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걸었기에 제 자리였다(3)
막 도성에 당도한 처능은 당혹스러웠다.
몇 걸음을 걷기도 전에 사대부 서너 명이 앞을 막더니 공격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무슨 일로 오셨소?”
“도성에 긴히 볼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그 볼일이라는 게 대체 무엇인지 묻는 것이오.”
정말 곤혹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백주에 사대부와 문제를 일으키는 건 곤란할 수밖에 없기에 유화적으로 대응했다.
“니승들을 살피러 왔습니다.”
“됐소.”
“무슨 말씀입니까.”
“의서 필사를 이르는 말이 아니오?”
“그렇습니다.”
“언문으로 의서를 필사할 필요가 없으니 되었다는 것이오.”
“선생. 소승은 도통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찌하여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까.”
“몰라서 물으시오? 어차피 의술은 승려가 익히지 않소이까.”
“그렇습니다만.”
“승려가 언문으로 의서를 볼 것도 아닌데 뭐 하러 공들여 언문 의서를 제작하오? 이건 괜한 종이 낭비에 불과하오. 하여, 중단되었소.”
“의서 필사는 송자께서 이르신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맞소. 그런데 중단도 그 송자께서 명하신 것이외다.”
언질조차 없었던 일이다.
점차 커진 의아함은 최근 사족이 승려를 경계하는 움직임이 파다하였기에 쓴웃음으로 귀결됐다.
다만, 너무나도 당당한 이들의 태도가 영문을 알 수 없을 뿐이었다.
그런데 상황은 생각보다 엄중했다.
“승려는 용건이 없으면 도성을 출입할 수 없소. 한데, 이미 용건은 사라진 것 같으니 돌아가야 할 것이외다.”
“선생. 도성 내 승려의 출입이 허용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어명으로 말입니다.”
“허.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소이까. 용건이 있을 때만 출입하도록 변경되었소.”
“……사정은 잘 모르겠으나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소승이 도성에서 살필 일이 어찌 없겠습니까.”
“그건 우리 사정이 아니외다.”
“……선생들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도 살필 일이 어찌 없겠습니까.”
“그건 우리 사정이 아니외다.”
물러설 생각이 아예 없어 보였다.
어쩔 수 없었다.
이럴 때는 방법이 하나밖에 없었다.
“송자께서도 도성을 오면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허. 이보시오.”
“소승이 어찌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함께 가셔서 확인하면 될 일입니다.”
“승려가 과업을 맡았다고 하여 우쭐대지 마시오.”
“…….”
“그 모든 재원은 사족이 부담하니 말이외다. 결국, 우리가 집행하는 일에 승려가 거드는 것일 뿐이오.”
“…….”
말을 마친 사족들은 매섭게 노려보며 등을 돌렸다.
처능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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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흘러가듯 말을 꺼냈다.
“윤휴가 승려의 과거 응시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네.”
결국, 이것이었다.
처능은 고소를 삼켰다.
“소승은 분명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한데, 어찌 이러시는 겁니까.”
“자네가 제안을 거절하면 조정도 멈춰야 하나?”
“…….”
“의사에 반하면 추진할 수 없나? 아니라고 생각하네만.”
마치 만리장성과도 같은 송시열의 대꾸에 말문이 막혔다.
“조정에서 불교 정책을 결정할 때 미리 합의라도 보아야 하나?”
“소승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런 뜻이라고 할지라도 거기서 멈추게. 과해.”
여태 경험하지 못했던 건조한 답변이었다.
처능은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애써 말을 꺼내야 했다.
“도성의 승려 출입도 일부 제한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되었네. 설마 자네에게 동의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어찌 그런 황망한 생각을 하겠습니까.”
“한데, 왜 묻나?”
“송구합니다.”
물어볼 내용이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막상 대면하니, 세세한 정책 하나씩을 언급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무언가 거대한 틀이 있다는 걸 느낄 수밖에 없었다.
“청합니다. 방향이라도 알려주십시오.”
“자네 지금 조정의 일을 사사롭게 인연으로 알아내려고 하나?”
