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노래하라-196화 (196/298)

196화 장기판(1)

퀭한 눈을 한 뇌호는 연신 한숨을 쉬었다.

오른손이 힘겹게 지끈거리는 머리를 지탱했다.

왼손을 꽉 쥐면서 읊조리듯 말했다.

“이 나라는 연좌하지 못해서 죽은 귀신이 있는 게 확실하다.”

진하게 흐를 만큼 진심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머릿속은 송시열과 관리의 대화로 가득했다.

-기호 지역의 사족이 대대적으로 상소를 올렸습니다.

-아니, 기호 지역이라면 유일 성현인 송자를 모시는 지역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들이 대체 무슨 사유로 상소를 올렸나.

-통관 이일선이 문제였습니다.

-허. 고작 그런 일로 대대적인 상소를 올린단 말인가. 따로 불러서 혼을 내면 될 것인데.

-처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일선은 극형에 처해야 마땅한 인물이긴 하다. 하지만, 그 역시 황상의 신하인데 어찌 우리가 처벌할 수 있나?

-송구합니다.

-자네가 왜 송구하나?

-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본능에 충실하였을 뿐입니다.

-이런.

복기하면 할수록 어처구니가 없었다.

무엇보다 마지막이 너무나도 강렬했다.

-지부상소를 할 계획인 듯합니다.

-지부상소?

-그렇습니다. 그리고 장소는 이곳입니다.

정말로 소름이 확 끼치는 내용이었다.

도끼를 들고 미친 듯이 휘두르는 정신 나간 사대부가 다시 집결한다.

바로 지척에서.

“조선의 사대부는 전생에 나무꾼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어찌 도끼를 이토록 좋아할 수 있단 말인가.”

단지 생각하였을 뿐인데 벌써 심장이 울렁거렸다.

외부에서 작은 소란만 들려도 이미 연좌가 시작된 것만 같았다.

결국,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뇌호는 진심으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문뜩 떠오른 게 있었다.

“이일선…….”

묘한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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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통을 지켜야 하는데 계속 싱글거렸다.

백주의 거리였기에 많은 백성이 쳐다봤으나 나는 웃었다.

상황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이는 나 혼자만의 감정이 아니었다.

확 더워져서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윤휴가 지척이었다.

내 눈에 담긴 그의 표정은 참으로 포근했다.

더위는 산불인데, 얼굴만 보면 모닥불이었다.

땀이 날 거 같아서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몇 걸음 옆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갑자기 윤휴의 눈이 가늘어졌다.

화들짝 놀라버렸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왜 소생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겁니까?”

“아니, 그러면 자네와 딱 붙어서 다녀야 하나? 참으로 괴이하군!”

“…….”

윤휴의 볼이 아름답게 씰룩였다.

나는 한 걸음 더 떨어져서 걸었다.

참으로 알맞은 거리였는지 온도가 딱 적정수준이었다.

“이제 편하고 좋군.”

“…….”

“한데, 자네가 지원하는 불교계가 친명 사대를 선택했더군.”

“어처구니가 없군요. ‘지원’과 ‘친명 사대’를 이렇게 사용하시는 겁니까?”

“자네가 상소를 올렸고, 그들의 말이 친명 사대일세. 너무 맞는 말인데 왜 그러나?”

“되었습니다. 그나저나 애초 이런 상황을 유도하신 거 아닙니까?”

“아닐세. 그 정도는 당사자들이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했네.”

“그렇습니까? 너무 상황이 좋게만 흘러가서 소생은 애초 정해진 일인지 알았습니다.”

“이런. 이래서 소통이 필요한 걸세. 그러고 보니 중대본에서 회의한 지가 제법 됐군.”

“늘 하고 있습니다. ‘송자’께서 공사다망하시어 불참하시는 것이지요.”

“오. 그런가?”

“소생의 말은 듣고 있습니까?”

나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윤휴의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경청하고 있으니 말해보게. 무엇인가.”

