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걸었기에 제 자리였다(2)
일제히 미간을 찌푸렸다.
여태껏 들은 말 중에서도 가장 황당한 내용이었다.
“본부장이 드디어 실성한 게 분명하오.”
“격하게 동의하오.”
“말도 안 되오.”
“가능한 일이 아니오.”
송시열의 어처구니없는 발상에 노신들이 격하게 토로했다.
듣고 있던 유형원이 차분하게 정리하듯 말했다.
“승려는 조선에서 유일하게 사대부와 학문을 겨룰 수 있는 무리입니다. 이러한데 어찌 이들의 관직 진출은 정당성을 넘어 현실에서 구현될 수 있겠습니까.”
“자네 말대로일세. 사대부가 이룬 유학의 경지가 승려보다 낮지는 않겠지. 겨룬다면 밀리지 않을 것이네. 하지만, 이런 논리는 말장난에 불과하지 않은가. 승려가 과거 응시를 하는 것 자체가 큰 문제로 불거질 것이네.”
“사부님. 우암 대감이 모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백호에게 서찰을 보냈다는 건 이미 불교계와 어느 정도 합을 맞췄다는 걸 의미합니다. 하면 이미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뜻인데, 도저히 그 의중을 파악할 수 없군요.”
“하. 답답하군. 이리 서찰만 전하면 대체 어쩌자는…….”
허목은 말을 멈췄다.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의문을 해결하고자 시선을 돌려 윤휴를 빤히 쳐다봤다.
“어째서 본부장이 자네에게만 이 사실을 알린 것인가?”
“별 내용은 없었습니다. 소생에게 판을 뜨겁게 달궈달라고만 했습니다.”
“설마 또 일을 크게 일으킬 생각이란 말인가?”
“정확하게는 중대본이 기습적으로 도모하게 해달라는 말이었습니다.”
“뭐……?”
“더 정확하게는 소생이 앞장서길 바랐습니다.”
이 내용을 선창하는 사람은 엄청난 비판에 노출될 게 뻔했다.
그런데 윤휴에게 청했다는 건 노림수가 있다는 걸 의미했다.
“예. 저열한 계책입니다.”
“백호. 하면, 내가 나서는 게 좋지 않겠는가?”
“반계. 자네는 그간 꾸준하게 불교의 처지를 대변했네. 한데, 다시 나서는 건 무리일세.”
“나는 괜찮네.”
“오해하지 말게. 자네를 걱정한 게 아니라, 우암 대감의 저열한 계책이 그나마 효과라도 보려면 내가 나서야 사족의 위기감이 더 커진다는 의미였네. 한데, 그리 말하니 참으로 당황스럽군.”
“…….”
유형원의 말문을 막아버린 윤휴는 한마디를 더 보탰다.
“모처럼 흥미로운 일이 생겼습니다.”
윤휴의 입가에는 뜨거운 미소가 자리잡혔다.
-----
나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반면, 처능은 웃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나의 제안이 놀랍고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머뭇거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솔직히…….”
잠시 고심하던 처능이 말을 꺼냈다.
“토사구팽을 우려했습니다.”
“이런. 놀라서가 아니라 나의 신뢰가 문제였군.”
“송구합니다. 그러나 조선의 200년 역사는 소승에게 경각심을 크게 일깨우고 있습니다.”
“그래. 토사구팽이라.”
“소승들로 사족을 벼랑 끝으로 몰 수 있는 최적의 수가 아닙니까. 극적으로 합의가 이뤄진다면 소승들은 언제라도 버려질 수 있다는 걸 압니다.”
“사실 나는 사찰과 서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후자일세.”
“사상과 정견을 떠나서 그것이 현실이지요. 하여, 소승은 토사구팽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잘 알겠네. 한데, 나는 진심일세.”
“예. 지금은 진심이겠지요.”
“일단 받아볼 생각은 전혀 없나 보군.”
“어찌 탐나지 않겠사옵니까. 불자가 된 이후 처음으로 탐욕이라는 감정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먹지도 못할 산해진미를 탐하여 화를 자초할 만큼 소승이 무지하지는 않습니다.”
“화를 자초한다…….”