“…….”
“공사가 분명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군.”
정말이지 숨이 턱턱 막히는 답변만 나왔다.
그런데도 처능은 애써 숨을 내쉬었다.
도성에 진입한 이후 지금까지, 짧은 시간 경험한 정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본능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선명한 ‘척불(斥佛)’이었다.
단지 과거 응시를 둘러싼 대립이 아니라 척불 그 자체였기에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우려하여 승려의 과거 응시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거절했다.
그런데도 기어이 이리되고 말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애써 부여잡으며 물었다.
“소승이 무엇을 하면 방향을 일러주실 수 있습니까.”
“제시하게.”
“제시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지. 내어줄 수 있는 걸 제시하게.”
“늘 인쇄와 종이 생산을 이르셨습니다.”
“이미 결론이 난 일이 아니었나? 내가 왜 손해를 보지? 그리고 이미 상황은 파악했을 걸세.”
“…….”
“그 일은 무기한 연기하게. 일전에 논의한 대로 그냥 자네들이 한자로 된 의서를 보고 의술 교육하게. 백성에게 언문을 전할 일이 생기면 바닥에 적으면서 하게. 고아한 서책의 제작은 난세가 평정된 뒤에 하는 게 좋을 것 같네. 지금은 국력 낭비야. 그리고 솔직히 기근이 쉬지 않고 발생하는데 한가롭게 언문을 읽힐 백성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군.”
“아시지 않습니까. 먼저 일을 시작한 일부 군현에서는 상당수의 백성이 의술을 익히고자 나섰습니다.”
“필사한 수량이면 그들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것이네.”
이토록 중요한 사안은 이미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 되어 있었다.
처능은 어떤 늪에 빠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벗어날 방법이라고는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상대는 협상이 아니라 원하는 답을 꺼내라고 재촉하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제시하시면 따를 것입니다.”
“토끼나 닭이나…….”
“예?”
“사육 좀 하시게. 사찰에서.”
처능의 표정이 괴이하게 변했다.
“많을수록 좋을 것이네. 산 전체를 토끼가 점령해도 무방하네. 관리만 잘하시게.”
“…….”
“때가 되면 그곳을 백성에게 개방하면 될 것이야. 도살도 그들이 알아서 할 것이고.”
“…….”
“사찰이 아우르는 군현의 백성이 모두 먹을 수 있는 만큼 사육하게.”
궤를 벗어난 제시였다.
상대의 머릿속이 궁금해질 정도였다.
처능은 절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떤가? 방향을 알고 싶은가?”
“아무래도 소승이 큰 실수를 한 듯합니다.”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하지는 말게. 다시 묻지. 어떤가? 할 수 있겠나?”
“그리하겠습니다.”
송시열이 빙그레 웃었다.
“모쪼록 백성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길 바라네.”
원론적인 답변에 불과했다.
그런데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방향은 한 가지일세. 승려가 조선의 ‘위정자’가 될 수 있는 집단으로 만드는 것일세.”
선택지는 없었다.
이로써 불교계는 조정의 거대한 요구에 수시로 봉착하게 될 것이다.
그저 버텨낼 수만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처능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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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십만 토끼 사육설을 성공리에 집행했다.
생각만 해도 뿌듯했다.
싱그럽게 웃으며 등청하려고 했는데 무당파가 진법을 치고 있었다.
참으로 절륜하여 쉽사리 벗어날 수 없었기에 갇히고 말았다.
“어제 처능을 만났네.”
“특별한 내용이 있었습니까?”
“사찰마다 토끼를 사육하기로 했네.”
“예……?”
“수천 마리를 결의했으니 거는 기대가 크네.”
“토끼라니요……?”
무당파들은 눈을 껌뻑였다.
말을 이렇게 이해하지 못하다니 참으로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식용으로 사용할 생각이네.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이네.”
“…….”
“무상으로 백성에게 베풀 것이네. 이렇게까지 하는데 내가 어찌 앞만 보고 달리겠는가. 한 걸음이라도 물러서야지. 안 그런가?”
