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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192화 (192/298)

192화 걸었기에 제 자리였다(5)

사실 나도 사족이 이리 나올 줄은 미처 예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너무 바람직한 행동이었으니 보태듯 말할 수밖에 없었다.

“송자로서 자네들이 이토록 열성적인 모습을 보이니 참으로 마음이 좋군.”

“부끄럽습니다. 진작에 나서야 했는데.”

“아닐세. 딱 적기에 나선 것일세.”

나는 흐뭇하게 웃으면서 ‘우리’ 사족의 힘을 온몸으로 만끽했다.

아니, 바라봤다.

근처 사족의 사가 앞에는 정말로 엄청난 수량의 땔감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리고

“대, 대감. 소인들은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그, 그렇습니다. 혹시 죄를 지었다면 벌하시더라도 얼마 안 되는 재물은 돌려주시면 안 되는 것입니까.”

용서를 구하는 다수의 백성이 있었다.

그들이 간절한 시선이 느껴졌으나 나는 대꾸하지 않고 하늘만 바라봤다.

지금은 내가 나설 때가 아니기에 그러했다.

“그전에 너희가 지은 죄를 알아야 할 것이다.”

“벌을 받을 것입니다.”

“벌을 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죄를 알리기 위함이다.”

“그, 그리하겠습니다.”

일단 무조건 용서를 구하는 백성들이었다.

이 시절 양반의 권위가 어느 정도인지 한 번에 알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다.

물론, 이런 사소한 문제로 사족을 탓하거나 백성을 달래줄 생각은 없었다.

그냥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상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간 우리가 너희에게 위생을 알렸다.”

“그, 그렇습니다.”

“한데, 어찌하여 듣지 않는 것이냐?”

“소, 송구합니다.”

“해서, 오늘 이를 확실하게 행할 것이다.”

양측은 서로 말을 할 뿐 대화가 이뤄지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또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일이었다.

“너희의 옷과 이불 따위를 모두 뜨거운 물에 삶을 것이니 그리 알거라.”

그랬다.

땔감을 쌓아두고 백성을 집결시킨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하, 하면 소인들은 어떤 벌을 받게 되는 겁니까.”

일단 모르겠고 처벌은 뭐냐고 물어보는 백성들이었다.

참으로 민망한 순간이었다.

나는 쓰게 웃었고, 사족들은 내 눈치를 살폈다.

물론 나설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차피 나는 실질적으로 백성의 곁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저들을 통제하고 교화하는 이들은 사족들이었다.

결국, 이들의 지도력이 절실한 시절이니 말이다.

“너희는 벌을 받지 않는다.”

“저, 정말입니까?”

“몇 번을 말하는가. 그러니 앞으로 위생 수칙을 잘 준수해야 할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사족에게 말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중요한 법일세.”

“송구합니다.”

“되었네. 시간이 더 지체하지 말고 일을 진행하는 게 좋지 않겠나?”

“그리하겠습니다.”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오늘 도성에 곳곳에서 임시 세탁소가 설치되었다.

백성은 옷 따위를 옮겼고, 세탁이 끝나면 물을 버리며 부지런히 움직였다.

사족은 모든 땔감을 제공했다.

지켜보다가 등을 돌렸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감돌았다.

사족의 행위 뒤에 감춰진 중요한 본질이 입꼬리를 계속 간지럽혔다.

보이지 않는 종교전쟁이 진행될수록 서원은 존재감을 점차 상실했다.

서원의 사회적인 영향력이 감소했다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쟁점에서 벗어났다.

조정의 모든 개혁이 서원의 숨통을 겨냥하는 와중에 화제성을 상실했다는 건 결국, 전선에서 이탈했다는 걸 의미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서원은 결국 사대부의 이권을 집약한 ‘공간’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사대부가 사대부인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출사하여 입신양명하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지점을 타격하자 즉각적으로 반응이 온 것이다.

이거 생각보다 일이 너무 쉽게 풀렸다.

“때리면 때릴수록 말을 잘 듣는구나. 우리 조선의 사족들은.”

