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만세 만세 만만세(7)
모처럼 내 사가를 방문한 처능은 썩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심지어 파르르 떨리는 오른손으로 염주를 꽉 쥐고 있었다.
누가 보면 크게 불합리한 일을 당한 줄 여길 정도였다.
나는 너무나도 억울하여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그리고 양 손바닥을 비벼대다가 꽉 마주 잡았다.
“승려들이 놀라운 법회를 시작했더군.”
“…….”
“소식을 듣고 심장이 떨어질 뻔했네. 조선에서 청 태조의 사당을 건립하자니.”
“……소승을 이렇게 희롱하실 수는 없습니다.”
“이런. 희롱이라니?”
“기어이 이리하실 겁니까.”
“음.”
당대 최고의 고승으로 칭송받는 처능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아무래도 평정심이 크게 무너진 게 분명했다.
내가 이 정도였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이는 내 뜻이 아닐세.”
“허. 소승이 믿을 것 같습니까.”
“어명일세.”
“…….”
순식간에 처능의 떨림이 멎었다.
역시 이 시절에 정치권력보다 압도적인 건 없는 법이다.
내가 아무리 송자라고 할지라도 군왕의 그것에는 도달할 수 없었다.
“설마 내가 어명을 거짓으로 언급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네.”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다행일세.”
나는 한 손을 뻗으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이연까지 언급된 상황이었기 때문일까?
처능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낮게 한숨을 푹 쉬었다.
“소승이 해야 할 일이 있을 겁니다. 그러자면 상황을 먼저 파악해야겠지요.”
“아마 지금쯤 뇌호의 심장이 크게 떨리지 않겠나?”
“그럴 것입니다. 조선에서 청 태조의 사당을 건립하자는 말이 나왔으니 말입니다.”
“형식이 법회냐 연좌냐는 이미 중요한 게 아닐세. 주체가 승려인지 사대부인지도 중요하지 않을 것이네.”
“그렇습니다. 배후에 누가 있는지도 이미 의미가 없겠지요.”
“상황은 명확하니까.”
‘고작’ 승려의 법회였다.
사대부가 위정자인 조선에서 고작 승려 십수 명의 정치적 요구가 큰 효과를 낼 수는 없다.
그러나 이를 단지 보편적인 정치적 관점으로 접근하는 건 너무나도 우매한 일이었다.
아예 결이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게 합당했다.
“요구 자체가 조선의 조정을 흔들 수 있습니다.”
현재 승려들의 구호는 너무나도 간결했다.
[청 태조의 사당]
이는 명나라 황제 만력제를 기리겠다던 만동묘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이게 좀 억지이기도 했다.
만력제는 쌀이라도 줬는데, 청 태조는 아무것도 안 줬다.
그런데 승려들이 나선 것이니 여전히 불편함이 가득한 처능의 태도가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만일 그것을 조선에서 관철해낼 수 있다면 어찌 되겠는가.”
“청국에서 뇌호의 정치적 입지는 가히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설령 무산되더라도 손해를 보는 상황은 아닐 것이네.”
조선에서 청 태조의 사당이 언급됐다는 사실 자체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
최종 결과가 어찌 귀결될지 가늠할 수 없더라도 불씨가 지펴진 것 자체가 중요했다.
“한데, 승려들이 나섰다는 사실 자체에 의문을 가지지는 않겠습니까.”
합당한 의문이었다.
이건 누가 봐도 맥락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긴 했다.
승려가 청 태조의 제사를 지내자고 청할 이유가 아예 없지 않은가.
“자네 말이 틀린 건 아닐세. 하지만 길게 생각할 필요가 있겠는가? 현상 자체만 바라보면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을 것인데.”
“승려들의 요구가 확산하는 방향으로 행보를 취할 것이라고 예상하십니까.”
“그것일세.”
“한데, 뇌호는 조만간 귀국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랬다.
귀국은 바로 코앞으로 다가왔다.
