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노래하라-193화 (193/298)

193화 만세 만세 만만세(1)

혹자가 그랬다.

모름지기 벗이란 언제 어디에서 만나도 반가운 것이라고 말이다.

내가 비록 성현의 반열에 올랐다고 할지라도 어찌 다름이 있겠는가.

송시열이었던 시절에 옷깃이 스친 인연이었으나 크게 반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양팔을 벌리고 환하게 웃으며 ‘벗’을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대인.”

뇌호는 나의 격한 환대에 깜짝 놀랐는지 감격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손을 살짝 내저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이토록 부끄러움이 많은 벗이라면 어찌 그냥 둘 수 있겠는가.

하여, 내가 성큼 다가가서 지기의 손을 꽉 잡으며 진심 어린 말을 꺼냈다.

“참으로 그리웠습니다.”

“허…….”

“그간 오매불망 대인만을 그리워하였습니다. 정말입니다.”

“되었소.”

뇌호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그러나 어림도 없는 일이다.

결국 수긍하듯 힘을 빼며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듣자니 조선에서 많은 일이 있었다지요?”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가장 놀라운 건 귀공이 성현의 반열에 올랐다는 것이외다.”

“대인께서 늘 소인의 소식이 귀를 기울여주시니 참으로 감읍할 따름입니다.”

“조선은 가장 중요한 제후이기에 정치 지형을 수시로 파악하고 있소.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이토록 중대한 사안은 전해질 수밖에 없소.”

“한데,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기에 대수로운 것이 아닙니다.”

“됐소. 어쨌든 공의 위치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는 건, 나로서는 참으로 반길 수밖에 없는 소식이외다.”

“대인의 승승장구가 본국에 이로운 것과 같은 이치겠지요.”

“과연 그렇소.”

뇌호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토록 벗의 승승장구를 기뻐하니 내가 어찌 미워하겠는가.

이가 보이도록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은근슬쩍 손을 빼려는 뇌호의 간절함을 용인하며 슬쩍 한 걸음 물러섰다.

가볍게 손을 움직여 자리에 앉기를 청하며 말했다.

“한데, 저자의 숨통이 아직 붙어 있을지는 몰랐습니다.”

나는 경멸을 잔뜩 담아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는 이일선을 쓱 쳐다봤다.

시선이 마주치자 가뜩이나 개똥 같은 안색은 그냥 똥이 됐다.

길거리에 자주 볼 수 있는 색이긴 했는데 별로 친근함이 생기지는 않았다.

“아.”

뇌호는 싸늘하게 웃었다.

“참으로 무도한 일을 획책했다고 들었소.”

“그렇습니다. 하마터면 대인과 한 약조가 다 엎어질 뻔했지요. 이토록 엄청난 일을 도모했는데 어찌 무탈한지 참으로 의아하기도 합니다.”

“하하하. 구태여 그리할 필요가 있겠소? 공론화하면 고작 통관 하나의 행동으로 양국의 우호에 흠집이나 생길 뿐이지요. 또한, 양국의 관계가 어찌 늘 평탄할 수가 있겠소? 나로서는 이를 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요.”

한마디로 화살받이 하나 데리고 다닌다는 의미였다.

나는 수염을 가다듬으며 포근하게 웃었다.

노회도 엄지와 검지를 비벼대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또, 귀공과 사대부들이 참으로 좋아할 것 같았소. 과연 여기까지 오는 동안 군현의 수령들이 참으로 환대하였소.”

“하하하. 이토록 큰 성의를 어찌 받을 수만 있겠습니까. 최선을 다하도록 하지요.”

“해서 하는 말이외다.”

“혹시 중요 사안이 있습니까?”

“황상께서 어업 협정을 윤허하셨소.”

“만세 만세 만만세.”

“…….”

적당하게 제스처를 취하면서 만세 삼창을 읊었다.

뇌호의 황당한 표정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한데, 모두 가져갈 수는 없을 듯하오.”

“쉽게 말해서 어장세를 내어야 한다는 것이군요.”

“그렇소.”

