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걸었기에 제 자리였다(4)
진법에서 벗어난 뒤 곧장 등청했다.
우선 윤휴를 찾았는데 얼굴이 밝았다.
아주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자네 즐거워 보이는군.”
“제대로 보셨습니다. 모처럼 속 시원한 상소를 올렸더니 무척이나 기쁩니다.”
“그렇지. 사람이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야지. 그래서 하는 말일세. 같이 즐거우면 얼마나 좋겠나?”
“하하하!”
“하하하!”
크게 웃기에 그냥 쳐다보며 무안할지도 모르니 같이 웃어줬다.
그런데 대뜸 먼 산을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굉장한 속도로 민망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백호. 설마 잊으셨나? 이 판은 내가 발품을 팔아서 입안한 것이네.”
“해서요?”
“나도 즐거울 권한이 있다는 뜻이 아니겠나?”
“그래요. 뭐. 좋습니다.”
“서둘러 말하게.”
“소생은 승려의 과거 응시를 법제화해낼 생각입니다.”
“진심인가?”
“물론입니다.”
원래도 그렇지만 오늘은 더 패기가 넘쳤다.
대체 이는 무슨 자신감인지 의아할 정도였다.
승려의 과거 응시를 내가 입안하긴 했으나 이건 당장 될 일이 아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현재로는 사족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을 뿐이었다.
진심으로 패기의 근거가 궁금했다.
“사찰에서 대감의 제안을 수용했다면 어찌하셨을 겁니까.”
사실 이게 원안이긴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처능이 거절하였기에 작금의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그리되었다고 한들 일단 덮었을 것이네. 주춧돌을 좀 쌓아야 하니 사족을 달래는 정치적 약조까지만 공론화했겠지.”
“그래서 무엇을 얻고자 하셨습니까.”
“내가 먼저 물었는데 되묻는 건 대체 어느 나라 법도인가? 어쨌든 승려가 관복을 입는 나라를 만들어 준다는 약조일세. 하면, 그들도 불상과 불경을 제외한 모든 걸 내놓아야지.”
“허.”
“그 정도의 노력이면 난세가 끝날 때 과거 응시를 할 주춧돌은 넉넉하게 쌓였을 것이네.”
“이런. 머리만 깎았을 뿐 승려가 아니며, 불상이 있으나 사찰이 아니게 되었겠군요.”
“가치를 지키는 건 그들의 일이 아니겠나?”
“맞는 말씀입니다.”
“게다가 다시 말해야겠나? 서론이 너무 긴데? 과거 응시를 어찌 도출할 수 있는지 물었네만.”
“어렵지 않습니다. 잡과로 시작하면 될 일입니다.”
“잡과라.”
“서얼과 향리의 과거 응시를 막게 되었습니다. 종래 그들이 주로 진출했던 영역을 몽땅 승려에게 넘긴다면 어찌 이권이 작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불교계가 받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사족 역시 제 영역은 그대로 보존하고 잡과의 주인이 바뀌는 것이니 반발이 덜할 것이고요.”
직진인 줄 알았는데 우회로가 있다.
좋다.
나쁘지 않다.
여기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기본적인 문제를 해소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한마디로 윤휴의 말은 정말 뜬구름이었다.
이를 지적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잡과라고 할지라도 승려가 조정에 등장하는 건 사실일세.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네.”
“하하하! ‘송자’께서 우리 편인데 무엇이 걱정입니까?”
“자네가 내게 의존하지는 않겠지. 설마 논리로 제압할 수 있다는 건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상황도 변했네. 이미 내가 불을 질렀으니까.”
기득권의 본능을 노골적으로 알려준 일을 자세하게 전했다.
윤휴는 실소를 머금었다.
“이건 정말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상황이군요.”
“이로써 사족은 감정을 앞세우겠지. 하지만, 행동은 제대로 할 것이라고 보네.”
“그렇겠지요. 무려 ‘송자’께서 기득권을 변호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정말로 산불을 크게 내셨군요.”
