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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188화 (188/298)

188화 걸었기에 제 자리였다(1)

일부러 찾으려고 해도 보이지 않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너무 개운하게 진행됐다.

“의술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언문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구휼미의 운송도 차질이 없습니다.”

“백성을 모아서 굿을 했습니다.”

……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정말 완벽합니다.”

보고는 간결하고 긍정적이었다.

진한 감동마저 전해질 정도였다.

나만 그런 건 아니었는지 처능도 크게 감탄하며 말했다.

“과연 대단하십니다.”

“이 정도는 기본일세.”

“하하하. 그렇습니까? 이렇듯 군현의 일이 잘 풀리었으니 편히 귀경하시겠군요.”

“그건 아닐세.”

오해가 커지면 불신이 쌓이는 법이다.

나는 확실하게 말해주기로 했다.

“적어도 기호 지역은 조정의 방침을 집행하는 게 이번 하방의 목표일세.”

“허. 조정에 복귀 의사를 밝혔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게으름을 피울까 우려되어 서찰 한 통 보낸 걸세. 다른 의도는 없네.”

“하하하. 그렇습니까?”

오래 알고 지낸 건 아니었고, 단 몇 번의 만남에 불과했다.

지금껏 만난 사람과는 너무 달랐다.

여러 사람처럼 나를 어려워하지 않으며 과하게 입에 발린 말을 하지 않아서일까?

왜 이렇게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지 모르겠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냥 그랬다.

그래서인지 나도 편하게 말을 꺼낼 수 있었다.

“기호 지역의 사찰도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하지 않겠나?”

“하하하. 송자께서는 참으로 솔직하십니다.”

“아. 굳이 말을 돌려 하거나 속을 숨길 필요가 없는 위치라서 그런 걸세.”

“하하하. 우문현답이군요.”

“그렇지. 이왕이면 사이좋게 현문현답을 해야겠지. 어서 자네도 현답을 꺼내 보겠나?”

“서원의 움직임과 발맞춰서 승려가 나설 것입니다. 그러니 심려치 마십시오.”

처세 아니 정치력도 예사롭지 않았다.

의술 교육은 구조적으로 서원이 먼저 행동을 감행해야 했다.

즉, 불교계가 섣불리 먼저 나서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을 한 것이었다.

이는 현실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기에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종이가 부족하지는 않겠나?”

“종이가 없으면 죽간이라도 써야지요. 죽간이 없으면 바닥에 그려가면서라도 하면 될 일입니다.”

“아니, 이보게. 뭐 하러 그러나? 사찰에서 종이를 많이 생산하면 그런 고생하지 않아도 될 것인데?”

“허. 종이까지 생산하라는 것입니까?”

“대충 말해도 이렇게 잘 알아들으니 마음이 참으로 따뜻하군.”

“하면, 소승은 손을 떼겠습니다.”

“이런. 나와 척지자는 것인가?”

“그게 나을 거 같습니다.”

“아니, 자네 왜 이리 극단적인가?”

“하하하. 송구합니다.”

종이 생산을 사찰에 떠넘기려는 치밀한 계책은 순식간에 무산됐다.

과연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었다.

나는 상대의 노련함을 다시 깨우치며 말했다.

“이보게. 나도 눈을 먼 쪽으로 돌렸네만. 설마 잊으셨나?”

“무슨 말씀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한데, 송자께서 사대부의 이권을 대변하시기에는 멀리 오셨다고 생각됩니다.”

역시 천년 소림의 저력은 보통이 넘었다.

대화를 이어갈수록 수세에 밀리는 걸 느꼈다.

어쩔 수 없었다.

정확하게 급소를 찔러주기로 했다.

“백성에게 언문을 가르치는 건 엄청난 권한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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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한 시간을 할애하여 송시열의 복귀를 성토했다.

