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만세 만세 만만세(3)
과거는 지나간 시간이 아니었다.
사람의 뇌리를 지배하는 강렬한 기억이었다.
때로는 사지를 묶어버리는 위력을 낼 수도 있었다.
지금 뇌호가 그랬다.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조선 사대부의 괴기한 외침을.
-만동묘의 건립을 윤허하여주시옵소서!
-목을 자를지언정 변발은 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목을 치십시오!
-소중화를 천명하소서!
-사직을 윤허하여주시옵소서!
그리고
-쾅!
일만 개의 도끼가 떠올랐다.
아무리 송시열과 의기투합하고 조선 조정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더라도, 이미 발생하였던 사실은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결과 머릿속을 지배하는 건 하나였다.
누군가 자신을 보기 전에 이 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국의 사신으로서 연좌를 두려워한다는 걸 절대 들킬 수 없었다.
몸을 돌려 떠나려고 할 때였다.
“친명을 입으로 내뱉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품고 있었을 뿐인데 어찌 이리 탄압하실 수 있습니까!”
기어이 시작됐고, 듣고야 말았다.
대청의 사신으로서 준엄하게 꾸짖어야 할 내용이었으나 감히 나설 수가 없었다.
뇌호의 이마에는 구슬땀이 굵고 진하게 흘렀다.
얼굴은 사색이 됐다.
정처 없이 움직이던 손가락은 옷소매만 겨우 붙잡았다.
다리가 굳어 발걸음은 그대로 멈췄다.
그래서일까?
자세가 참으로 희한했다.
몸이 반은 돌려진 상태에서 가만히 서 있는 모양새였으니 말이다.
이를 뇌호도 뒤늦게 깨달았으나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남아서 대국의 사신으로서 위엄을 보여야 한다는 이성과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과거의 요구가 끝없는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나리들은 어찌하여 백성들 생각은 하지 않으십니까.”
갑자기 수십 명의 상인이 등장했다.
제법 화려한 복색을 보아하니 평범한 상인은 아닌 게 분명했다.
“너희가 무엇인데 감히 관리의 행사에 끼어드는가? 경을 치고 싶지 않으면 썩 물러가라!”
관리가 삿대질하며 불쾌함을 표출했다.
“소인들도 다 알고 있습니다.”
“하! 감히 상인이 조정의 일에 개입하는 것이냐?”
“적어도 소인들은 소싯적에 뛰어놀던 개울가를 떠올리며 현실을 망치지는 않습니다.”
“뭐, 뭐라?”
“명나라가 대체 언제 적 명나라입니까?”
“!!!”
“왜 나리들은 멀쩡한 청나라를 배척하고 친명을 외칩니까? 그 덕에 백성이 죽어 나간다는 걸 모릅니까?”
“감히!”
상인들은 몇 배나 많은 관리의 수에 주눅 들지 않고 핏대까지 세웠다.
아니, 애초에 수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양반 한 명이 수백 명의 상인을 힐난할 수 있는 게 이 시절 조선이었으니 말이다.
“소인들이 정녕 모를 줄 아십니까? 무지하지만, 알 건 다 알고 있습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도다. 네놈의 이름이 무엇이냐?”
“이름은 말할 수 없지만, 나리들 때문에 우리 어선이 어획량의 5할을 청에 바쳐야 한다는 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디서 낭설을 퍼트리느냐!”
“낭설이 아니라 사실이지요! 장차 우리는 청국과 무역도 해야 합니다. 한데, 시작이 이토록 엄중하면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
뇌호는 눈을 껌뻑였다.
손등으로 눈을 몇 번이나 비볐을 정도였다.
그만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연스레 몸이 다투는 무리를 향해서 돌아섰다.
그냥 본능이었다.
그런데 눈에 띄는 무리가 있었다.
세상은 저런 이들을 향해서 승려라고 했다.
수는 10여 명이었다.
“갑자기 승려가 이곳은 어찌 오셨습니까?”
다투던 와중에 상인 중 누군가가 물었다.
