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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200화 (200/298)

200화 만세 만세 만만세(6)

뇌호의 귀국 절차가 거의 막바지였다.

그러나 다들 제 역할을 너무 열심히 해서 끓는 물의 온도는 서서히 잘 오르긴 했다.

자연스레 무르익었다.

바꿔 말해서 대미를 장식할 때가 된 것이다.

그래서 정말 바빴다.

숨 쉬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바빴다.

평소라면 느긋하게 관람하듯 움직였을 것이다.

그런데 너무 거대한 판이었기에, 무려 송자인 나조차도 장기판의 말에 불과한 상황이다.

그러니 바쁠 수밖에 없었다.

하나하나 다 결제받아야 하니 말이다.

“전하께서 산통을 다 깨실 뻔하셨사옵니다.”

“허. 하루가 다르게 놀라울 정도로 불경스럽소?”

“아니, 전하께서 뇌호의 도발을 참지 못하시어 귀국을 명하셨으니 어찌 놀랍지 않겠사옵니까.”

이연의 눈가가 가늘어지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손을 어지럽게 움직였다.

“대책도 없이 추방령을 내리신 걸 절대 부정하지 못하실 것이옵니다.”

“가장 적절한 판단을 내린 것이외다. 이를 부정한다면 경의 정치력이 부족한 것이오.”

“신이 어찌 전하의 냉철한 정치적 판단을 부정할 것이옵니까. 그저 따를 뿐이옵니다. 그런데도 상당히 상황이 급박해진 것만은 사실이옵니다. 물론, 신은 신하 된 도리를 가장 중시하기에 군주의 판단에 일단 열심히 하였사옵니다. 이 또한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오니 전하께서도 부정하실 수 없을 것이옵니다.”

찰나 나는 봤다.

이연의 손이 뭐라도 찾고자 슬쩍 움직이는 걸 말이다.

진짜 뭔가 잡히는 게 있었으면 던지고도 남을 은은한 살기까지 느껴졌다.

이리되자 내면에서 상당한 위기감이 고조됐다.

경박스럽게 움직이던 손을 재빨리 갈무리했다.

순식간에 아주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

“신은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언제라도 말만 하시오. 사약을 내려주리다. 물론, 그간의 노고를 생각해서 특별히 제조한 사약이오.”

“신은 정말 최선을 다하여 바쁘게 움직였사옵니다.”

“조정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신하가 있소? 나는 듣거나 보지 못하였소만?”

피식 웃으면서 얼마 전 이연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아주 농도가 진한 내용이었기에 몰입해서 떠올릴 수가 있었다.

*****

이연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상대는 군왕이었으나 나는 성현이었기에 피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연은 혈통으로 왕이 되었으나 나는 부단한 노력 끝에 이 자리에 올라오지 않았는가?

무엇 하나 밀릴 이유가 없었다.

“갈수록 불경하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신은 조선의 유일 성현이기에 합당한 행동을 취할 뿐이옵니다.”

“내가 얼마 전에 어의에게 어명을 하나 내렸소.”

“아니, 어의라고 하셨사옵니까?”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무나도 걱정되었기에 양손을 꽉 잡은 채로 쳐다봤다.

“최고의 예를 다한 사약 제조를 늘 준비하고 있으라고 했소.”

“…….”

“말만 하시오. 언제라도 사약을 내릴 테니까.”

“신은 괜찮사옵니다.”

“괜찮소. 겸양은 그 정도로 하시오. 나는 진심이니까.”

“신도 그러하옵니다. 진심으로 사양할 것이옵니다.”

이연의 오른손 검지가 위아래로 흥겹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 대화를 더 이어간다는 건 너무나도 불리할 수밖에 없기에 재빨리 말을 돌렸다.

“전하. 바야흐로 때가 무르익었사옵니다.”

“아. 아직 아니외다. 기다리시오.”

“아니옵니다. 하늘이 내린 적기가 분명하옵니다.”

“당연히 아니외다. 그야말로 어림도 없으니 기다리시오.”

“…….”

말문을 탁 막히게 하는 화법이 아닐 수 없었다.

우거지상을 쓰며 오른손으로 입가를 쓱 닦았다.

물론, 나의 이런 행동은 이연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었다.

“……뜻한 바를 일러주시옵소서.”

“지금껏 중대본의 개혁은 정확하게 기득권의 축소에 방점을 찍었소.”