“어려운 일은 아니었네. 그러니 우리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겠나? 단지 잡과 응시만 내어준다고 하여 해결될 수 없다고 이미 말했네. 이를 답해야지?”
“간단합니다. 잡과에 응시할 승려는 환속(還俗)하면 될 일입니다.”
“뭐라……?”
“환속하면 승려가 아닙니다. 한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이 새끼 아주 미친놈이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좋은 생각이군.”
승려가 법복을 벗는 게 환속이다.
더는 불자가 아니라 평범한 백성이 되는 것이다.
양반은 아닐지라도 잡과를 치를 수 있는 ‘합법적인’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종래 조선의 법도를 전혀 손질하지 않아도 되는 방책이었다.
그들이 결의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정말 법복을 벗고자 환속하는 게 아니라 과거 응시라는 현실을 도모하기 위한 방책에 불과하다.
하여, 그들은 환속할지라도 심장은 불자다.
그야말로 묘안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불교계가 어찌 생각할지는 내가 알 필요가 없다.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조정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겠군.”
“상소를 올리면서 불이 붙었습니다. 대감께서 사족의 본능을 자극하여 산불이 발생한 것이고요. 이때 승려가 대대적으로 환속하여 잡과를 치른다면 화마가 크게 일렁일 것입니다. 하지만, 조정은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환속한 승려가 역관이 되고 의관이 되겠다는데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도 백성이니 말입니다.”
“큭. 사찰에서 이토록 치밀하게 움직인다면 사족은 크게 당황하겠군.”
“감정적으로 행동할 가능성도 있고요.”
“어떤 경우라도 나쁜 건 없겠군.”
“물론입니다.”
윤휴.
진짜 사악한 인간이었다.
크게 칭찬해줄 수밖에 없었다.
“하면, 이제 우리는 뒤로 빠져야겠군.”
“물론이지요. 한데, 향리와 서얼이 반발하긴 할 겁니다.”
“용과 호랑이가 싸우는데 그들이 어찌 개입하겠나? 구경이나 해야지.”
“그건 또 그렇지요.”
“엄두도 못 낼 것이니 아무런 걱정은 하지 말게.”
“일단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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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호언장담했다.
윤휴의 표정이 애매한 건 노파심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정말로 향리와 서얼이 ‘항의 방문’을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송자’인 내게로 말이다.
사가 앞에서 장사진을 친 그들을 보고 있노라니 오만상이 찌푸려졌다.
뭐라고 막 떠들고는 있는데 별로 듣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냥 아예 관심이 안 생겼다.
손을 간결하게 내저으며 소란을 종식했다.
한심함을 감추지 못한 눈빛으로 좌우를 쳐다봤다.
“참으로 무례하군.”
딱 한 마디를 던졌다.
분위기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얼어붙었다.
“나는 자네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
“…….”
“살길은 알아서 찾게. 왜 여기서 이러는지 모르겠군.”
“소인들보고 다 죽으라는 말씀입니까.”
“그래서 하는 말일세.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을 것인데?”
“무슨 말씀입니까.”
“앞으로는 잡과도 응시할 수 없을 것이네.”
“!!!”
“당장 이렇게 될 수는 없을 것이네. 그러나 차츰 수를 줄이겠지. 그러니 지금 빨리 돌아가서 서책을 붙잡고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말일세.”
“!!!”
뒤통수를 맞은 듯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감정 이입을 해줄 필요는 없었다.
발걸음을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소인들은 직역으로서 향리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말입니다. 한데, 어찌 이렇게 박대만 하실 수 있습니까.”
“자네 말대로 직역인데 무슨 말이 하고 싶나?”
“…….”
“자네는 백성을 역에 동원할 때 품삯을 내밀었나? 아니지 않나?”
뻔한 말을 듣고 뻔한 말을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이런 과정이 왜 필요한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차피 바뀌는 건 없을 것이기에 결론은 정해져 있는데 말이다.
