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만세 만세 만만세(8)
자세를 슬쩍 고쳐 잡았다.
목도 가다듬었다.
은근슬쩍 눈썹에 살짝 힘도 줬다.
“대인. 우리 조선은 그간 중농억상의 기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모르지 않으실 겁니다. 한데, 어째서 무역의 확대를 언급하십니까.”
“해서, 내가 공을 먼저 찾은 게 아니겠소?”
“음.”
“듣자니 조선도 상업의 확대에 힘을 쓰는 것 같소만.”
몸을 낮게 내밀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하는 게 참으로 희한했다.
그나저나 이렇게까지 애를 쓰며 말하니 ‘벗’으로서 어찌 아니라고만 하겠는가.
적당하게 수염을 만지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합니다. 중농억상의 기조라고 하여 상업을 탄압하는 건 아니니 말입니다. 그러니 무역을 도모하거나 화폐를 보급하려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지요.”
뇌호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재차 변승업을 크게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속으로 생각할 뿐이었고, 나는 고개를 왼쪽으로 틀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대인. 대청 무역의 확대는 논의되지 않았으며 생각조차 하지 못한 부분입니다. 한데, 이를 갑자기 언급하신 이유라도 있습니까?”
“……다른 이유는 없소. 그저 무역이 확대된다면 양국 모두 도움이 될 것이니 제안한 것이오.”
“그렇습니까……?”
눈알을 굴리며 겸연쩍은 미소를 짓는다.
급기야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기까지 한다.
속내를 다 보일 수 없으니 나오는 행동이 분명했다.
조금 더 애를 태울까 싶었지만,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 번에 냉큼 받으면 변승업의 역할이 줄어든다.
차분하게 생각하며 오른손을 슬쩍 움직이며 바닥을 쓰다듬었다.
잠시 딴 곳을 쳐다보다가 슬며시 뇌호의 눈을 바라봤다.
“소인이 당장 어떤 답을 드릴 수는 없을 듯합니다.”
“나 역시 지금 어떤 답을 듣고자 한 건 아니었소. 그러나 시일이 촉박하니 서두르길 바라오.”
“시일이라고 하셨습니까?”
“사신단이 수일 내로 귀국길에 오르니 하는 말이외다.”
그렇지.
이것이야말로 뇌호에게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 아니겠는가.
나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전하께 대인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무슨 말이오?”
“대인이 새로운 안건을 제시하였으니 전하께서 판단을 달리하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소인이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험험. 그렇다면 경과를 지켜봐야지요.”
입이 귀에 걸리는구나.
나는 엷게 웃을 뻔하였으나 빠르게 정신 차리며 정색했다.
“한데, 소인이 여쭤볼 일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최근 승려들이 법회를 열었습니다. 아시는 게 있습니까?”
“……나는 모르는 일이외다.”
“모르실 수는 없지요. 대인의 지척에서 이뤄지는 법회이니 말입니다.”
“……당연히 보기는 했소. 그러니까 내 말은, 실체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이오.”
어느새 꼼지락거리던 뇌호의 손가락이 딱 멈췄다.
급기야 소매 안으로 슬그머니 들어갔다.
“우리 조정에서는 이 사안을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만동묘를 잊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보시오. 지금 우리 태조와 만력제를…….”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인데 성현도 모두 내쳤습니다. 누군가를 진실로 섬기는 건 우리 조종과 개국 공신으로 국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조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금 승려들의 움직임은 여러 불협화음을 만들 뿐입니다.”
“불협화음이라고 하셨소?”
“여전히 명을 섬기는 무리가 많습니다. 이들에게 빌미를 줄 수는 없습니다.”
“…….”
청 태조와 만력제를 단순 비교하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사실 비교하면 조선으로서는 무조건 만력제를 편들어야 한다.
친명 사대의 입장으로 바라볼 필요도 없다.
만력제는 조선의 은인이 분명하기에 그러했다.
