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장기판(2)
윤휴의 안색은 확실하게 경직됐다.
손가락부터 눈동자까지 무엇 하나 움직이는 게 없었다.
말 그대로 굳어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최근 사족이 여러 말을 하고 있네. 그러나 그들의 말을 요약하면 아주 간단하지. ‘신분제가 더 공고하고 경직되었으면 좋겠다.’ 이것일세. 옳은 말일까? 아닐세.”
윤휴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나는 물그릇을 들이켰다.
물이 참으로 시원했다.
입가를 닦으며 한마디씩 이어갔다.
“오직 혈통이 중시되었던 신라의 진골은 더 많은 가문에게 기회를 열어준 고려의 귀족이 되었네. 그리고 조선의 사대부에 이르렀네. 하면, 조선은 어떠했는가. 200년의 역사가 지금껏 이어지면서 신분제는 천천히 작게나마 완화되었네. 순수 양반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고개를 들었지.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오늘까지 이 땅의 역사가 흘러온 도도한 흐름일세. 하여, 사족의 요구는 참으로 틀린 것일세. 그런데 말일세.”
이어질 내 말을 짐작했을까?
윤휴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이러한 부분까지 보일 정도로 공간은 움직임이 없었다.
“나는 그들이 백성의 끼니를 감당하겠노라 선언하며 신분제를 숨이 막힐 정도로 강화할 의향이 있네.”
“…….”
“그러나 아무도 이렇게 선언하지는 않았네. 절대로 내어놓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만 보았을 뿐일세. 물론, 소소한 변화가 어찌 없었겠나? 곳간을 열고 무언가를 도모한 사족은 분명 존재하긴 했으니까. 그러나 이것이 조선을 뒤덮을 크기나 흐름은 아니었네.”
원리주의를 주창한 박세당은 언제부터인가 꾸준하게 사족의 곳간을 두드리고 다녔다.
내 영향력이 짙게 드리운 기호 지역의 사족은 중대본의 정책을 충실하게 집행하고 있었다.
경직된 조선에서 이만하면 엄청난 성과이긴 했다.
하지만, 한때 조정과 정면으로 충돌했던 서원의 기세를 되새기면 참으로 조족지혈이었다.
나는 이를 언급한 것이다.
“비록 쇠퇴하였으나 천년의 저력을 가진 불교일세. 나는 사찰이 백성을 품어낸다면 조정의 관리가 모두 승려 출신이어도 무관하네. 아니, 승려가 승복을 입고 궐을 돌아다녀도 아무런 상관이 없어.”
“대감!”
“왜 그러나?”
“과하십니다.”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게.”
손바닥을 튕기듯 펼쳤다.
“위정자는 백성이 선택하는 게 아닐세. 백성의 눈에 보이는 세력이 위정자가 되는 것이지.”
“허.”
“날이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기근을 감당할 수 있는 세력이 있다면 그들이 이 땅의 위정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사족이 해낸다면 그들은 200년의 역사를 이어가게 될 것이네. 승려가 감당한다면 다시 불교의 역사가 시작될 것이야. 물론…….”
손바닥을 거두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윤휴를 쳐다봤다.
“나는 그들을 위해서 사족과 싸울 생각은 없네. 또한, 사족을 위하여 승려를 척질 생각도 없네. 그저 가능성을 열어주었고, 장기판에 올려줬을 뿐이지.”
“허.”
“나는 저들 중 누가 승자라도 전혀 상관이 없네. 나의 정의는 오직 쌀을 확보하여 기근을 방비하는 것이니 말일세.”
윤휴는 이제 침묵하지 않았다.
불타오르는 기세가 증명하듯 맹렬한 물음을 던지기 시작했다.
“서얼은 어찌하여 자극한 것입니까.”
“그들의 세력이 고려할 수준이 아닌 건 사실이네. 그러나 혹시 아는가? 뭐라도 해낼 수 있을지 말일세. 나는 그들에게도 가능성을 열어준 것에 불과하네. 향리도 다르지 않네. 또한, 상단의 무리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도 마찬가지일세.”
“상인이 정사를 돌볼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어림도 없네. 그러나 그들이 언제 어찌 될지 누가 가늠할 수 있겠나? 어쩌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일세.”