“그러하옵니다. 기근의 방비란 사실상 쌀을 비축하는 것이 상책이기 때문이옵니다. 하여, 신이 고하였사옵니다. 지금이야말로 적기이옵니다.”

“아니외다. 오늘 다시 보니 경은 참으로 생각이 짧소.”

“…….”

“참으로 답답하오. 작금의 난세가 양반의 권한을 축소하는 수준으로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여기시오? 그들의 곳간만 열면 감당할 수 있소?”

“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사옵니다. 어림도 없사옵니다. 대체 신이 그리했사옵니까.”

“나는 참으로 고민을 많이 했소.”

“전하……?”

“그들의 무언가를 거두는 개혁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을까? 결론은 하나였소.”

“신이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조선의 모든 저력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옵니까.”

“바로 그것이었소.”

이연은 내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지금껏 우리는 상단의 재원을 활용하였소. 또한, 산속에만 있던 사찰이 현실로 내려오게 하였소. 향리와 서얼이 행동에 나설 수 있도록 자극했소. 그러나 이 또한 부족하오.”

“이미 그들은 성심껏 나서기 시작하였사옵니다. 하온데, 어찌하여 부족하다고 이르시옵니까?”

“물론 그들의 최선을 잘 알고 있소. 결과 양반은 위기감을 느꼈으며, 그 외 세력은 그 틈을 노리고자 더욱 분발하고 있소. 이는 참으로 바람직한 결과라고 할 수 있소.”

작금의 조선은 사실상 대안이라는 것이 등장했다.

물론 실제로 성장하여 세력 교체로 이어질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핵심은 기존의 위정자가 심대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무언가를 더 도모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또한, 그 외 세력도 이를 천운이라고 여기며 노력할 것이다.

이 정도면 조선의 저력을 모조리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나는 이 정도로 부족하다고 생각하오.”

“어찌하여 그렇사옵니까?”

“상단에게도 길을 내려야 할 듯하오.”

“가령 변승업을 이르시는 것이옵니까?”

“그렇소. 작금의 난세는 조선의 자력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잘 아실 것이오. 이를 감당하려면 필시 외부의 쌀을 가져와야 하오. 하여, 나는 그들에게도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을 내릴 생각이오.”

“…….”

“그러니 상단에게 ‘권세’라는 걸 작게나마 보장할 생각이외다. 나는 장담하오. 양반, 서얼, 향리, 사찰이 최선을 다하더라도 상단보다 못할 것이외다.”

대화의 농도는 숨이 막힐 만큼 진해졌다.

나는 자세를 더 바르게 고쳐 잡았다.

양손을 바닥에 닿게 하며 몸을 낮췄다.

“전하. 신은 늘 조선의 위정자는 사대부가 합당하다고 여기고 있사옵니다.”

“위정자를 교체하자는 말이 아니외다. 위정자가 될 기회를 더 넓힐 뿐이오.”

“변승업에게 큰 힘을 보장하는 건 나쁘지 않사옵니다. 힘이 있는 만큼 더 능동적으로 무역에 임할 것이며 조정과 왕실에 도움이 될 것이기에 그러하옵니다. 하오나, 조선은 엄연히 법도가 있는 나라이옵니다. 문관이 될 수 없는 이가 큰 힘을 가진다면 정치가 정도로 귀결될 수 없을 수도 있사옵니다.”

“변승업이 비선으로 남아 조정의 대신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는 것이오?”

“그러하옵니다. 어쩌면 조선이 금권에 잠식될 수가 있사옵니다.”

“그러니 비선이 아니면 되는 것이외다.”

“…….”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면 바보다.

고개를 바짝 들었다.

“전하. 설마 양반이 아닌 이에게도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내리실 것이옵니까?”

“내가 그렇게 우매하지는 않소.”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말 다행이었다.

내가 현대인이기에 민주주의를 선호하기는 한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는 현대에 국한된 이야기였다.

마찬가지로 과거 시험도 그랬다.

마음 같아서는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건 어불성설이었다.

이를 시도하려고 했다가는 조선이 사분오열 날 수가 있다.

지금껏 우리가 우위를 점하며 개혁을 도모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기근 대비라는 압도적 명분을 등에 업었기 때문이었다.

진심으로 신분제나 양반의 마지막 기득권까지 손을 대는 건 무리였다.