뇌호 역시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이 사안은 조선의 내정이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기에 경거망동할 수 없을 것이다.
한마디를 더 보탰다.
“십수 명에 불과한 승려의 일입니다. 더 일이 커지기 전에 조정은 병력을 동원해서라도 진압할 것입니다.”
“…….”
“어쨌거나 대인께서는 무관한 일이라고 하셨으니 소인은 안심하고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무, 물론이오.”
뇌호의 눈동자가 불안한 듯 미세하게 흔들렸다.
나는 보지 못한 척 시선을 슬며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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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태조 사당 건립을 주장하는 법회의 시작은 십수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어느새 두세 배로 규모가 늘었다.
많지는 않으나 절대로 적은 수가 아니었는데도 전혀 소란스럽지 않았다.
“이미 우리의 뜻은 분명하게 전달하였소. 그러니 차분하게 자리를 지키면 될 일이외다.”
선두에 선 승려의 말은 법회의 지침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대부의 연좌처럼 쉬지 않고 구호를 외치지 않고 점차 세를 늘리는 형식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조선에서 언급조차 없었으며, 내재한 흐름도 존재하지 않은 일을 새로이 도모한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승려들의 법회가 장벽에 부딪히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도다!”
“하늘 아래 어찌 이토록 참담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나라 조선의 역사를 안다면 감히 행할 수 없는 일이거늘!”
진한 노기가 잔뜩 담긴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주인공들은 백발이 성성한 사대부들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독기까지 담겨 있었다.
수는 대여섯 명에 불과했으나 수십 명의 승려를 압도하고도 남을 기세였다.
그들은 승려를 향해 삿대질하며 눈을 부라렸다.
“너희가 무슨 자격으로 나라를 이토록 혼란스럽게 하는가.”
“산속에서 편히 불경이나 외우며 석가를 섬긴 너희가 무엇을 아는가.”
“이 나라 조선이 어떻게 여기까지 이어진 줄 아느냐?”
격앙된 사대부들의 고함이 쉬지 않고 이어졌다.
승려들은 특별한 대응을 하지 않았다.
일제히 눈을 감고 합장하며 불경을 읊조리듯 낭독했을 뿐이었다.
이런 태도는 사대부의 화를 더 부추겼다.
“당장 해산하지 못하겠느냐!”
더는 무시로 일관할 수 없다고 여겼는지 승려 중 한 명이 예를 갖추며 말했다.
“선생들께서는 어찌하여 소승들의 법회를 막으시는 겁니까.”
“갈!”
예사롭지 않은 기세였다.
“어찌 이토록 뻔뻔할 수 있단 말인가.”
“뻔뻔하다고 하셨습니까.”
“대체 너희가 무슨 자격을 가졌다고 생각하나? 그래. 최근 사찰에서 백성을 구휼하는 걸 알고 있다. 한데, 그것이 너희에게 면죄부를 주지 않는다.”
“면죄부라고 하셨습니까?”
“지금껏 백성을 보살핀 건 우리 사대부였다. 너희는 늘 방관하였을 뿐이야.”
“그간 아무런 탈이 없었다면 어찌 소승들이 사찰 밖으로 나왔겠습니까.”
“하! 참으로 궤변이로다. 그래. 옳다. 그간 사대부가 부족하였기에 늘 백성을 웃게 만들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 고난을 뚫고 여기까지 온 건 바로 우리였다. 너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선생의 말씀이야말로 모순이십니다.”
“허. 모순이라고 하였나?”
“그렇습니다. 백성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에 어찌 자격이 있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나서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그건 오직 사대부의 일이라고만 하십니다. 이는 모순이며 또 오만입니다.”
“!!!”
사대부의 기세가 날카로웠으나 승려들도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양측의 날 선 대립이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일 때였다.
젊은 사대부의 무리가 등장했다.
상당한 규모였다.
한눈에 봐도 승려들보다 많았다.
“선생. 어찌 저토록 무도한 이들과 말을 섞고 계십니까.”