“충심을 보이고자 군영 해산까지 했는데 무엇을 더 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세상사가 다 그런 게 아니겠소이까. 동등한 자격이었다면 일괄 타결하였겠으나 그게 아니지 않소이까.”

“그렇지요. 한데 말입니다. 조선이 소국이라 할지라도 사방 수천 리에 이르며 백성의 수가 수백만 명입니다. 그러한데 나라를 지키는 병력이 1만입니다. 이보다 더한 충심이 어디 있겠습니까.”

“듣기에 따라서 황명에 불만을 표하는 것 같소만?”

“별개의 일입니다. 소국이기에 따르겠으나 어찌 속앓이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리고 애당초 우리 사이에 이 정도 말도 못 합니까? 참으로 서운합니다.”

나의 진심이 통했는지 뇌호의 눈동자는 크게 흔들렸다.

손가락까지 파르르 떨리는 걸 보아하니 격하게 동의하는 게 분명했다.

한숨을 푹 쉬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

“…….”

이일선과 시선이 마주쳤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뭘 보나?”

“…….”

이런.

감히 대꾸도 하지 않는다.

“허. 대인. 저자가 이토록 무도한데 어찌 참을 수 있겠습니까.”

“……..”

“비록 성현의 반열에 올랐으나 송시열의 옹졸함과 졸렬함이 남아 있으니 어찌 마음에 담아두지 않겠습니까.”

“……..”

“답답하여 하늘이나 쳐다보러 가야겠습니다.”

“……이보시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도 안 돌아보고 걸었다.

다 이일선 때문이었다.

-----

윤선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으면서 곤혹스럽다는 듯 말했다.

“대인. 어쩌자고 이일선의 패악질을 방치했습니까.”

“……예판. 내가 혹시 모를 미연의 사태를 대비하여 저자를 데려온 건 사실이오. 한데, 이건 아니지 않소이까. 정말 밑도 끝도 없었소.”

“소인이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송자’가 대로하였으니 일이 쉽지만은 않을 듯합니다.”

“송자…….”

“전하께서도 그리 이르시니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송시열의 권위가 상상 이상이었다.

뇌호는 눈을 부라리며 이일선을 노려봤다.

“네놈은 쥐 죽은 듯 있어야 했다. 어쩌자고 눈을 마주쳤단 말이냐.”

“소, 송구합니다. 소인은 그저…….”

“닥쳐라! 네놈의 경솔한 행동으로 황상께서 내리신 황명에 누가 된다면 사지를 찢을 것이다.”

“대, 대인.”

“대인. 고정하십시오. 고작 이일선 따위로 어찌 황상께 누가 되겠습니까.”

“답답해서 그러오. 답답해서.”

결국, 이일선은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뇌호는 수염을 한 가닥 잡으면서 입꼬리를 살짝 움직였다.

“불평불만은 충분히 토로했다고 생각하오만.”

“대인의 넓은 아량에 감격할 뿐입니다.”

“아니외다. 조선이 이 일에 얼마나 큰 기대를 했는지 잘 아오.”

“재차 너그러움에 감격할 뿐입니다.”

“황상께서는 5할을 이르셨소.”

“5할이라.”

“나 역시 방도가 없었소.”

“하지만, 5할이라면 구휼미 10만 석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어찌 모르겠소. 그러나 본국 어민의 불만도 무시할 수는 없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윤선거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내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슬쩍 돌렸다.

“한데, 이일선은 어찌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물러났단 말입니까.”

“허. 그랬단 말이오? 참으로 무도한 인사요.”

“소인은 이를 그냥 넘길 수 없습니다.”

“그래야지요. 응당 그래야지요.”

윤선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장 이일선의 뒤를 쫓았다.

뇌호는 지켜만 볼 뿐이었다.

-----

이연이 또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 역시 빤히 쳐다봤다.

“설마 황제가 이리 나올 줄은 몰랐소.”

“그렇사옵니다.”

“현실적으로 이를 어찌할 방법은 없소.”

“그렇긴 하옵니다.”

“황제가 5할을 내놓으라면 그리해야 할 것이고, 9할을 말해도 그리해야 하오.”

이연의 말은 조선이 당면한 냉정한 현실이었다.

