 다 조선의 백성이기에 선을 그을 수는 없네. 하지만, 나는 석가에게 질 생각이 없어.”
“……그렇습니까?”
“…….”
“물론입니다. 어찌 송자께서 물러서실 수 있겠습니까.”
“사찰이 구휼미를 베풀었으니 우리는 어찌해야겠는가.”
“…….”
보기 좋게 옷소매를 휘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석가는 고작 베풀었을 뿐이다. 그러나 송자는 스스로 얻을 방법을 내릴 것이니라.”
“그 말씀은…….”
“아무리 기근이 말썽이라고 할지라도 농사는 지을 수밖에 없다. 이때 백성의 곳간에 쌀 한 톨이라도 더 있으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나는 한마디를 보탰다.
“박세당이 참으로 바람직한 일을 알리고 다닌다고 들었다.”
공기가 썩어버릴 듯 굳어버렸다.
그러나 나는 다시 손을 내저었다.
“나는 석가에게 질 생각이 없다.”
쐐기를 박았다.
한마디를 더 보탰다.
“만일 진다면 나는 송시열이 되겠지.”
거듭 쐐기를 박았다.
송시열의 역사가 바로 공포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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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들은 혼란스러웠다.
그들이라고 하여 원리주의를 주창한 박세당의 최근 행보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막대한 손해를 동반하는 일이었기에 쉽사리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옳고 그름을 넘어선 문제였기에 애써 모른 척했다.
하지만 송자가 직접 언급하면서 사정은 완벽하게 달라졌다.
“휴. 이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군.”
“하지만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세.”
“그렇지. 우암 대감의 성정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네.”
우암 송시열이 그간 쌓은 역사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사족들은 가슴이 너무나도 무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결국 둘 중 하나겠군.”
“손해를 감내할 것인가, 아니면 제명이 될 것인가.”
하늘 아래 이보다 어려운 선택이 어디 있을까.
참으로 답답한 일이었다.
그때 한 명이 조심스레 나섰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는가.”
“서둘러 말해보게.”
시선이 일제히 꽂혔다.
그는 눈치를 살피며 한마디씩 꺼냈다.
“제안을 수용하되 조건을 제시하지.”
“조건이라고 했나? 대체 무슨 조건이 있겠는가.”
“내가 일전에 소식을 하나 접했네. 그 내용에 의하면…….”
이어진 말에 사족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섣불리 결정할 수는 없지만 해볼 만한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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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령은 안색이 어두웠다.
송자의 입에서 파직이라는 단어가 언급되었기 때문이었다.
괜한 말이 아닐 것이다.
작금의 조선에서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군왕이 있다고 할지라도 굳이 의견을 대립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군왕과 송시열의 관계는 조선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어찌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송시열의 제안은 결국 사족의 문제가 아니던가.
그들을 무슨 수로 설득할 수 있겠는가.
가슴이 무거웠다.
“혹시 이리하면 어떻겠습니까.”
향리가 말을 꺼냈다.
현령은 크게 반색하며 말했다.
“방법이 있는가? 당장 말하게.”
“어차피 사족의 일은 우리가 관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네 말이 맞지. 좋아. 계속해보게.”
“결국 송자께서 관청에 이르신 건 승려들의 활동을 잘 보장하라는 수준이 아니겠습니까?”
“음.”
“사찰에 연락하여 구휼미의 운송을 관청에서 거들면 어떻겠습니까. 충분히 효과를 볼 수 있을 겁니다.”
“구휼미의 운송이라.”
“그렇습니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지금 사찰의 행사에 관청이 보탤 수 있는 건 인력에 불과하다.
이를 잘 활용하는 게 옳았다.
현령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장 시행하지.”
“예. 사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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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제안은 상당히 놀라운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반가웠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법이기에 그러했다.
“그러니까 동부의 거름을 보태달라?”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었다.
유형원이 사활을 걸고 추진하는 퇴비형 화장실에서 생산할 거름을 달라는 것이었다.
즉, 소작농에게 징수할 쌀을 줄이는 대신 전체 생산량을 늘리는 방안이었다.
이건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리하지.”
“하면, 원리주의 방책을 도입하겠습니다.”
“모두 현명한 결정을 해주었네.”
나는 방긋 웃었다.
물론, 사족들은 희미하고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사실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한 길이긴 할 것이다.
그나마 작은 실리라도 찾고자 퇴비를 청한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결과를 쉽사리 장담할 수 없는 방책도 아니었다.
나는 내친김에 더 나가기로 했다.
“만일 효과가 괜찮으면 이곳에서도 직접 퇴비를 제조하는 건 어떤가?”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조정에서 무상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구태여 일을 펼칠 이유를 찾기 어렵습니다.”
“이는 조정의 시책으로 점차 확대될 것이네. 그러나 자네들이 나선다면 어찌 모르쇠로 일관하겠는가. 여러 지원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것이네.”
“…….”
이들의 우려는 말 그대로 기우였다.
