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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187화 (187/298)

187화 송자, 착취(搾取)의 시대(7)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처능이라는 법명(法名)을 모를 수가 없었다.

원 역사의 현종 시절 급격한 억불 정책이 시행되자 무려 8천 자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간폐석교소를 올려서 불교의 정당성을 주장한 인물이었다.

한마디로 이 시절 불교계의 최대 거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왜 지금 이곳에 처능이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볼일이 있으니까 왔겠지.

내가 개입한 순간부터 원 역사는 판타지와 동의어에 불과했으니까.

그나저나 양반 중심 질서의 균열이라고 했다.

이 시절 조선이 신분제를 해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시발점을 마련하는 건 아예 다른 영역이었다.

이를 듣고 혹하지 않을 현대인은 없다.

그러니 흥미가 동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물론, 불나방처럼 덤빌지 말지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말이다.

“한자 혹은 언문. 글자의 이름이나 모양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식을 전하는 글자라는 게 핵심입니다. 나아가 글자로 적힌 지식을 대체 누가 익히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

“송자께서 도모하시는 이번 일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백성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백성은 지식을 취할 것이며, 점차 무언가를 가지고자 할 것입니다. 지금은 의술을 익히며 의원이 되는 수준에 만족할 겁니다. 그러나 의원이 포화상태에 이르면 역관을 바라볼 것입니다. 그 뒤는 어찌 되겠습니까. 이렇게 차츰 백성은 농사가 아닌 글자가 전하는 지식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것입니다.”

경청했다.

기근을 대비하고자 하였던 나의 방책이 또 어찌 진행될 수 있는지를.

다만, 처능은 내가 사족에게 정치적 약조를 한 사실을 모른다.

만일 그런 선제적 대처가 없었다면 그들이 이대로 묵인하고 있을 리는 없었다.

물론 아직은 본능의 경고에 충실한 수준이었기에 당장은 탈이 없을지라도, 언제라도 거세게 불타오를 수밖에 없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여러 생각을 하는 나를 빤히 쳐다보던 처능이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사대부는 이를 알 수 없습니다.”

“어찌하여 그리 자신하는가.”

“언문이기에 그러합니다.”

“…….”

“세종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셨으나 한자의 위치를 흔든 적은 없습니다. 그저 한자의 보조에 그쳤을 뿐입니다. 이 역사를 사대부는 알고 있습니다. 물론, 언문은 이제 지식을 보관하는 수단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제 확신의 근거를 들어야 할 때였다.

“언문이 한자의 경쟁 문자가 아니듯, 그들의 경쟁자는 농사짓는 백성이 아니라 향리와 서얼이니 말입니다.”

정말 지독할 정도로 양반 사회를 분석한 듯했다.

“언문이 통치자의 글자가 될 수 없듯이 백성은 위정자가 될 수 없다고 여길 것입니다. 이는 틀린 게 아닙니다. 언문으로 의술을 가르치는 일이 양반 사회의 균열을 일으킬지라도, 괄목할만한 변화는 참으로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니 말입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참으로 놀라운 식견이었다.

그의 눈을 지그시 쳐다봤다.

차근하게 물었다.

“하여,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가?”

“그 틈에 소승들이 들어갈 수는 없는 것입니까?”

“…….”

“소승들은 자격이 있습니다.”

“자격이라고 하였는가?”

“조선에서 사대부 외에 승려들보다 지식의 전승을 축적한 집단이 있습니까? 아니, 유학과 불경이라는 차이만을 제외한다면 더 방대할 수도 있다고 자부합니다.”

사대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다른 지식인의 대표가 말석이라도 내어달라 말하고 있었다.

참으로 노골적인 요구였다.

“인쇄를 할 수 없다면 한자를 읽을 수 있는 소승들이 그 자리를 대체하게 해주십시오.”

“승려들이 서원에서 의술을 익히고 베풀겠다?”

“그렇습니다. 훗날 인쇄술이 도입되었을 때 언문을 낸다면 어찌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나쁘지 않다.

솔깃하다.

만일 이를 그냥 들었다면 동의했을 것이다.

나는 양반 중심의 질서에 균열을 낼 의도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처능이 말한 전제가 너무나도 달콤했다.

그래서 말했다.