“사찰은 서원을 이길 수 없습니다. 누가 힘을 보태더라도 결과는 같습니다. 송구하지만 소승은 물러서겠습니다.”
결국, 처능은 고사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네. 하면, 이 일에서 빠지게.”
“실로 담대한 제안이었습니다. 소승의 그릇이 작아 받지 못한 것이니 너그럽게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괜찮네.”
나는 성현다운 배포를 보였다.
자고로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갈 수는 없는 법이다.
싱그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조만간 도성에서 보지.”
“이제 귀경하실 겁니까.”
“그래야겠지.”
이제 진짜 귀경할 때가 됐다.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
격분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백성에게 언문을 크게 알린다고 하였나?”
“기호 지역의 서원에서 시행되는 중일세.”
“허. 어찌 한자를 두고 언문으로 가르침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승려들이 나섰다고 하네.”
“참으로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네!”
“하루가 갈수록 숨쉬기가 더 고통스러운 세상일세. 이를 어찌해야 하는가.”
“기어이 사족이 없는 조선을 꾀하는 것인가.”
도무지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그때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소, 송자께서 서얼과 향리의 과거 응시를 제한하는 상소를 올리셨다는군.”
“!!!”
“!!!”
불평과 불만을 쏟아내던 사족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송자께서……?”
“송자께서……?”
공기는 조금 어색해졌다.
하지만, 언제까지 눈만 껌뻑이고 있을 수는 없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험험. 역시 명쾌하시군.”
“암. 나는 송자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리라 믿었네.”
“물론일세. 그간 기근을 방비하는 방책으로 약간의 의견 대립이 있었으나, 한 번도 본심을 의심한 적이 없네.”
“나 역시 그러하네.”
“이제 생각해보니 기호 지역의 사족과 이를 논의하신 거 같네.”
“필시 그러한 듯하네. 아니라면 이토록 무탈하고 크게 일이 도모될 수는 없을 것이니까.”
순식간에 송비어천가가 시작됐다.
“이토록 혼탁한 세상이지만 송자께서 계시니 어찌 든든하지 않겠는가.”
“참으로 지당한 말일세.”
“아. 그런데 송자께서 도성에 당도하셨나?”
“그건 아닐세. 그러나 송자께서 올리신 상소가 분명하네.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어. 모두 이를 말하고 있네.”
그때였다.
“그, 급보일세!”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사족들의 눈이 가늘어졌다.
“백호 선생이 승려의 과거 응시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네.”
“!!!”
“!!!”
“!!!”
“!!!”
훈풍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족들의 얼굴에는 감정이라는 것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냥 무표정이었다.
공기도 적막했다.
그리고 조용히 전해지는 소식이 있었다.
“송자께서 조금 전 도성에 당도하셨네.”
사족들은 일제히 일어났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도 입을 열지는 않았다.
또한, 아직도 얼굴에는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
강시인 줄 알았다.
양손을 앞으로 뻗고 깡깡 뛰어다니면 영락없는 강시였다.
내 평생 이토록 감정이 담기지 않은 얼굴은 처음이었다.
한둘이 아니라 십수 명이었다.
소름 끼칠 정도였다.
무당파인 줄 알았는데 안 본 새에 혈교의 신도가 된 게 분명했다.
어쨌거나 강시와 어울리는 건 취향이 아닌지라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이제 막 사가에 당도하여 여독을 풀지도 못하였네. 잠시 숨만 돌렸다가 전하께 알현을 청해야 하거늘, 자네들은 어찌 이렇게 무례할 수 있는가?”
“화급을 다투는 소식이 있습니다.”
“허.”
“지금 전해드려야 할 듯합니다.”
“목소리에 생기 좀 넣으면 안 되겠나? 누가 들으면 죽은 사람인 줄 알겠군.”
“죽는 게 나은 듯합니다.”
“자네들 왜 이러나?”
“백호 선생이 승려의 과거 응시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
나는 눈을 껌뻑이며 혈교도를 쳐다봤다.
“자네들 지금 뭐라고 했나? 다시 말해보겠나?”
“승려가 출사하는 세상이 열리고 있습니다.”
“…….”
“이를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혹시 뭔가를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닌가?”
“아닙니다. 몇 번이나 확인했습니다.”
