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만세 만세 만만세(4)
윤선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개를 한쪽으로 틀며 귀를 잡아당기는 시늉까지 했다.
“대인. 혹시 소인이 잘못 들은 것입니까?”
“이일선을 내어주겠소.”
“…….”
“예판이 당황스러운 건 충분히 알고 있소.”
“말씀 자체가 당황스러운 게 아닙니다. 애초 불가능한 일을 대단한 제안처럼 내미시니 놀라워서 그렇습니다.”
윤선거는 썩은 미소를 잠재울 수가 없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고개를 돌리며 입가를 가렸다.
하지만 뇌호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쳐다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는 건 조선만 손해이기에 고소를 삼키며 손을 내렸다.
딱 정색하며 여지를 두지 않고 말했다.
“대인. 이일선은 오직 황상 폐하의 황명으로만 벌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어찌 모르겠소? 그런데 기호 지역의 사족이 이일선의 처벌을 요구하며 지부상소를 준비한다고 들었소.”
“그렇긴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욕되어도, 이일선도 황상의 신하입니다. 그러한데 제후가 무슨 수로 처벌할 수 있습니까? 그의 목에 칼을 들이미는 건 사실상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습니다. 설마 대인께서 양국의 전쟁을 유도하시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니외다. 다시 말하면 나는 지부상소의 명분을 주고 싶지 않다는 것이오.”
이일선의 처벌이라는 건 결국 정치적 구호에 불과하다.
뇌호가 모르지 않을 건데도 이리 나오는 데에는 분명한 사유가 있을 것이다.
차분하게 수염을 가다듬던 윤선거는 핵심을 꺼내기로 했다.
“노골적으로 말씀드리지요. 기호 지역의 사족은 그저 지부상소가 하고 싶은 겁니다.”
“…….”
“무릇 연좌란 구호의 난립이 생명입니다.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일단 외치는 것이지요. 대인께서 당혹스러우실 수도 있으나, 이것이야말로 진실입니다.”
“그런데도 되게 만드는 것이 연좌가 아니겠소?”
“…….”
“이미 세상이 변했소. 과거에는 대국의 사신이 오면 내부의 혼란은 감췄으나, 작금의 조선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소. 어디 이뿐이오? 심지어 대국의 사신단에게 정치적 요구를 하고 있소. 나는 이를 놓치지 않았소.”
지금껏 조선을 거친 대국의 사신이 들으면 기겁할 정도로 전향적인 태도였다.
예조판서로서 대청 외교를 주도하는 윤선거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소인은 대인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우선 지부상소의 명분을 제거하는 것이외다.”
“대인.”
“좀 들어보시오.”
“…….”
직후 이어진 뇌호의 말은 윤선거를 진심으로 놀라게 했다.
평생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계책이었다.
정말이지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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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생각에 빠진 윤휴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일어난 뒤 사가를 나섰을 뿐이었다.
윤휴가 고민 끝에 어떤 행보를 취할지 가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미 조선은 특정 개인의 도드라지는 행동이 변수가 되기에는 너무나도 먼 길을 왔다.
변수가 되려면 최소한 ‘이연’ 정도는 되어야 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하여,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발걸음은 경쾌했고, 양팔도 살랑이듯 움직였다.
걸음이 멈춘 곳은 육조거리였다.
참으로 아름다운 종합 예술이 펼쳐지고 있었다.
“해서 영감께서는 승려의 출사를 찬성하시는 겁니까?”
“……그게 중요한가?”
“어찌 중요하지 않습니까? 조선의 근간입니다. 영감께서도 사대부이신데 어찌하여 이토록 관망만 하시는 겁니까.”
“나무 아……름답습니다. 소생들은 승려가 아닙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십시오. 머리카락이 아예 없습니다.”
“적어도 소생들은 선생들처럼 대과를 탐하지는 않습니다.”
“다 좋습니다. 청국 사신단이 친명 사대라는 말에 분노하여 칩거에 돌입했습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한다면 우리 상인의 지지를 받으실 겁니다.”
아주 난리였다.