“양반이 만든 공백에 승려가 들어가면 뭐가 바뀌나?”

“정녕 소승들은 글자와 다가갈 수 없는 겁니까.”

“내 말을 똑바로 듣게. 강행하여 인쇄하게 한다면 아니, 필사라도 하게 한다면 더 많은 백성이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게 될 것이네.”

“…….”

“그러한데 내가 어찌하여 승려에게 기회를 내어주어야 하나? 이건 너무 손해 보는 거래라고 생각하네만.”

처능의 오해로 덫을 만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번뇌가 가득 담겼다.

그러나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이리하시죠.”

“제법 괜찮은 생각인 듯한데 들어봐야겠군.”

“승려가 의술을 책임지겠습니다.”

이런.

나는 방금 회귀했다.

적응하느라 눈을 껌뻑였다.

“백성에게 언문을 가르치겠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고개 끄덕일 준비를 하고 있었네.”

“소승도 그리 여기고 있었습니다.”

역시 내공이 예사롭지 않았다.

어쨌거나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했다.

이제 서원에서 다수의 승려가 낮에는 의술을 배우고, 밤에는 백성에게 언문을 가르칠 것이다.

백성이 낮에 일하고 밤에 쉬니 당연한 일이다.

물론 여전히 기근은 위협적이었으나, 행정 시스템은 물 흐르듯 부드럽게 움직일 것이다.

또한, 조정에서 단행한 개혁도 기층에서 잘 집행되기 시작할 건 뻔했다.

아주 완벽한 구도였다.

이만하면 되었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나의 여러 제자가 성대한 환영식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더 시일을 미루는 건 그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러니 이제 조정으로 복귀할 때가 됐다.

하지만, 막상 가려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못마땅한 시선으로 좌우를 쳐다봤다.

“나를 이리 붙잡으니 너무나도 마음이 무겁군.”

“예……?”

“도성에서 한시라도 빨리 올라오라고 성화인데 자네들까지 이러면 나는 대체 어찌해야 하나?”

“아.”

“답답하군.”

“하지만 도성의 일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나랏일이니 크고 작은 건 존재하지만, 어찌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게 있겠는가.”

“하지만…….”

“되었네. 자네들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내가 어찌 함부로 거동하겠나.”

“그것이 아니라…….”

“마음 편히 있게. 당분간은 더 머무를 것이니까.”

“!!!”

한마디를 더 보탰다.

“매일 보도록 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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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은 참으로 무거웠다.

누구도 섣불리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뾰족한 방책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당면한 상황은 심각했다.

기나긴 정적을 밀어낸 건 엄청난 한숨을 동반한 누군가의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였다.

“송자께서 잔류를 선언하셨네.”

곳곳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사족들의 얼굴에는 거대한 그늘만 가득했다.

“어찌해야 하나?”

“듣지 못하셨나? 떠나실 마음이 없어 보이셨네.”

“험험. 우리를 위하시는 걸 어찌 모르겠나. 그러나 어찌 조정의 일이 우리 고을에만 있겠는가.”

“암. 물론, 송자께서 계신다면 참으로 든든한 일이 아닐 수 없네. 한데, 어찌 우리가 이기를 부릴 수 있겠는가.”

“마, 맞는 말일세.”

봇물 터지듯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말의 구성만 다를 뿐 모두 같은 뜻이었다.

침묵보다는 나았으나 이런 식의 대화는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내 생각을 말해보겠네.”

“서두르게.”

“송자께서 ‘굳이’ 우리 고을에 머무실 수 없는 상황을 만들면 될 일이네.”

“상황이라니? 송자께서 계시겠노라고 한다면 어찌 막을 수 있나? 교지라도 받아오지 않는 한 불가능할 것이네.”

“아닐세. 방법이 있네.”

“서두르라고 몇 번을 말하였나?”

“가령, 송자께서 평소 이르신 여러 일이 무탈하게 수행된다면 어찌 ‘걱정’하시겠는가.”

한마디로 명분을 확보하자는 말이었다.

사족들은 멈칫하며 시선을 마주쳤다.

“…….”

“…….”

“…….”

“…….”

모두 알고 있었다.

조선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명분이라는 걸.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결국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지.”

“내일부터 한시도 쉬지 말아야 할 것이네. 그래야만 ‘그날’이 하루라도 빨리 오겠지.”