그런데 답변이 참으로 괴이했다.
“소승…… 아니, 소생들은 환속했습니다.”
“허. 환속이라니요? 이토록 많은 승려가 한꺼번에요? 대관절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러합니까?”
“장차 과거를 치를 것이니 응당 그리해야지요.”
“뭐라!”
그 말에 평소보다 여유롭게 관전하던 사족들이 대경실색하며 끼어들었다.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황급하게 난입하는 모습에서는 어떠한 위엄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황망한 노여움이 표출되었을 뿐이었다.
“엄연히 법도가 있는데 승려가 어찌 과거를 치른단 말이오!”
“소생들은 환속하였으니 승려가 아닙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시오!”
“조선은 꾸준하게 환속을 권유하거나 정책으로 강제하였습니다. 이는 환속하면 더는 불자가 아니라는 걸 법도로 규정하였기 때문이지요. 한데, 선생께서는 이러한 법도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이라고 주장하신 겁니다.”
“어디서 감히 법도를 운운하시오!”
“한데, 왜 이리 화를 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소생들은 잡과를 치를 겁니다.”
그때였다.
“갈!”
어두운 표정으로 관전하던 서얼 두세 명이 난입했다.
“잡과라니? 어찌 승려가 잡과를 탐하오?”
“다시 말씀드리지요. 소승이 아니라 소생입니다. 이미 승려가 아니지요.”
“내 말은 똑바로 들으세요.”
“그리고 잡과는 천민이 아니라면 누구나 치를 수 있습니다. 소생의 말이 틀렸습니까?”
“그, 그건…….”
순식간에 논제가 바뀌었다.
친명과 친청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뇌호는 이마에 흐르던 땀을 소매로 닦았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기 때문이었다.
“잡과라고 할지라도 엄연히 과거인데 어찌 승려가 탐할 수 있겠소이까.”
“선생께서 나서실 일은 아니지요. 조정에서 결정하실 건데. 애초 선생께서는 조정의 관원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저 사족에 불과하지요.”
“하면, 나는 나서도 되겠군. 관복을 입고 있으니 말이외다.”
사족의 지적에 승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하니 관리가 나섰다.
그러자 승려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늘 소생이 나리들의 연좌를 보며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친명을 품은 건 죄가 아니지요.”
“음…….”
“소생들은 나리들께 크게 배울 것입니다. 어차피 이미 불자가 아니고 장차 유자가 될 것이니 말입니다.”
“허. 잡과를 치른다더니 유자를 운운하시오!”
“선생들은 좀 빠지십시오.”
관리, 상인, 승려, 사족, 서얼.
5개의 세력이 핏대를 세우며 떠들었다.
질서라고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중심에서 잠시 밀려났던 상인 중 한 명과 시선이 마주쳤다.
뇌호는 움찔했다.
어떤 행동을 하기도 전이었다.
“대인께서 우리를 보고 계신다!”
“아니!”
“대인께서 우리를 보고 계셨다!”
그리고
“대국의 사신이라는 분이 어찌……!”
“참으로 황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그리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 아니라 아직 속세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의술을 익히셨을 것입니다. 아니, 저분이 대국의 사신이었군요.”
일제히 시선이 집중됐다.
뇌호는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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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마를 짚으며 미간을 최대한 찌푸렸다.
나는 딱한 눈으로 뇌호를 쳐다봤다.
복잡하게 이리저리 움직이는 눈동자가 보였다.
“어찌하여 그토록 약한 모습을 보이셨습니까.”
“야, 약한 모습이라니요! 누가 그랬다는 것이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있습니다.”
“대체 무슨 말인지 나는 모르겠소!”
뇌호의 목소리는 격앙된 상태였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보아하니 정말 애석할 뿐이었다.
다시 크게 한숨을 쉬며 손을 허공에서 몇 번이나 움직였다.
“대인께서 육조 거리를 도망치듯 빠져나왔다는 소문이 도성을 뒤덮고 있습니다.”
“누, 누가 도망을 쳤다는 말이오?!”