이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적어도 이 시절에는 말이다.

“호가호위(狐假虎威)로 하면 될 것이외다.”

힘이 확 풀릴 정도로 명쾌한 답변이었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에게 경의 권세를 빌려주면 될 일이 아니겠소?”

이리된다면 내가 살아 있는 한 변승업은 조선 최고 수준의 권세를 누릴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가 실질적으로 정치권력을 가지게 되는 건 없다.

왜……?

오직 나에게 기댄 것이기에 금권을 빌미로 조정의 비선이 될 수 없다.

또한, 고관대작이 될 수 있는 길이 막혀 있기에 직접 나설 수도 없다.

그저 지금의 위치에 그칠 뿐이다.

승려에게 과거를 운운한 것도 비슷했다.

그들 중 양반이 아니라면 문과에 응시할 수 있는 이는 없다.

오직 잡과에 국한될 뿐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밀알이긴 했다.

아니, 정확하게 밀알이었다.

“나는 조선이 작금의 난세를 극복한 뒤를 고민하고 있소.”

이것이야말로 나와 이연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보시오. 양반만의 힘이 아니라 모두가 결합하고 있소. 이는 결국, 내일의 조선이 더 많은 위정자가 될 수 있는 세력을 키워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오.”

그래서 이연은 장기판의 밖에 존재하는 것이다.

나와는 달리.

“난세가 끝난 뒤 피폐해진 조선을 일으킬 때 더 큰 힘을 발휘할 것이외다. 나는 그저 실마리만 열 뿐이오.”

*****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상념을 거두고 보니 이연의 눈이 가늘어진 상태였다.

“가끔 경은 참으로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오?”

“신이 원래 고민이 많사옵니다.”

“군왕의 하교에 답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한 일인가 보오?”

“신하의 고민을 보셨는데 어찌 이리도 야박하시옵니까?”

이연이 헛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오른팔로 몸을 지탱하며 자세를 바꿨다.

“변승업에게 내용을 전달하셨소?”

“그러하옵니다.”

“한데, 내가 생각이 좀 변했소. 조금 뒤로 미루는 게 좋을 듯하오.”

“신은 전하께서 이러실 줄 알았사옵니다.”

“그렇소? 하면, 이유를 맞춰보시겠소?”

나는 허리를 폈다.

양손을 무릎 위에 정갈하게 올렸다.

이연과 시선을 마주쳤다.

“전하. 사대부는 태생적으로 친청을 진심으로 할 수 없사옵니다. 그들이 현실의 역학관계로 청이 중원의 주인이라는 걸 인지하며 대국이자 상국으로 섬길지라도 그러하옵니다.”

“해서요?”

“가장 중요한 역할을 기호 지역의 사족에게 맡겼사옵니다. 하온데, 시일이 갈수록 신은 회의적이옵니다. 그들이 집결은 하겠으나 과연 동의하고 진심으로 따를지는 너무나도 의문이옵니다.

“그렇소. 아주 정확하오. 바로 그래서 변승업이 뇌호를 만나는 건 미뤄야 하오.”

“그러하옵니다. 뇌호의 귀국을 차단하는 건 반드시 세력이어야 하옵니다.”

“경은 어디를 떠올리시오?”

“종래 조선의 친명 사대에서 가장 자유로운 세력이면 될 것이옵니다. 혹시 어심은 다르시옵니까?”

“집행하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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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호는 황급히 움직였다.

-대, 대인. 바로 앞에서 연좌가 발생했습니다.

며칠만 지나면 귀국인데 무슨 연좌란 말인가.

대경실색하여 사실을 확인하고자 했다.

그런데 막상 나와서 확인하니 뭔가 이상했다.

“…….”

연좌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운집한 무리가 사대부가 아니라 승려였다.

심지어 수가 많지는 않았다.

십수 명에 불과했고 자리를 잡은 것이 법회의 형식이라고 여겨졌다.

내심 크게 안도하였으나 또 의아했다.

대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단 말인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몇 걸음 다가가서 말을 꺼내려고 할 때였다.

“청 태조의 사당(祠堂)을 건립하여 위패를 모시게 해주시옵소서!”

“!!!”

승려들의 외침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내용에 온몸이 굳었다.

동시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리고 머릿속은 환희가 뒤덮었다.

본능이 강렬하게 외쳤다.

이를 무조건 받아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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