“암. ‘그날’이 오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못하겠는가.”

“단, 미연의 사태를 대비하여 인근 군현에는 이를 알리지 말도록 하지.”

“그래야겠지. 기어이 조정으로 복귀하지 않으신다면 준비 태세가 부족한 인근 군현으로 이동만 하셔도 우리로서는 ‘그날’이니 말일세.”

사족들은 최고의 결의를 다지며 해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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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 외곽의 막사에서 병자를 돌보던 허목은 멈칫했다.

“…….”

최근 계속 이랬다.

몸이 불편한 건 아닌데 계속 기분이 이상했다.

꼭 누군가가 자신에게 해를 가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 수시로 들었다.

귀가 간지럽거나 등이 오싹하거나 갑자기 식은땀이 날 때도 있고 매일 악몽을 꿨다.

그러나 이를 심각하게 고려하는 건 괴력난신에 빠지는 길이었기에 애써 넘겼다.

“사부님. 괜찮으십니까?”

“아.”

“최근 너무 무리하셔서 기력이 쇠하신 듯합니다. 잠시라도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유형원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허목은 애써 웃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잠자리가 사나웠을 뿐이네.”

“하지만…….”

“괜찮으니 넣어두게.”

스승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유형원으로서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그나저나 최근 올라온 장계가 참으로 흥미롭더군.”

“소생도 내용을 접했습니다. ‘송자’의 활약이 참으로 놀랍더군요.”

“기호 지역에 거대한 바람을 일으켰으니 복귀하면 참으로 가관일 듯하네.”

“벌써 머리가 지끈거리는군요.”

“요즘 내가 기력이 쇠한 건 그 인사를 다시 볼 생각을 한 탓일 듯싶네.”

“실은 소생도 그런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

사제 간의 대화가 참으로 정겨웠다.

“그나저나 불교계의 대처가 참으로 과감합니다. 사실상 참전 선언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렇겠지. 평시라면 불가능한 일일세.”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외다.”

“오셨습니까.”

“오셨소?”

새로이 막사에 모습을 보인 사람은 송준길이었다.

격무(激務)에 시달렸는지 얼굴이 많이 상했다.

자리에 앉기도 전에 쉬지 않고 말을 뱉었다.

“우암이 드디어 실성했소.”

“왜 그러시오?”

“벌써 도성으로 돌아온다고 하오.”

“아니, 굳이 벌써 올 이유는 없을 것인데.”

“내 말이 그 말이오. 그간 우암이 벌인 일로 사헌부가 마비될 지경이었소. 그가 자리를 비운 덕에 산적한 일을 겨우 정리하고 있는데 벌써 돌아오다니…….”

송준길의 한숨을 땅이 꺼질 듯 무겁고 길었다.

허목은 격하게 동의하듯 여러 번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예 안 올 수는 없겠으나, 군현에 머무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좋소.”

“냉정하게 따질 때 우암 대감이 실질적으로 개혁의 실무를 담당하는 건 아니긴 하지요.”

“속은 간장 종지이거늘 펼치는 일은 하늘보다 넓지 않은가. 결국, 이를 해결하는 건 나머지 인사들이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네.”

송준길이 재차 한탄하며 말을 이어가려고 할 때였다.

“허. 나와 뜻을 함께하는 분들이 여기 있으셨소?”

음절 하나마다 고된 삶이 잔뜩 느껴지는 지친 목소리였다.

누군지 확인하지 않아도 허적이었다.

모두 안쓰러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본부장은 대체 어쩌자고 벌써 돌아올 생각을 한단 말이오?”

무언가 속에 잔뜩 억눌린 듯한 목소리였다.

모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가 없으니 숨 쉬듯 자연스럽게 일이 정리되고 하나씩 자리를 잡았소. 중대본의 본부장이라면 응당 대를 위하여 일신의 안위는 포기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외다. 한데, 어찌 이리 행동하는 것이오. 참으로 답답하오.”

“내 말이 바로 그 말일세!”

거칠게 숨을 내쉬며 모습을 보인 윤선도였다.

그는 분을 참을 수 없는지 내뱉듯 말을 이었다.

“막아야 하오.”

“물론입니다.”

“물론이외다.”

이견은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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