참으로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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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하고 여유롭던 스님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난세라서 그런지 최근 처능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오늘은 유독 더 그러했다.

“좋은 일을 전했는데 어찌 그러는지 모르겠군.”

“사족이 위생을 집행하는 건 좋은 일이지요. 그러나 작금의 정국은 행위에 본질이 따로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기에 무언가를 어찌 가늠해야 할지도 어려우니 어찌 근심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자네 세상을 너무 복잡하게 사는 거 아닌가?”

“송자께서 소승을 너무 괴롭히시니 이리되었을 뿐입니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너무 놀란 나머지 말이 바로 튀어나왔다.

“아니, 내가 불교의 편의를 얼마나 많이 봐줬는가. 한데 그렇게 말하니 참으로 서운하군.”

“평소 움직임이 없던 사족이었습니다. 이토록 전격적인 민생 행보를 하는 건 결국, 사찰을 견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송자께서 뜻한 바를 이루었으니 그저 감축드릴 뿐입니다.”

“이런. 설마 내가 사찰을 이용해서 사족을 압박하는 걸 눈치를 챈 건가?”

“처음부터 그리 여겼습니다. 송자께서만 그러한 게 아니라 중대본이 일제히 같은 행보를 보이지 않습니까.”

“허. 그런가?”

“예.”

“알았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한데, 어째서 뜻한 대로 움직이지 않는가.”

“…….”

“몰라서 그리 행동하는 줄 알았네만, 이러면 사정이 아예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안 그런가?”

처능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눈동자에는 번뇌가 가득했다.

짧게 고민하던 그의 입이 움직였다.

“소승을 놓아주실 생각은 없으신 겁니까.”

“없네. 그런데 잘 생각해야 할 것이네. 지금은 사족이 민생 행보의 수준이지. 그런데 말일세. 그들이 효용성을 극대화하여 그나마 불교계가 확보한 영역을 치울 수 있는 상황이 되면 어찌 될까? 미리 약조하지. 그때가 되면 자네들은 다시 산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네.”

“…….”

“그 뒤로 무슨 일이 발생할지 나는 잘 모르겠네. 그러나 사족의 의견을 내가 무시할 수는 없을 듯하군.”

“처음부터 선택지는 없었습니까.”

“없었는데 자네가 선택한 걸세. 그래서 말하지 않았는가. 모르는 줄 알았다고.”

“두렵습니다.”

“그런가?”

“과거 응시를 수용하면 사족이 어찌 나올지 가늠할 수가 없기에 그러합니다.”

“그때는 내가 자네를 두둔할 가능성은 있네. 하지만 그러지 않을 때는 나와 사족이 손을 굳건하게 잡게 되는 걸세. 조금 전에 말한 대로 말이네.”

정치적 수사를 사용하지 않는 나의 압박은 조선의 비주류 집단 수장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결국, 처능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용하겠습니다.”

“하면, 재주가 있는 승려에게 전하게.”

“물론입니다.”

“환속하여 잡과를 치르라고 말이네.”

“예……?”

“잡과에 응시하는 승려는 환속해야지. 안 그런가?”

“그,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조선의 법도에 의하면 승려는 과거에 응시할 수 없지 않은가. 아니, 법도를 떠나서 출가한 이들이 어찌 속세의 입신양명을 도모할 수 있겠는가? 이건 말이 안 되는 것일세.”

“하지만 어찌…….”

“관복 입고 사찰에 가서 절을 하면 될 일이네. 이는 막지 않을 것이야. 아. 사가에 불상을 두는 것도 가능하겠군.”

말문이 막힌 처능은 숨만 쉬었다.

숨소리가 아주 거친 것으로 볼 때 속이 썩어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대체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누군가를 품는 건 전하께서 하실 일이네.”

“…….”

“나는 조선을 쥐어 짜내는 사람일세. 이리 여기면 될 것이네.”

“그 이유를 묻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으니까.”

“…….”

자리에서 일어나며 보태듯 말했다.