“허.”
“얼토당토않다고 여기지는 말게. 나는 기근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들이 대거 등장할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것일세. 양반과 사족은 그럴 능력이 없거나 의지가 존재하지 않다는 건 이미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입증되었으니까. 물론, 여전히 그들이 가장 중요하고 가능성 있다는 건 부정하지 않네. 그래서 마지막 숨통은 끊지 않는 것이네.”
“마지막 숨통이라고 하셨습니까?”
“몰라서 묻나?”
나는 윤휴를 빤히 쳐다봤다.
정말 궁금해서였다.
그런데 선문답은 영 내키지 않아서 그냥 말했다.
“글자.”
“…….”
“혈통으로 이어지던 이 땅의 위정자가 쌓아 올린 역사는 조선의 시작과 더불어 눈에 띄게 옅어졌네. 하면, 어찌 변화되었는가? 핏줄에서 글자의 독점으로 변한 것일세. 그래서 글자를 아는 이라면 양반의 정적이 되는 세상의 가능성이 열린 것이며, 오늘에 이른 것이네. 나는 그들을 모조리 꺼낸 것이고.”
숨을 무겁게 몰아쉬면서 말했다.
“한자라는 글자가 독점하는 정치권력을 박탈한다면 세상은 더 걷잡을 수 없이 변하겠지. 오늘과 내일이 아니더라도 훗날은 필시 그리될 것이네. 그러나 나는 여기까지 손을 뻗지는 않았네. 다른 이유는 없네. 종래 이 땅을 통치해 온 무리의 저력을 알기 때문일세. 존중이 아니라 그들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것이지. 이를 알지 못하면 최후는 더 말할 필요는 없네.”
“글자의 독점을 무너뜨리는 게 가능하다고 여기십니까?”
“혼자서는 당연히 불가능하겠지. 그런데 나의 이런 발상은 양반을 제외하고는 모두 반기지 않겠나?”
“…….”
“들은 그대로일세. 나는 이미 이 땅에서 위정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세력을 소환했네. 여기에 무당도 포함되네.”
“!!!”
윤휴가 눈을 부릅떴다.
주먹까지 꽉 쥐는 걸 보아하니 많이 놀란 게 분명했다.
물론, 나 역시 무당이 위정자의 위치에 오를 수 있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 역시 필요한 무리였다.
재차 언급했다.
“나는 오직 기근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걸어갈 뿐일세. 이 모든 방향이 조선이 흘러가야 할 도도한 역사의 흐름과 전혀 반대라고 해도 무관하네.”
“하여, 모두 그저 장기판의 말에 불과한 것이군요.”
“그게 뭐 잘못된 것인가? 또한, 나 역시 그러하다고 이미 말하였네.”
어차피 윤휴는 내 말을 거스를 수 없다.
벗어나기에 이미 너무 많은 일이 진행됐다.
과감하게 뿌리칠 수도 있겠으나, 펼쳐진 장기판은 모두가 바라는 결과를 담고 있기도 하였으니 말이다.
“물론 자네와 반계가 바라는 것처럼 거대한 변혁이 이뤄지면 좋은 일이겠지. 나 역시 그 흐름을 반대하는 건 아닐세. 하지만 말이네. 쌀 100만 석과 조선의 개혁이라는 선택지가 내게 주어진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전자에 손을 뻗을 것이네.”
“…….”
“만력제를 죽인 건 쌀이 안 되기에 그러한 것일세. 그런데 만일 청나라 황제가 구휼미 천만석을 내린다면 청 태조의 위패를 서원에 모실 의향도 있네.”
“!!!”
“진실로 나는 이렇게 생각하네.”
태연하게 말하였으나 목이 따갑게 탈 것만 같았다.
물그릇을 가볍게 들어서 들이켰다.
윤휴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나를 기다리기만 했다.
물그릇을 내리며 쳐다봤는데 눈동자가 참으로 복잡해 보였다.
“내게 개혁은 한 톨의 쌀알이지, 조선의 제도를 어찌하는 게 아닐세. 그런데도 지금껏 개혁에 매진한 건 더 많은 쌀을 확보할 수 있는 방편이기 때문이었네. 그간 자네와 내가 탈이 없었던 건 결국 같은 길목에 들어선 상태였기에 그러했을 뿐일세.”