마음 같아서는 밤을 지새우며 성토대회를 이어가고 싶으나 시절이 수상하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윤선도는 모두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난세가 끝날 때 조선에서 승려는 200년의 세월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치에 오르게 될 것이오.”

“그렇습니다. 구휼은 일회성에 그치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조직적으로 백성에게 의술과 언문을 가르친다는 건 실로 막강한 ‘권력’을 확보하는 것이지요.”

“반계의 말대로요. 현재 기호 지역의 일부 군현에서 진행되는 일은 단지 일개 정책의 일이 아니외다.”

송시열이 보낸 서찰의 내용은 단지 평범한 사안만 나열된 것이 아니었다.

조선의 기존 질서를 흔들 수 있는 묵직한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송두리째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중대본으로서는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핵심 논제는 다소 의외의 것이었다.

바로

“그런데도 본부장이 귀경하는 건 막아야 하오.”

송시열의 복귀였다.

심지어 윤선도의 목소리는 실로 진중했다.

“만일 지금 복귀한다면, 곧장 전하를 알현하여 공식 반포하려고 할 것이오.”

현재까지는 어디까지나 민간의 일이었다.

송시열이 주도하고 있을지라도 철저하게 민간의 일이었다.

그러나 공론화한다면 사정이 완벽하게 달라진다.

“백성을 교화하는 건 사대부의 특권이었소. 한데 승려가 백성을 가르치기 시작하면, 위기를 인지한 사대부가 어찌 나올지 가늠할 수 없소.”

내일의 조선을 살아갈 백성에게 사대부의 교화보다 승려의 염불(念佛)이 더 영향을 끼칠 단초를 여는 방책이었다.

종래 남인 최고의 정략가가 상황을 면밀하게 분석한 결과를 나열했다.

“다만 의아한 건 해당 군현에서는 왜 이 문제가 불거지지 않느냐는 것이외다.”

“그 문제는 소생이 답할 수 있습니다.”

다시 새로운 방문객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윤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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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가르칠 수 있는 권한.

이는 세계관을 공유할 수 있는 시발점이 된다.

세상이 어찌 될지 가늠할 수도 없다.

그런데 처능은 엷게 웃었다.

“소승은 불교의 이익을 대변합니다. 하지만, 너무 위대해질 생각은 없습니다.”

“음.”

“불교가 성리학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려처럼 국교가 될 수도 없겠지요. 그러하니 지금 누리는 수준의 권한을 지킬 수만 있어도 만족합니다.”

“아직 모르는가? 내가 그걸 박탈할 수도 있네.”

“물론입니다. 하지만, 이미 소승은 불교의 효용성을 입증했습니다.”

“그렇긴 하지.”

“파급이 어디까지 번질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소승은 이를 가늠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가늠하는 부분을 말하면 될 것이네.”

“말 그대로입니다. 작금의 흐름은 절대 불교에게 해롭지 않다고 판단하였을 뿐입니다.”

능구렁이도 이런 능구렁이가 없을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호적수를 만난 느낌이었다.

“자네 말대로 불교가 무언가를 할 수는 없지. 국교는 어불성설이고. 하지만, 승려는 아닐세.”“소승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까?”

“솔직히 말하지. 의서 인쇄? 종이 생산? 당장 중요한 건 아닐세.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의술을 익힌 의원이 많아지는 것이니까. 백성에게 언문을 가르친다? 굶어 죽어가는 이들에게 글자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이 모든 건 난세가 끝난 뒤에 해도 될 일이네.”

“만일 그리된다면 소승은 부담이 덜하긴 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일세.”

되돌아본다.

필시 처능은 이미 나와 정치적으로 손을 잡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런데 정치라는 영역에서 손을 맞잡는 건 적당하게라도 체급이 맞아야 한다.

애석하게도 나라는 사람에게 불교계는 그런 대상이 아니다.

만일 내게 유학자와 승려를 이분법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다가온다면, 주저 없이 전자와 손을 잡을 것이다.