“도망을 치셨다는 게 아니라 도망치‘듯’ 하셨다는 겁니다.”
“하!”
“조만간 조선 8도 전역에 알려질 것입니다.”
“이보시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압록강을 도하(渡河)하여 요동을 넘어 황도까지 전해질 분위기인데 어찌 우려하지 않겠습니까.”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뇌호는 거칠게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떨림을 숨기고자 주먹까지 꽉 쥐는 걸 보니, 제대로 식겁한 게 분명했다.
나는 거세게 치밀어 오르는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박장대소를 할 수는 없기에 자연스레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먼 산을 향하는 시선 처리도 당연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웃음을 집어넣었다.
미세하게 새어 나오기는 했으나 이건 내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쨌거나 누가 봐도 고뇌하는 현존 유일 성현의 모습을 훌륭하게 연출했다.
웃음이 진정되자 낮게 한숨을 쉬며 뇌호를 쳐다봤다.
묘하게 가늘어진 눈으로 나를 빤히 보고 있었으나 크게 우려할 필요는 없었다.
여전히 손가락도 아름답게 리듬을 타며 떨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때 대인께서는 아직도 망령되게 친명을 부르짖는 관리와 승려를 준엄하게 꾸짖으셨어야 합니다.”
“그, 그건 조선의 일이니 내가 섣불리 나서기 어려웠소. 이것이 전부요. 확실하오.”
웃기시네.
저번에는 미친놈처럼 덤볐으면서.
계속 내게 웃음을 주려는 노력이 가상해서 달래듯 말했다.
“이미 전말(顚末)을 다 말씀드렸습니다. 사헌부에서 친명 인사를 대상으로 한 인적 청산을 진행하고 있다고요. 현재 그들은 물러설 곳이 없습니다. 지금 이 시국에 연좌를 감행한 건 결국 대인을 기세로 어찌하려는 어설픈 시도에 불과했습니다.”
“…….”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냥 대충 화만 내셨어도 되었을 건데, 그리 도망치‘듯’ 몸을 감추셨습니다.”
“이보시오.”
“덕분에 그들이 기세를 올리게 되었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기세라고 하셨소……?”
“지난 협상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지 않겠습니까.”
“!!!”
뇌호의 입술이 파래졌다.
안쓰러울 정도였다.
우리 뇌호, 아주 무서웠구나.
무릎 위로 내린 오른손의 검지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적당하게 다섯 번 정도 반복한 뒤 말했다.
“소인이 미리 사헌부의 움직임을 말씀드린 건 이런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한데, 이토록 큰 변수가 생겼으니 어찌해야 할지 가늠도 할 수가 없습니다.”
“…….”
“혹시 대인께서 묘안이 있으십니까?”
“…….”
대꾸 없는 뇌호의 입술은 파르르 떨렸다.
이마에서 구슬구슬 피어나는 땀방울이 길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소.”
“예. 소인도 크게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황명이 완벽하게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허.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소인도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조선의 내정이 이토록 어지러운데 어찌 황상 폐하께서 황은을 베풀 수 있겠소.”
그래.
궁지에 몰리니 결국 황제의 위력에 기대야겠지.
한숨이 나올 정도로 비루하고 뻔한 전개였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수습해야만 서로가 좋은 결말을 맞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수습할 수 있겠소?”
“이미 불은 붙었습니다. 불길을 어찌 막겠습니까. 그저 산을 태우지 않기만을 바라며 대비할 뿐이지요.”
딱 맞춰서 문이 열렸다.
다급한 기색의 관리가 황망한 모션을 취하면서 들어왔다.
나는 적당하게 위엄을 보이면서 말했다.
“무슨 일인가. 심지어 대국의 정사와 함께한 자리인데 이토록 경망스럽다니.”
“그, 그것이…… 큰일 났습니다.”
불안함이 엄습했는지 뇌호의 안색은 개똥이 됐다.
미치겠다.
정말로.
웃음이 나와서.
그러나 나는 해냈다.
기어이 웃음을 참아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