“승려의 과거 응시 상소를 모르고 도성에 진입한 듯 보였습니다.”
“그렇더군. 금시초문으로 보였네.”
“어찌 반응하였습니까.”
“이왕 이리되었으니 제대로 해보겠다며 큰 의욕을 보이더군.”
“!!!”
사족들의 얼굴에서는 순식간에 감정이 사라졌다.
다시 혈교도가 된 것이다.
나 역시 흐름에 동참하며 웃음을 싹 거뒀다.
그리고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중히 경고했네. 괜한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하지만, 그런 꿈을 꾸었다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더 강하게 본을 보여야 합니다.”
“답답하군. 지금 그런 강경책은 불가능하네.”
“어찌 그러십니까.”
“허. 지금 다들 나서서 불교를 탄압하는 건 주상 전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나?”
“…….”
“그러니 괜한 짓은 하지 말게. 내 말을 꼭 새겨야 할 것이야.”
군왕의 권위를 동원하여 압박했다.
결국, 혈교도들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진법을 풀었다.
나는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즐거운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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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한 송시열이 보이지 않자 사족들은 웅성거렸다.
“대체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군.”
“생각보다 간단할 수도 있네.”
“무슨 말인가.”
“아무리 송자라고 할지라도 이 문제를 크게 일으키는 건 정치적 부담감이 클 수밖에 없으신 걸세. 최근 사찰이 구휼에 두각을 보이고 있어서 주상께서도 내치실 수가 없으니 말이네.”
연좌하고도 남을 사안이었다.
그러나 그간 연좌를 질타해온 송시열의 엄중한 경고를 가볍게 여길 수는 없었다.
또, 송시열이 직접 전선에서 대오를 이끄니 소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판단도 있었다.
당장 승니의 의서 필사가 중단됐고, 승려의 도성 출입에 제한을 가했으니 흡족한 건 당연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지금부터 어찌 행동할 것인지를 정하는 것이었다.
그간 많은 사안을 거쳤으나 사족은 구체적인 행보를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전에 송자께서 정치적 효용성을 강조하셨네.”
“그랬지.”
“되새겨 보면 전과 달리 승려가 현실에 많이 들어온 건 사실일세. 만일 이대로 그들이 난세의 극복에 큰 보탬이 되면 어찌 되나? 승려의 활약이 거대하면 어찌 되느냐는 말일세.”
“뭐……?”
“생각해보게. 현재 우리의 모든 논의가 승려의 과거 응시에 집중된 상태일세. 달리 말하면 현재 정국에서 우리가 얻는 건 백호 선생의 상소를 밀어내는 수준이지 않은가. 한데, 이리한들 무엇이 바뀌는 것인가? 우리는 그대로인데 말일세. 원래 있던 세상이 그대로 이어지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물론, 향리와 서얼의 과거 응시 금지는 바람직하겠지만.”
“자네 말은 승려의 경우는 다를 것이라는 말인가?”
“이미 그리되고 있네. 그들은 지난 200년과는 다른 세상에 진입하고 있지 않은가. 정치적 효용성을 마음껏 과시하며 말일세. 시간이 지날수록 난세의 극복을 거치면서 존재감을 더 보일 것이네.”
말을 에둘러 하지 않았다.
이미 송시열이 정확한 본질로 불교를 밀어내야 하는 이유를 언급했기에 그러했다.
하여, 논의는 빠르고 밀도 있었다.
“이 싸움의 끝에 우리가 얻는 게 무엇일까? 아니, 이 싸움의 끝에 승려의 위치는 어디까지 뻗어 있을까?”
“되돌아보면 송자께서 명확한 정치적 처지를 밝혔으나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는 처지인 것도 사실일세.”
“물론일세. 그분이 우리를 대변하지만, 중대본의 본부장이기도 하시니 말일세.”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로 눈을 마주쳤다.
“정치적 효용성이라.”
“우리도 움직일 때가 됐네.”
“서원이 사찰보다 못할 수는 없으니 그래야겠지.”
“당연하며 가벼운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