지금도 귀국 절차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심지어 자연스레 결정된 일정도 아닙니다. 주상 전하께서 전격적인 어명을 내리시어 집행된 일입니다. 이를 뒤엎을 방법이 있겠습니까?”
황제의 대리인이라는 압도적인 권위를 내세울 수는 있으나 상대는 일국의 왕이다.
아무리 제후라고 할지라도 물러서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과거였다면 전쟁을 운운하겠으나 작금의 천하에서 이런 겁박은 통용될 수 없었다.
“게다가 승려들의 청 태조 사당 건립 요구는 빠르게 도성을 뒤덮을 것입니다. 조선이 청에 사대하는 건 진심이 아니라 현실적인 요소라는 걸 뇌호가 모르지 않을 겁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전하께서도 대로하시겠지.”
“과장을 좀 보태면 당장 내일 조선의 도성에서 쫓겨날 수 있지요. 물론, 송자께서 언급하신 대로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말입니다.”
“자네와 내가 나눈 대화를 뇌호도 생각하지 않겠나?”
“물론입니다. 앉아 있지도 못하고 부산스럽게 여기저기를 오가고 있을 겁니다.”
“바로 그럴 때 누군가가 묘안을 낸다면 어떻겠는가?”
“묘안보다는 그 누군가의 정체가 궁금하군요. 혹시 소승이 나서야 하는 것입니까.”
“하하하. 내가 어찌 자네에게 그런 일까지 부탁하겠는가?”
내가 송자의 권위로 압박하긴 하였으나 처능은 당대 최고의 고승이었다.
이런 인물이 직접 나서서 뇌호와 대사를 도모한다면 예상하지 못한 파급이 발생할 수도 있다.
가령 불교계 전체가 친청으로 매도되어 사대부로부터 대대적인 탄압을 받을 수도 있다.
이리되면 결과를 떠나서 조정 전체가 또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더는 그런 분란을 일으킬 수 없는 노릇이다.
또, 상당히 귀찮기도 하였기에 처능에게 일을 맡기는 우를 범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훠이훠이 내저었다.
“역관 변승업이 나설 것이네.”
“…….”
“그 뒤를 자네가 좀 맡아줘야겠네. 아니, 정확하게는 불교계일세.”
“또 무슨 속셈이십니까.”
이런.
당대의 고승도 삐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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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승업은 자세를 바로잡으며 뇌호를 쳐다봤다.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대인. 역관 변승업이라고 합니다.”
뇌호는 변승업을 빤히 쳐다봤다.
지금은 귀국을 미뤄야 하는 중대한 시기였다.
하지만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고 고민만 할 때 방문한 변승업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고개를 슬쩍 틀며 말했다.
“역관이 내게 만남을 청하다니 참으로 당혹스럽군.”
“긴히 드릴 말씀이 있기에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중요한 내용이어야 할 것이네.”
“실은 대인께 청이 하나 있습니다.”
“…….”
“그러자면 전제가 하나 성립되어야 합니다.”
뇌호는 코웃음을 쳤다.
감히 역관 따위가 만남을 청한 것도 어처구니가 없다.
그런데 청탁을 입에 담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전제를 운운하고 있다.
턱을 올리며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그런데
“황명을 수행하시기에 하루가 바쁘시겠으나 감히 말씀드리자면 귀국을 늦추셔야 합니다. 소인에게 방책이 있습니다.”
이건 아주 흥미로운 말이었다.
또한, 변승업의 태도도 허세가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무조건 말을 더 들어봐야 한다.
뇌호는 오른손으로 입을 가리며 코를 지탱했다.
“방책을 먼저 듣고 싶군.”
“양국의 전면 무역을 제안하시면 능히 가능하실 겁니다.”
“뭐라고 하였나?”
“사실상 양국의 국경을 허물어 상단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무역입니다.”
뇌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일전에 이일선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물론, 이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더욱 본능적인 말을 꺼냈다.