“……보십시오. 사대부가 단합하고 승려와 상단이 손을 잡는다면 전형적인 기득권과 그 외 세력의 다툼이 될 뿐입니다.”

“자고로 신구의 다툼보다 고리타분한 건 없는 법일세.”

“예. 한데, 승려가 관리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하면, 승려의 출사를 반대할 사족은 어찌하겠습니까.”

“오. 어찌하는가?”

“……왜 이러십니까? 휴. 어쨌거나 이리되었으니 사족은 제 편을 들어줄 누군가를 찾을 겁니다.”

“승려의 출사(出仕)로 가장 손해를 보는 이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서얼이겠지.”

“그렇습니다. 이제 제대로 된 대화가 이뤄지겠군요.”

“난 늘 최선을 다하여 진지했네.”

윤휴는 나와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하늘을 쳐다봤다.

그러나 입가의 웃음은 숨기지 못했다.

이는 어쩔 수 없이 흘러가는 작금의 상황이 너무나도 즐거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너무나도 뜨거웠고, 나는 더웠다.

냉큼 확인해보니 어느새 거리가 제법 좁혀진 상태였다.

절로 옆으로 몇 걸음 후다닥 옮겼다.

너무 티가 날 수밖에 없었기에 고개를 돌려 확인한 윤휴가 헛웃음을 지었으나, 일단 나는 더웠다.

“……종래 조선의 기득권은 완벽하게 분열하게 될 겁니다.”

“분열이라. 그렇지. 기득권을 가진 이는 기득권을 무너지는 걸 가장 두려워하는 법이니까.”

“하여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윤휴의 뜨거운 눈과 마주쳤다.

손바닥에 땀이 올라왔다.

“어차피 모두 장기판의 말에 불과합니다.”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었다.

진심으로 이보다 맞는 말은 없었다.

사실 현재 중대본은 조선의 프리메이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종래 조선의 성격과는 아예 다른 무수한 정책을 집행한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 육조 거리를 지배하는 모든 세력이 우리의 지도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관리와 상인은 대사헌 송준길, 승려는 나의 압박을 받았으니 말이다.

“하여, 소생은 승려의 선택도 ‘의도’하신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자네 승려가 상단과 손을 잡았으면 결과가 달라졌다고 생각하나?”

“무슨 말씀입니까. 그리되었으면 관리와 사족 그리고 서얼이 손을 잡았을 겁니다.”

“끌. 자네 진정으로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인가? 이러나저러나 장기판의 말일세.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장기판에서 벗어날 수 없네. 그러니 어디로 움직여도 한눈에 볼 수 있는데 왜 그렇게 깊이 고민해야겠나.”

“허.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윤휴를 빤히 쳐다봤다.

손을 가볍게 흩날리듯 움직이며 말했다.

“애석하게도 자네가 큰 오해를 하고 있군.”

“오해라고 하셨습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겠나?”

사가를 향해서 제스처를 취했다.

윤휴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소생의 사가입니다만.”

“그래서 물어라도 본 것일세. 내 집이었으면 그냥 들어가면 될 일이지 않은가.”

“그건 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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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 왔는데 다과상도 없다.

물 한 잔이 전부였다.

참으로 야박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빤히 쳐다봤다.

무슨 의미인지 잘 알 것인데 윤휴는 턱을 만지면서 바라만 봤다.

“참으로 서운하군. 일전에 자네가 내 사가에 왔을 때 귀한 음식을 대접했는데.”

“언제 적 이야기인지 모르겠군요.”

“참으로 몹쓸 기억력이군.”

“무엇보다 최근 손님에게 물 한 잔만 내어 오는 풍습이 번졌습니다.”

“허.”

“모두 살아 있는 성현이신 ‘송자’께서 기근을 역설하며 만드신 풍조이지요.”

“그건 모두 백성을 위한 것이지. 사대부가 불필요한 다과상이라도 치우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니 말일세. 자고로 작은 행동이 번지면 종국에는 큰 힘을 내는 법이지.”

“……예. 그래서 다과상이 없습니다.”