제후에 불과한 조선이 속 시원하게 말이라도 보탤 수 있는 최대 한계치는 정사 뇌호였다.

고작 여기까지도 조선이 온 힘을 쥐어짜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뤄낸 성과였다.

애석하게도 황제의 황명이라는 건 조선이 국운을 걸고 전쟁을 불사하지 않는 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니, 그러한들 바뀌는 건 없다.

청국과 전쟁이라는 건 파멸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백 보 양보해서 ‘반발’이라는 걸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아니었다.

자고로 반발해서 될 일이 있고, 안 될 일이 있는 법이다.

황제가 제 나라 바다의 이용세를 요구하는데, 내지 않을 방법은 애초 존재하지 않았다.

“전하. 정사 뇌호도 이 사실을 모르지 않기에 그저 적당하게 장단을 맞추는 것에 불과하옵니다. 어차피 황명은 관철될 것이니 말이옵니다. 그러나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누차 말했으나 협상은 불가하오.”

“신이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작금의 정국은 전과 사정이 너무 다르옵니다.”

“그렇소. 협상에 성공하는 건 황명의 후퇴를 의미하오. 우리가 성과를 거둘지라도 뇌호의 청국 내 입지에 손상이 갈 것인데, 우려하지 않을 수는 없소.”

“그러하옵니다. 뇌호는 대청 외교의 최대 성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니 말이옵니다. 하오나 전하. 협상에 임하는 순간 황명의 수정이 발생할 수밖에 없사옵니다. 어찌 조선의 승리와 뇌호의 정치적 입지가 양립할 수 있겠사옵니까.”

뇌호라는 개인을 위해서 조선의 국익을 손해를 볼 수는 없다.

그런데 지금은 뇌호를 지키는 게 조선의 국익이었다.

그래서 협상의 여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백 보 양보하여 뇌호를 설득한다고 할지라도 청 황제가 어찌 나올지 가늠할 수 없다.

만일 노발대발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조선의 처지는 곤궁해질 것이다.

기근 대비를 하다 말고 황제의 바지를 부여잡고 대성통곡이나 해야 할 것이니 말이다.

“예조판서의 말에 의하면 황제가 5할을 일렀다고 하오.”

“그러하옵니다. 참으로 고약한 일이 아닐 수 없사옵니다.”

“수용해야겠지요.”

“물론이옵니다. 하오나, 황제는 더 많은 양보를 하게 될 것이옵니다.”

“자신 있소?”

“물론이옵니다.”

조선은 청 황제와 싸울 수 없다.

그러나 청 황제의 심장을 움직이게 할 방법은 있었다.

오랑캐 혹은 주적에 불과했던 만주족이다.

그들은 알고 있다.

조선은 진심으로 청국을 섬기지 않는다는 걸.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가…….”

진심으로 섬기고 있다는 걸 보여주면 된다.

“만력제를 섬기듯 청 황제를 바라본다면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청 황제의 심장을 움직일 방법.

그것은 바로 충심(忠心)이었다.

“재조지은(再造之恩)의 영광, 이보다 더 매력적인 조건은 없을 것이옵니다.”

“물론이오. 저들은 거절할 수 없소.”

“그렇사옵니다. 전하께서 청 황제에게 기회를 내리시는 것이니 감히 거역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발상을 바꿔야 했다.

오랑캐에 불과한 만주족에게 조선이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재조지은을 베풀 수 있는 은혜를 말이다.

이렇게 접근해야만 우리에게 승산이 있다.

“우리 내부의 반발이 있을 것이외다.”

“전하. 신이 그동안 걸어온 길이 있사옵니다. 작은 반발을 두려워했다면 도모할 수도 없는 일이옵니다.”

빙그레 웃으며 보탰다.

“이미 조선의 내부는 사대부만이 있는 것이 아니지 않사옵니까.”

“좋소.”

“하여, 청하옵니다. 출병을 명하여 주시옵소서.”

“윤허하오.”

“하면, 시작하겠사옵니다.”

시작은 송준길이었다.

참으로 오래 준비했다.

그러니 부족함은 없을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