나는 강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실제로 퇴비형 화장실은 도성에서도 동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전혀 집행되지 못했다.
기술적인 어려움과 비용을 떠나서 백성의 반발이 너무나도 강했기 때문이었다.
동부에 집행된 건 어디까지나 뉴타운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퇴비형 화장실을 도입하는 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속 시원하게 말했다.
“크게 고민하지 말게. 이는 반계의 퇴비가 효과를 본 뒤에 다시 논의해도 늦지 않네. 물론, 자네들이 내키지 않으면 어떤 결론을 내려도 탓하지 않을 것이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어찌 거절만 하겠습니까. 그리하겠습니다.”
“잘 생각했네.”
나는 다시 방긋 웃었다.
사족들의 미소는 조금 전보다는 진했다.
분위기는 제법 괜찮아졌다.
그러나 어찌 그냥 넘어가겠는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한마디를 더 보탰다.
“서원도 잘 정리하길 바라겠네.”
다시 어색해졌다.
어쩔 수 없었다.
“아. 심폐소생술을 언문으로 옮겨야 할 것이네.”
“…….”
“무당도 만나야 할 건데…….”
“…….”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그래서 내 세 치 혀는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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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괜찮은 일이었다.
사찰의 구휼미를 관청에서 도맡아 운송하는 일 말이다.
이러면 공백이 생기는 법이다.
바로 승려의 노동력이라는 엄청난 공백 말이다.
나는 크게 환영하며 말했다.
“승려들이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네.”
“소승들이 말입니까?”
“자네들, 시간이 남지 않나?”
“시간이 남는 건 아닙니다. 원래 하던 일을 잠시 미루고 구휼미를 운송한 것이니까요.”
“세상은 그런 걸 보고 시간이 남는다고 한다네.”
“…….”
논리에 감복한 승려들은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구휼미와 관련한 일은 모두 관청에서 알아서 할 것이네. 그러면 시간이 더 남지 않겠나?”
“…….”
“아. 물론, 대외적으로 사찰의 베풂이라는 사실은 확실하게 알릴 것이니 아무런 걱정은 하지 말게. 이미 모르는 백성도 없겠지만 말일세.”
“소승들이 무엇을 하면 되는 것입니까.”
“이제 의서의 인쇄를 진행하면 좋을 것 같네만.”
한결같은 나의 요구와 관련한 소문을 접한 것일까?
승려들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때 나와 대화를 나누었던 노승이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했습니다. 하여, 제안하고자 합니다.”
“말씀하시게.”
“중원에 토판 인쇄라는 게 있다고 들었습니다.”
“토판 인쇄라고 하였나?”
“그렇습니다. 토판 인쇄는 빠르고 간편한 방식이라고 전해졌습니다. 이를 도입할 수 있다면 어찌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한마디로 선진 기술을 도입해달라는 말이었다.
좋은 말이긴 한데, 기술의 수입이라는 게 하루 이틀에 되는 게 아니었다.
어쩌면 경신 대기근 이후에 도입될 수도 있었다.
이를 고려할 수밖에 없는 나로서는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긴 어려웠다.
“무엇을 우려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승 역시 여러 사찰과 의견을 교환하였습니다. 인쇄해야 할 의서가 4종이지만 내용이 방대하고 요구되는 수량도 많습니다. 이를 감당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긴 했다.
그래서 나도 맞는 말을 해주기로 했다.
“결국, 하지 않겠다는 말로만 들리네만.”
“그렇습니다.”
“이런. 너무 대놓고 인정하니 오히려 할 말이 없군.”
“하여, 방책을 제안하려고 합니다.”
“서두르게. 실은 내게는 조급증이 있다네.”
노승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대외적으로는 의원을 양성하고자 펼치신 일입니다.”
“옳은 말일세.”
“그러나 본질은 다른 줄 알고 있습니다.”
“다르다니?”
“양반 중심의 기존 질서에 균열을 주고자 도모하셨다는 걸 알고 말았습니다.”
“…….”
“언문으로 의술 교육을 한다는 건 철저하게 양반을 배제한 것입니다. 아니, 기존의 중인까지 밀어낼 수 있는 방책이지요. 이는 달리 말하면 조정에서 평범한 백성이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을 열어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여, 언문으로 된 의서가 절실한 것이지요. 소승은 이를 보고 말았습니다.”
“…….”
“또한, 평소 말씀과는 다른 불교의 운신을 확장하는 정책까지 더하면 피할 수 없는 결론이지요.”
나는 전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토록 거대한 함의를 도모할 시국이 아니다.
그러니까 정말로 오랜만에 착각하는 사람을 만났다.
아니, 송자 인생 처음이었다.
더욱이 무려 신분제 균열이라고 하니 딸꾹질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상대의 내공이 대단하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나는 노승이 누군지도 몰랐다.
이쯤에서 통성명은 제대로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자네의 법명이 무엇인가?”
“처능(處能)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