“주던 녹봉도 거두어야 할 정도로 나라 사정이 엉망일세. 한데, 자네는 무엇을 바라나?”
“하, 하지만…….”
“자리를 보존할 수만 있다면 만족해야 할 시절이다.”
“그러나 소인들은 가진 걸 빼앗기는 것입니다.”
“내가 왜 신경을 써야 하나?”
“…….”
“하면, 소인들은 어찌해야 하는 겁니까?”
향리가 버벅거릴 때 서얼 중 한 명이 튀어나오듯 나서며 말했다.
그를 빤히 쳐다봤다.
눈망울이 그렁그렁한 걸 보아하니 여차하면 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홍길동의 가슴 시린 사정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다른 길을 찾아보게.”
“!!!”
“그런데 내가 왜 자네들의 인생을 걱정해줘야 하나?”
“!!!”
“나는 향리와 서얼이 아니라 나라 걱정하는 사람일세.”
너무나도 냉정하게 말했다.
“작금의 조선은 변화가 아니라 유지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러니 더는 불만을 느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애석하게도 이들에게 줄 기회는 이미 승려에게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누가 더 뛰어나느냐가 아니다.
이것이 가장 옳은 선택이기에 그러했다.
하지만 이대로 마무리하는 건 무언가 마음에 걸렸다.
나 역시 저들이 조선에서 얼마나 필요한 인재인지 알고 있었다.
이 작은 나라에서 인재 한 명이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어쩌면 저들 중 조선을 변화시킬 인물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건 개인의 일이 아니기에 이리 행동했을 뿐이다.
그러니 저들에게도 기회의 단초를 제공하는 게 옳았다.
“소란을 일으키면 서로 피곤해질 것이네.”
“어찌 이리도 가혹하십니까.”
“가혹해야 할 시기가 아니던가.”
“…….”
“잘 들어야 할 것이다.”
“일러주십시오.”
“백성은 약자이며 근본이기에 보살핀다. 그러나 너희는 약자가 아니며 근본도 아니기에 보살피지 않는다.”
“…….”
“양반과 승려는 할 수 있는 게 많고, 조선을 지탱할 수 있기에 기회를 주어진다. 그런데 너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어찌 조정의 시책이 너희를 중심으로 움직여야 하는가.”
“…….”
“너희는 다수도 아니며 세력도 없는데 말이다. 하여, 나는 너희를 바라봐야 할 이유를 전혀 찾을 수 없다.”
“…….”
차가운 말에 결국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감정을 이입하지는 않았으나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었다.
저들이 걸어가야 할 역사의 흐름을 내가 완벽하게 막아버린 것이니까.
그러나 저들도 나를 이해해야 한다.
“난세는 원래 이러한 것이다. 모르지 않을 것이다.”
지그시 쳐다봤다.
“난세는 힘이 있는 자가 대우받는다. 너희는 나를 탓하고 세상이 불합리하다고 여기지 말라.”
“…….”
“너희가 감히 송자인 내게 장사진을 치고 항의할 수 있는 건 지난 200년간 세상을 원망했던 너희 선대의 눈물이 만든 것이 아니다.”
“하면, 무엇입니까.”
“답답하군. 너희의 선대는 울기만 했을 뿐이다. 오늘의 장사진이 가능한 건 200년의 세월에서 너희가 드러날 수밖에 없었던 부족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틈으로 너희가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이 세월을 잘 새겨야 할 것이다. 그저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도모하라.”
“…….”
“모든 게 단지 부당하다고만 한다면 너희는 그 위치가 옳다. 그저 눈물만 흘리며 시절을 원망하라.”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 진심 어린 조언이었다.
더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고개를 돌렸다.
사족 몇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의 단호함에 어깨가 덩실거렸을 것이다.
뭐.
지금은 우리 편이라서 나도 대충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준비되었나?”
“그렇습니다.”
“하면, 시작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