“…….”
“조선의 개혁이라는 자네의 정의가, 쌀을 확보하려는 나의 정의를 품었기에 그랬을 뿐일세.”
바꿔 말해서 누구라도 나의 정의와 일치하는 견해를 가져오거나 충분히 실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손을 잡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진심이었다.
윤휴는 여전히 말을 꺼내지 않고 고개를 올렸다.
눈을 껌뻑이지도 않고 천장만 바라봤다.
그리고
“묻습니다.”
미세하게 떨리지만 묵직한 저음이 내 귀를 울렸다.
“얼마든지.”
“하면, 작금의 혼란은 어찌하여 유도하셨습니까.”
“그들은 대청 외교의 방책일세.”
“청 사신단이 왔을 때 혼란을 유도하였습니다. 이는 청 사신을 명분으로 혼란을 최단기간에 정리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하여, 체질을 대폭 개선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그건 부수적인 효과에 불과하지.”
“대체 어찌하여 속내를 이토록 감추십니까.”
“속내를 감추지 않았네.”
“감추신 것이지요.”
“다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나 역시 자네의 의도를 짐작했을 뿐, 진실로 원하는 건 오늘에서야 들었네. 나 역시 이제 말하는 것일 뿐이네. 어쨌거나 그간 함께 걸어왔으니까.”
“…….”
윤휴가 고개를 내렸다.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다시 대화는 시작됐다.
“혼란을 유도한 건 대청 외교의 방책이 맞네. 그들의 여러 움직임은 뇌호에게 압박이 될 것이니까.”
“어찌 압박되는 것입니까.”
“조선이 친청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더 강력한 친청이 될 수도 있다.”
“…….”
“이 두 가지를 보여주는 것일세. 우리는 고작 어획량의 5할을 취하고자 그토록 노력한 게 아니며, 그 정도로 만족할 수도 없으며, 이따위 결과에 머리를 조아리는 비루한 나라가 아니라는 걸 분명하게 알리는 것일세.”
“…….”
“나는 저들의 싸움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네. 누가 승리할지라도 그냥 둘 것이네. 그 세력이 바로 조선의 위정자로 굳건하게 자리할 것이니까. 그저 이 흐름의 끝에 5할의 어획량이라는 말 같지도 않은 결과가 변하고 대청 전면 무역을 도모해낼 수 있다면 만족할 것이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대감의 말씀대로라면 패배하는 세력은 기근 극복에 동참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정쟁은 늘 정치 보복을 가져오는 법일세. 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이를 과감하게 집행할 것이네. 조선의 조정을 바라보며 명운을 걸고 싸우고 있을 걸세. 모든 걸 내어낼 각오는 하고 있어야지. 안 그런가? 아. 물론 그들은 본질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네. 알 필요도 없고, 알려줄 생각도 전혀 없네.”
장기판의 말에 불과한 이들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저 부지런히 장기판을 뛰어다니며 제 역할에 충실하면 그만이다.
나는 더 윤휴의 반응을 살피거나 고민하지도 않았다.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할 때가 됐기 때문이었다.
“자네도 자네의 길이 있을 것이네. 그러니 최선을 다하면 될 일이네.”
“허. 참으로 당혹스럽군요.”
“각자 제 역할을 하면 되는 것일세. 결과는 오직 쌀의 확보와 기근의 방비일 것이니 말일세.”
“장기판에 들어오지 않은 이가 존재하긴 합니까?”
“물론일세.”
“누굽니까.”
오른손 검지를 펼쳐 위로 뻗었다.
“주상전하.”
도전적이던 윤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알겠나?”
확실하게 말했다.
“바뀌지 않는 건 이 나라의 국호와 왕성이 유일하다는 것일세.”
우리는 언제라도 휩쓸려 갈 수 있는 장기판의 말에 불과하였다.
다시 물그릇을 들어, 남은 물을 모두 들이켰다.
제 자리에 내리면서 일어섰다.
“백호.”
입술을 잠시 들썩였다.
천천히 말을 꺼냈다.
“하고 싶은 걸 하시게. 결과는 같은 것이니까.”
다시 쐐기를 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