그런데도 처능이 이리 나오는 건 내가 사족과 정치적 거래를 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현대인이었기에 이를 떠올리면 가슴이 무거워지는 건 사실이었다.

사족과 한 ‘정치적 약조’가 훈민정음이 만들어 낼 세상을 막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어쩔 수 없다.

내게 중요한 건 새로운 세상이 아니라 오직, 이 세상의 유지였으니까.

물론, 백성의 곁에 있다면 언젠가는 민심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전근대 국가에서 정치권력을 넘을 수 있는 건 없다.

순수 혈통의 양반만 위정자가 될 수 있는 조선은 변화의 물꼬를 최선을 다해서 막을 것이다.

이는 오늘까지 흘러온 역사의 물줄기로 200년 전으로 되돌리는 발언이었다.

이 자리에 불교의 혁신이나 승려의 노력이 현실로 귀결될 수는 없다.

“서얼과 향리의 과거 응시를 불허할 것이네.”

사족의 반발을 무마한 ‘정치적 약조’는 바로 이것이었다.

사실상 영세불변의 정치권력을 담보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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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은 다소 어색했다.

아니, 대부분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서얼과 향리를 향한 등용의 문은 점차 열리고 있었다.

그들의 진출은 더 미룰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었다.

그런데 이를 아예 막아버리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간 본부장의 행보와 정면으로 대치하는 것이오.”

“사족을 달래기 위한 방책이었다고 할지라도 결이 너무 다르오.”

지금껏 송시열은 사족이 그간 누렸던 권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사실상 치워버리려는 수준에 가까웠다.

이를 고려할 때 윤휴가 전한 내용은 충격적이었기에 여기저기서 말이 새어 나왔다.

“이 나라 조선에서 과거란 위정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오. 그간 여러 이유로 응시자의 자격을 완화한 게 사실이오. 한데, 이를 다시 양반에게만 허용하는 법도라니.”

“옳고 그름을 떠나서 상당한 가능성이 있을 것이외다.”

“그렇긴 하지만 향리와 서얼이 순수 혈통의 양반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소이까.”

“그간 이뤄진 점진적인 변화는 흐름이었소. 그러나 이를 본부장이 ‘송자’의 권위로 막고 되돌린다면 사정이 아예 달라질 것이오.”

“냉정하게 금상께서 보위에 오르신 이후 감행한 개혁의 강도를 되새겨야 합니다. 그간 중대본은 서원과 전면전도 불사했습니다. 이러한데 서얼과 향리가 두려워 일을 멈춘다? 이는 어불성설입니다.”

말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그만큼 송시열의 방법은 예상과는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그런데 꼭 나쁜 건 아니외다.”

윤선도가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시선이 집중됐다.

“만일 이를 내어준다면 그간 미지근한 행보를 보인 서원을 일거에 정리할 수가 있소.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들의 협력이 절실한 시기라는 건 분명하니 말이외다.”

“한데, 선생. 우암 대감이 소생에게 전한 서찰의 말미에는 한 가지가 더 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걸 왜 이제 말하나? 빨리 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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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그리고 처능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그 자리에 승려가 갈 수도 있네.”

“!!!”

“다시 말해야 하나? 종래 서얼과 향리가 차지했던 자리를 승려가 차지할 수도 있다는 걸세.”

“!!!”

세상의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처능의 눈동자에 탐욕이라는 감정이 보였다.

“승려가 과거를 응시하여 관복을 입을 수 있는 세상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 불교가 아닌 승려라면 어찌 불가능하겠는가?”

“……가능하겠습니까.”

“하기 나름이지.”

“아시리라 믿습니다. 지금껏 사대부가 향리와 서얼의 견제에 최선을 다한 건, 불교는 관직에 진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따질 때 조선에서 사대부와 자웅을 겨룰 수 있는 식자(識者)는 승려밖에 없긴 하지.”

다시 제안했다.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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