“못 들었나? 불필요한 다과상이라고 했네. 자고로 송자를 대접하는 다과상은 그 범주에 포함할 수 없는 법이지.”

“바쁩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시지요.”

아무런 제스처도 없이 내 시선만 바라보는 윤휴의 태도는 너무나도 단호했다.

쳐다만 봐서 더 강렬하게 단호했다.

권력에 타협하지 않는 굳은 심지에 크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네와 반계의 생각을 모르지 않네. 진실로 조선의 체질이 개선되길 바라는 것이겠지.”

“응당 그리되어야 할 일입니다. 또한, 그간 중대본이 걸어온 길이 다르지 않다고 여깁니다.”

“그렇지. 지금껏 그 길을 걸어왔네. 이를 부인할 수는 없는 법일세.”

“세종의 길과 위대한 길 그리고 사문난적은 모두 이를 위한 도구가 아니겠습니까.”

윤휴는 말과는 달리 오른손 엄지와 검지에 힘을 꽉 주고 있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정객이었기에 내 말에 담긴 묘한 뉘앙스를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양손의 손가락을 펼치며 몸을 조금 내밀었다.

“가는 방향이 옳고 그르냐는 중요한 문제일세. 그러나 핵심은 아니지. 하여, 오해라고 한 것일세. 어쩌면 착각일 수도 있네.”

“소생이 무엇을 오해하거나 착각하고 있는지 들어야 할 듯합니다.”

“나는 조선의 변화를 바란 적이 단 한 번도 없네.”

“도무지 이해할 수 없군요. 누구보다도 변화를 주도하셨습니다.”

“그 또한 부정하지 않겠네. 하지만 나는 변화를 위하여 나선 것이 아닐세. 늘 더 많은 쌀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했을 뿐이네.”

윤휴의 고개가 살짝 뒤틀렸다.

흔들리며 찌푸려지는 미간은 그의 심리 상태를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었다.

“과거 만력제를 숭배하는 무리가 있었지. 그들이 틀렸나?”

“틀렸습니다. 망령을 섬기는 게 조선의 내일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솔직하게 말해야겠군. 나는 그들이 만력제에게 제사를 지내도 된다고 생각하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만력제에게 제사를 지내고 만동묘를 건립하자고 주장할 때 곳간을 모두 다 꺼내어 바쳤다면 능히 동의했을 것이라는 말일세.”

“!!!”

“하지만 누구도 그럴 생각은 없었지. 정치 사상적 신념보다 현실의 기득권이 더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단지 연좌로 주장하였을 뿐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더군. 참으로 실망했네.”

“!!!”

“그래서 나는 과감하게 만력제를 부관참시한 것일세. 그래야 쌀이 생기니까.”

상당히 충격이었을까?

윤휴가 주먹을 꽉 쥐었다.

나는 몸을 뒤로 밀어내듯 제치며 손바닥을 내보였다.

“성균관 대성전에서 5현의 위패를 끌어 내릴 때 서원의 세력이 자기희생을 했다면 어찌 그 자리의 주인이 바뀌었겠나.”

“!!!”

“서원의 모든 재물을 구휼미로 사용할 의향이 있으니 부디 5현의 정신만을 지켜달라고 절절한 상소를 올렸다면 어찌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겠는가.”

윤휴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어쩌면 말하지 않는 게 좋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할 때가 되었다.

어째서……?

오늘 윤휴는 승리를 꾀하며 장기판을 흔들고자 했다.

장기 말이 가야 할 방향을 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너무 곤란했다.

윤휴 아니 중대본도 장기판의 말이었으니까.

그러니 장기판을 벗어나는 행위는 그만둬야 한다고.

그리고 또 말해야 했다.

나 또한 장기판의 말에 불과하다는 걸.

“내가 원하지도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 ‘송자’라는 옷을 입고 다니는 것 또한 마찬가지일세.”

잠시 천장을 바라봤다.

시선을 유지하며 보태듯 말했다.

“쌀을 확보하는 데 이 옷이 적합할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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