“가르침을 내리고 있었네.”
“말을 들어 먹을 무리였다면 애초 이토록 허무맹랑한 짓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자네들의 생각을 말해보겠나?”
“연로하신 선생들께서는 잠시 물러나 계시겠습니까.”
모두 눈빛을 교환했다.
노인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끈적한 전운이 스멀스멀 치솟았다.
사대부들은 너무나도 호전적인 기세였다.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던 승려들은 알 수 없는 불안함이 엄습하는 걸 느꼈다.
점차 거리가 좁혀졌다.
승려들은 굳은 안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저 무도한 무리를 모조리 잡아서 도성 밖으로 던져 버리세!”
“!!!”
“!!!”
“!!!”
“!!!”
사대부들이 일제히 승려들에게 달려들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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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혈사태가 일어났다.
심지어 도성이었다.
사상 초유의 사태였기에 조정은 난리가 났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오른손으로 힘겹게 지탱했다.
“미치겠군.”
“정말 예상하지 못한 결과일세.”
윤선거의 말이 곧 나의 말이었다.
정말이지 이건 너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자네 정말로 승려 측에 ‘해산’되어야 한다고 말했나?”
“당연히 말했네.”
“아니, 정확하게 전달했느냐고 묻는 걸세.”
“허. 당연한 말일세. 그게 뭐 어렵고 복잡한 말인가?”
한숨을 푹 쉬었다.
윤선거도 덩달아 한숨을 쉬었다.
애초 계획은 사대부가 법회를 강제 해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전혀 다른 정말로 놀라운 결과가 발생했다.
승려들의 ‘형식적’인 저항에 사대부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진 것이다.
정말 형식적이었다.
승려들은 사대부가 끌고 가려고 할 때 적당하게 뿌리치는 수준으로만 대응했다.
그런데 허약하기 짝이 없는 사대부들이 이걸 감당 못 하고 피를 보고 만 것이다.
보고에 의하면 그냥 아예 도미노였다.
사대부의 수가 승려보다 두 배는 많았는데도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인 것 같기도 했다.
산에서 강인한 육체를 만든 건장한 승려의 완력을, 방구석에서 서책이나 들던 사대부가 감당하기는 어렵다.
“사족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몸을 던졌다던가?”
“미촌. 그들은 따로 지침을 내리지 않았네. 알아서 분기탱천하여 달려간 이들이니 말일세.”
“일이 아주 고약하게 흘러가겠군.”
“끙…….”
“휴. 여전히 소란스럽군.”
윤선거가 쓰게 웃으며 슬쩍 밖을 보는 시늉을 했다.
사실 지금 육조 거리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이 없었다.
조선에서 가장 행동력이 좋은 세력이 모두 모여서 ‘집회’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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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은 노발대발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도다. 도성에서 그것도 백주에 유혈사태라니!”
“……소생들은 모르는 일입니다. 한데, 애초에 사대부들이 승려를 탄압했습니다.”
“하!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해서, 사대부를 백주에 구타한 건 잘한 일이라는 건가?”
“말씀을 삼가십시오. 구타하려는 사대부를 밀어내다가 생긴 불미스러운 일에 불과했습니다. 애초에 슬쩍 밀었는데 쓰러지면서 우르르 걸려서 다 넘어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뭐, 뭐라?!”
“승려들의 죄가 아니라는 겁니다. 아니, 그냥 저항하며 가볍게 밀었는데 그리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무력으로 법회를 강제 해산시키려던 사대부의 행동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무기력하게 끝난 것이다.
이를 정확하게 꼬집은 환속 승려의 말에 사족의 얼굴은 새빨갛게 변했다.
그러나 금세 눈을 부라리며 상대의 멱살을 잡았다.
“네놈이 감히 양반을 희롱하는 것이냐.”
“……소생은 있는 사실을 전한 것입니다.”
“감히!”
사족은 온 힘을 다해서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환속 승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참으로 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