“…….”
빤히 쳐다봤다.
볼이 씰룩였다.
그리고
-쾅!
탁자를 내리쳤다.
“자네들은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인가?”
눈을 부라리며 말을 이었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소, 소생들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자네들이 모르면 누가 아는가? 내가 자리를 비우면 더 신경을 써야 하는 법이거늘!”
나의 엄청난 분노가 쏟아지자 사족들은 강시에서 벗어났다.
황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하! 어처구니가 없군.”
“설마 백호 선생이 저리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백호와 반계는 벗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나? 그 둘은 결국 불교와 의기투합한 것일세. 그런데 변명을 고작 그 정도로 하나?”
“소, 송구합니다.”
“내가 그토록 말하지 않았던가. 세상이 어찌 될지 모르니 작은 빌미도 주지 말라고 말일세. 하여 작은 일이라도 도모하라고 그토록 일렀거늘, 불평불만만 늘어놓다가 기어이 이 사달까지 만들었단 말인가?”
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사족들은 감히 나설 수 없어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응당 반대해야 할 것이다. 하면, 어찌 나설 것인가.”
“조정의 일입니다. 속세를 떠난 승려가 유학을 조금 익혔다고 하여 치국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한심하군. 과거에 응시하여 결과가 좋으면 자네의 논리는 힘을 잃는 걸세. 고작 그 정도로 백호를 주저앉힐 수 있다고 생각하나?”
“소, 송구합니다.”
“다른 사람 없나?”
“이는 애초 승려가 과거에 응시하는 것 자체가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래야지.
이렇게 나와야지.
나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필시 백호는 물을 것이다. 그게 왜 문제냐고. 답할 수 있느냐?”
“어렵지 않습니다. 애초…….”
“유학의 깊은 뜻을 익힌 게 아니라 암기에 그쳤다는 말은 제발 하지 말게.”
“…….”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군. 그러니 애초 뭐라도 했으면 이 꼴은 나지 않았을 것 아닌가!”
다시 화를 냈다.
연신 타박하자 사족들은 입을 다물었다.
“내가 군현을 종횡무진 뛰어다니며 나의 가르침을 설파하고, 들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너희는 승니들이 필사할 때도 구경만 했을 것이며, 돌파할 묘안을 강구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 이 말을 대체 몇 번이나 해야 하나?”
“소, 송구합니다.”
“답답하군. 참으로 답답하군.”
가슴까지 두드리며 한탄했다.
눈치만 살피던 사족 중 한 명이 말했다.
“결국 중대본의 일입니다. 송자께서 나서시면 수면 아래로 가라앉지 않겠습니까.”
“…….”
“송자께서 땀 흘려 기호 지역을 순회하시며 일구신 성과와는 충돌하지 않습니까. 어쩌면 생각보다 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해서, 지금 나더러 기근의 극복을 위해서 끼니를 거르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피를 토하며 일하는 그들을 권위로 강제하라는 말인가?”
“그것이 아니라…….”
“물론!”
외치며 손을 내저었다.
“내가 호통을 치면 어찌 감히 윤휴가 고집을 피우겠는가. 그러나!”
송자다운 위엄을 보였다.
“일국의 대신을 어찌 매번 강제할 수 있겠는가. 결국, 같은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번에야말로 진실로 그들을 감화시켜야 할 때다. 무엇보다 너희가 문제다. 매번 내가 나서서 너희를 대변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일장 연설을 했다.
사족의 반론이나 물음은 들을 생각이 없었다.
바로 말했다.
“묻겠다.”
“이르십시오.”
“내가 누구인가?”
“예……?”
“내가 누구냐고 물었다.”
“소, 송자이십니다.”
내가 현존 유일 유학의 신이다.
“승려가 조정에 진출하는 걸 내가 반겨야 할 이유가 있는가?”
기득권.
이것이야말로 핵심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는 절대로 수면 위로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대놓고 언급하자 사족들은 다소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용기를 주기로 했다.
“부끄러워 말게.”
“…….”
“응당 나서야 할 일일세. 우리가 일군 조선이 아닌가. 그러니…….”
강한 결의를 보였다.
“물러서지 말아야 할 것이다.”
종교 전쟁의 서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