그런데 본질에 담긴 의미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관리, 사족, 승려, 서얼, 상인은 잘 어우러져서 제 이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 자체가 종래 조선이 경험하지 못한 현상이었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신분의 위계를 비롯한 성리학적 질서가 아예 소멸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계급장 떼고 다투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 치열했다.
또,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좋다.
그래야만 지금처럼 ‘아직은’ 추상적인 언어를 넘어서 날것 그대로의 무언가가 나올 것이다.
바로 이때 나는 개입할 계획이었다.
“우암.”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윤선거였다.
그런데 낯빛이 참으로 창백했다.
마치 귀신을 본 듯한 모습이라고 할까?
“정사 뇌호가 참으로 신묘한 계책을 내었다네.”
“무슨 말인가?”
“그것이…….”
이어진 말을 듣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손바닥으로 눈가를 비볐다.
두 번, 세 번…… 몇 번을 더 비볐다.
손을 내리며 윤선거를 다시 쳐다봤다.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이일선을 던져줄 테니 지부상소를 멈춰달라더군.”
“어이가 없군. 그걸 말이라고 했다던가? 어차피 처벌하지도 못하지 않나?”
“감히 대국의 사신에게 정치적 요구를 시도한 무례함을 불문에 부치겠다더군.”
“이런. 참으로 감읍한 일이군.”
“또한, 내정의 소란함을 황제에게 전하지 않겠다는 놀라운 특혜까지 제안했네.”
“미칠 노릇이군.”
“나도 그리 생각하네.”
“음? 혹시 이게 끝인가?”
“그렇다네.”
“설마 뇌호는 이 모든 걸 계책이라고 꺼낸 것일까?”
“그는 필시 이를 인생에서 손에 꼽히는 절묘한 한 수라고 생각할 듯하네.”
“참으로 놀라운 일이군.”
너무 큰 충격에 휩싸여 하늘만 쳐다봤다.
저 넓은 하늘을 흐르는 구름은 내 마음을 알까?
“내 느낌이지만 지금 뇌호는 도끼 생각만 해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듯하네.”
귀로 들린 윤선거의 목소리에는 헛웃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시선을 내려서 쳐다봤더니 웃음을 참느라 손으로 입가를 억지로 가리고 있었다.
점잖은 사대부의 표상인 윤선거를 이 지경까지 만들었다니.
과연 대국의 사신단 정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어찌할 생각인가? 이를 마냥 거절할 수만은 없네.”
“그렇지. 뇌호는 우리에게 중요한 사람이니까.”
그런데 지부 상소를 중단시킬 수는 없다.
자고로 연좌의 마지막은 당연히 도끼가 등장해야 제맛이니 말이다.
“뭐. 어쩌겠는가. 준다는 데 거절할 이유는 없는 법일세.”
“쓸모가 있을까 싶은 걸세. 전과 달리 그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말일세. 그저 분풀이 대상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래도 주는 걸 사양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그래봤자 장기판의 말이라는 건가?”
“바로 그 말일세.”
그런데 황급히 달려오는 내관이 보였다.
정말로 다급해 보였다.
그래서 내가 친히 몇 걸음을 다가가서 물었다.
“왜 그러나?”
“정사 뇌호가 전하께 알현을 청했습니다.”
“뭐……?”
이건 또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헛웃음을 지으며 윤선거를 쳐다봤다.
그 역시 황당함을 숨기지 못했다.
“미촌. 이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이군.”
“아주 큰 변수가 아닐 수 없네.”
격하게 동의할 수밖에 없기에 그냥 웃었다.
웃음에는 여유가 흘러나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연인데 무슨 걱정을 하겠는가.
그러니 정말로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래도 한마디는 하고 싶었다.
“이건 하책이지.”
“하하하. 하책 중에서 하책이 아닐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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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은 물끄러미 쳐다봤다.
뇌호는 감히 마주할 수 없기에 시선을 내렸다.
“많이 변하셨소?”
“…….”
“일전에는 대국의 사신다운 기세로 제후를 대했던 것 같소만.”
“일찍이 소인이 큰 무례를 범했습니다.”
“말투도 공손해졌구려.”
“모두 소인의 불찰이었습니다.”
군왕을 겁박까지 했던 모습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연은 흥미롭게 쳐다보면서 손바닥을 펼쳤다.