“자네가 조선 조정의 방침을 운운할 위치라고 생각하나?”
“대인. 소인은 조선 최고의 상인입니다. 무역과 관련하여서는 절대 허언을 일삼지 않습니다.”
“……해서?”
“대인께서 이를 공식적으로 언질만 해주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소인이 모두 수행할 수 있습니다.”
일의 난도에 비해서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간편했다.
뇌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손을 내렸다.
재차 본질적인 물음을 던졌다.
“조정의 누군가와 합의된 것이라면 여기까지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정식으로 논의된 것이 아니라는 걸 의미하는 것이지. 한데, 내게 이를 언급해달라? 심지어 종래 조선 조정의 방침과 전혀 다른 사안을?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군.”
“송구합니다. 하지만 대인. 소인은 자신이 있습니다. 부끄럽지만 승려의 법회도 소인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뭐……?”
찰나 뇌호의 상체가 흔들렸다.
변승업은 목을 낮추며 낮게 읊조리듯 말했다.
“대인. 소인의 자금이 뻗은 곳이 제법 됩니다. 은밀하고 진하게 말입니다.”
“…….”
“조선은 숭유억불의 나라입니다. 어찌 승려만 믿고 일을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가장 중요한 쟁점은 승려의 법회였다.
그런데 이를 뒤에서 은밀하게 주도한 사람이 바로 변승업이라는 말이었다.
또한, 더 동원할 수 있는 세력이 있다는 말은 참으로 의미심장했다.
한마디로 이번 사안이 더 거대해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전폭적인 도움을 주겠다는 말로 해석하기에는 충분했다.
한 가지 의문만 해결하면 말이다.
“어선의 출항을 거절한 이유는 무엇인가? 덕분에 내 처지가 곤란해지긴 했네만.”
“송구합니다. 그러나 소인은 역관이며 상인에 불과합니다. 황상의 대리인을 설득하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한 신분입니다. 해서, 입증한 것입니다. 소인이 조선의 방향을 틀어버릴 수 있다는 걸 말입니다.”
“허.”
“대인. 조선은 점차 변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으나 강력한 힘을 낼 수 있는 금권이 태동하는 나라가 되고 있습니다. 소인은 이를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
“대인께서 원하신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출항할 수 있습니다.”
“…….”
변승업의 제안은 절대 손해 볼 게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확실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상대가 조선 최고의 상인이니 셈이 정확할 것이니 말이다.
“내게 원하는 게 있다고 했네.”
“대인. 소인을 거두어주십시오.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거두어달라?”
“그렇습니다.”
“단지 그런 이유로만 이리 나올 수는 없다고 생각하네. 거래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소인이 실언했습니다. 사당을 건립하면 어디까지 해주실 수 있습니까.”
“뭐……?”
“소인이 먼저 이를 꺼내는 건 상인으로서는 잘못된 처사입니다. 그런데도 이리 나선 건 절박한 이유에 기인한 것이지요.”
“절박한 이유라.”
“어류를 모두 조선으로 가져올 수는 없는 것입니까.”
“…….”
“물론 사당을 먼저 건립하겠습니다.”
뇌호의 말문이 막혔다.
변승업은 양손을 모아 꽉 잡았다.
숨을 크게 내쉬면서 말했다.
“재조지은을 내려주십시오.”
“…….”
“소인이 대인의 오른팔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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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했나 보다.
아무리 궁색한 처지라고 할지라도 무려 ‘대청’ 사신단의 정사다.
제대로 된 상황이라면 조선 왕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내 사가까지 찾아왔다.
그렇다고 웃을 수는 없기에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대인께서 어찌 오셨습니까.”
“고민을 해봤소.”
“고민이라고 하셨습니까?”
“본국과 조선의 무역을 확대하면 어떻겠소?”
이런.
변승업이 일을 너무 잘한 게 분명했다.
칭찬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