“길게 보고 움직이시게. 결과적으로 손해는 아닐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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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적인 위생 수칙을 집행하는 사족들은 따로 회합했다.

직접 몸을 움직이며 일을 한 건 아니었으나 상당한 신경을 썼기에 진이 빠진 상태였다.

그런데도 쉬지 않고 회합을 가진 건 한 가지 의문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서얼이 없으면 잡과는 누가 치르나?”

바로 이 문제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서얼은 과거 응시에 점차 다가왔네. 이참에 그들의 응시 자체를 아예 불허하는 건 좋은 일이 분명하네. 그런데 잡과는 다른 일일세.”

“그렇지. 우리가 진출하지는 않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이니까.”

역관과 의관 등이 부재하면 조선은 마비될 수밖에 없었다.

모두 필요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지난 200년간 이를 담당했던 이들을 배제한다면 대안이 있어야 하는 법일세.”

“그렇지. 한데, 전혀 언급이 없으셨네.”

그들을 밀어내기만 한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

묘한 침묵이 이어졌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괴이한 상상력이 똬리를 틀었다.

“혹시 승려가 잡과에 응시하는 건 아닐까?”

“괜한 말은 집어넣게. 송자께서는 승려가 관복을 입는 것 자체를 경멸하셨네. 그리고 잊으셨나? 애초 승려의 과거 응시를 발의한 건 백호 선생이었네.”

“그러나 서얼과 향리의 과거 응시를 제한한 건 송자셨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네. 그러나 원래 정책은 집행 과정에서 세세한 내용이 정리되는 법일세. 잡과 응시에 대한 논의는 중대본에서 논의되는 게 아니겠나?”

“솔직히 말하자면 그들은 꾸준히 잡과를 치르면서 아래를 지탱하는 게 옳네.”

“내가 계속 생각해봤는데, 송자의 뜻은 달리 있는 게 아닌 듯하네.”

“무슨 말인가?”

“이런 과정 자체가 필요하신 게 아니겠는가? 그들이 더는 위를 바라보지 못하게 한 번은 강하게 짓누를 필요가 있다고 여기셨을 듯하네. 그러니 그들에게도 길을 언급하셨어. 결국은 제 위치를 각인하라는 게 아니겠는가.”

“그렇긴 하지만…….”

썩 내키지는 않지만 딱히 반론을 제기하기도 어려웠다.

또한, 모든 사족이 동의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만큼 상황이 너무 묘했기 때문이었다.

“송자께서 이르셨네. 외부의 도전이 거세더라도 내부의 역량이 튼튼하며, 우리가 공고하게 단합한다면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고 말일세. 즉, 우리가 지금 상황을 분석하기보다는 무언가를 더 하여 효용성을 확실하게 하는 게 중요하지 않겠나?”

“그 말을 옳지. 조선은 우리 사대부가 지탱하는 나라라는 걸 확실하게 각인할 필요가 있네. 그래야만 더는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지 않으니까.”

“연좌 대신 대민 행보를 강화하는 게 옳은 길이었네. 보시게. 백호 선생이 추가적인 행동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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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갈수록 치열해졌다.

물론, 나로서는 이 과정이 너무 만족스러웠기에 계속 부채질할 생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따뜻한 급보가 전해졌다.

“청 사신단이 압록강을 넘었습니다. 아. 정사는 전과 같습니다.”

내부에서 소리 없는 총성이 울리고 있는데 VIP가 오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잘 알겠네.”

“그, 그게 전부입니까?”

“음. 수령에게 일러 융숭하게 대접하라고 전하게. 전과 같은 탈은 없을 것이라는 말도 전하고.”

“안 그래도 다른 소식도 있습니다. 통관은 여전히 이일선이라고 합니다.”

“허. 그래?”

“그렇습니다. 이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뭘 어찌하나? 잘된 일인데.”

비릿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수령들에게 전하게.”

“이르십시오.”

“아주 무시하라고 하게. 아니지. 멸시하라고 전하게. 대놓고.”

자고로 군자의 복수란 백 번씩은 해야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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