뇌호의 시선이 꽂히자 접었다.
그의 눈동자가 껌뻑이자 다시 펼쳤다.
뇌호의 시선이 흐려지자 또 접었다.
몇 번이나 반복한 뒤 손을 거두었다.
“한데,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소?”
“전하께 긴히 청할 것이 있습니다.”
“청이라. 말해보시오.”
“연좌를 거두어주십시오.”
“불가.”
이연은 세세한 내용도 듣지 않고 거절했다.
더 들어볼 필요가 없다는 듯 양손을 깍지 끼며 말했다.
“조선은 연좌를 탄압하지 않소.”
“어찌 소인이 모르겠습니까.”
“이상하오? 조금 전 분명 연좌를 거두어달라고 하였소만?”
“전하께서 탄압하지 않으셔도 연좌를 제어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생각의 근거는 궁금하지 않으며, 가능성도 전할 수 없소. 그러나 어찌하여 본국의 연좌를 언급하는지는 들어야겠소만.”
“그건…….”
“그런데 말이외다.”
이연은 깍지를 풀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기세에 뇌호가 움찔하며 말을 멈췄다.
“대답 잘해야 할 것이오.”
“전하……?”
“어쩌면 조선의 내정에 관여했다고 판단할 수가 있으니 말이외다.”
“!!!”
고저가 없는 이연의 말에 뇌호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선택지를 좁혀주겠소. 이대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퇴궐하거나, 이왕 왔으니 말을 꺼내는 것이오. 공이 알아서 선택하시오.”
이어진 이연의 압박에 뇌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양손에 힘을 주어 의복까지 꽉 쥐었다.
그러나 선택의 시간은 절대 길 수가 없었다.
이대로 침묵하면 자연스레 축객령이 내려질 것이니 말이다.
“전하. 소인은 그저 작은 거래를 하고자 할 뿐입니다.”
“되었소. 귀국을 윤허할 테니 준비나 하시오.”
“저, 전하.”
“나는 조선의 군왕이오. 부족하여 만백성을 품지 못할 수는 있으나, 사대부의 연좌는 외압으로부터 보호해야 하오. 그러한 내가 공과 연좌의 운명을 두고 거래할 것으로 생각하셨소?”
“전하. 소인은…….”
“아. 절차를 까먹을 뻔했소. 나는 우리 백성이 목숨을 걸고 먼바다로 나가서 어획한 어류의 5할을 바치는 결과에는 동의할 수 없소.”
“!!!”
“그러나 어찌 황명을 거역하겠소? 그저 어선을 출항시키지 않을 것이니 그리 아시오.”
“전하. 어찌 이러십니까.”
황급한 뇌호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동시에 이연의 용포가 거칠게 내질러졌다.
“이 대화, 계속해야 하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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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청국 사신단의 정사라는 명함이 있어서 중간은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정말이지 최악의 결과물이었다.
아니, 고작 장기판의 말 주제에 장기판 주인과 협상하려고 한 건 대체 무슨 경우란 말인가.
쉬지 않고 한숨을 대놓고 내뱉었다.
내 한숨 소리가 퍼질 때마다 뇌호는 움찔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은 언제부터인가 그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언제부터 대국의 사신이 이렇게 소심해진 건지 의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하께서 사신단의 철수를 명하셨소. 이를 대체 어찌하면 좋겠소?”
“황명을 전달하셨습니다. 절차상 문제는 없지 않습니까.”
“정녕 이러실 것이오?”
황명은 수행하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연이 어선을 출항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건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이었으니 뇌호의 입장이 궁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우리 전하께서 하지 말라는데 말이다.
내가 쓴 미소만 지으면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뇌호는 몸이 달아올랐다.
“우리는 한배를 탔소. 내가 그동안 여러 사정을 봐준 걸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이오.”
아예 틀린 말이 아니었다.
또, 이렇게까지 하니까 마음이 약해졌다.
그런데 때마침 관리가 문을 열고 후다닥 들어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급함이 물씬 느껴졌다.
과연 뇌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황급하게 달려오는 관리는 비보(悲報)의 클리셰였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