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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203화 (203/298)

203화 만세 만세 만만세(9)

또 유혈 사태였다.

이번에도 전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분기탱천한 사족이 승려의 멱살을 딱 잡았는데 가벼운 손짓에 낙엽처럼 쓰러져버린 것이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유사 이래 이토록 어처구니가 없는 사례가 있을까.

“…….”

피지컬(Physical).

고작 이따위 변수로 일국의 정책이 흔들리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다.

정말이지 그냥 말문이 탁 막혔다.

목덜미가 너무 아파서 오른손으로 눌렀다.

꽉꽉 누르다 보니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한숨도 동반되었다.

혼자 있었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욕을 꺼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나는 대단히 유명한 사람이었기에 주변은 늘 인산인해였다.

“이를 지켜만 보실 겁니까.”

저항도 하지 못하고 흠씬 두들겨 맞고 온 사족들이었다.

나는 이들을 흐린 눈으로 쳐다봤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냥 잡아서 도성 밖으로 던지기만 하면 되는데 그걸 못하고서 이러고 있다.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왔으면서 뭘 잘했다고 이러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하지만 차마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이들의 기세가 전례 없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분노의 물결이 삼천리 방방곡곡을 뒤덮었기에 그러한 것도 아니었다.

“승려가 감히 사대부의 몸에 손을 댔습니다.”

이 말이 모든 걸 함축하고 있었다.

지금은 반박의 여지조차 찾을 수 없이 ‘감히’라는 말이 사용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조선에서 다른 계층이 사대부를 ‘폭행’했다는 건 변명의 여지가 없는 중대 범죄다.

심지어 숭유 억불의 나라에서 승려가 가해자다.

또, 단순 폭행이 아니라 집단과 집단의 충돌로 생긴 상황이었다.

이건 달리 말하자면, 승려가 사대부의 권위에 각을 잡고 ‘감히’ 도전했다고 볼 수 있는 개똥 같은 말이 터져 나올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내가 송자로서 어떤 힘을 낼 수 있는 건, 적어도 이성이 남아 있을 때였다.

작금의 상황은 철저하게 감정적인 경우였다.

잘잘못을 떠나서 표면상으로는 사대부가 두들겨 맞은 건 너무나도 명백하니 말이다.

괜한 말로 진화하려다가는 조선 팔도 전역에서 들불처럼 일어날 수도 있다.

이를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인들은 이를 그냥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또 한숨만 쉬었다.

머릿속이 너무나도 복잡했다.

정말이지 가장 완벽한 판이었다.

뇌호를 교란하여 대청 전면 무역의 활로를 뚫고, 강탈하듯 내려온 5할의 어장세를 치워버리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한데, 사대부가 두들겨 맞으면서 일이 고약하게 뒤틀린 것이다.

고작 이따위 이유로 말이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내 입장에 불과했다.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였다.

단적으로 이들의 기세가 그러했다.

과거 5현의 위패를 치울 때도 이 정도로 날카롭지는 않았다.

“소생들은 이대로 두고만 보지 않을 것입니다.”

“예.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저들을 벌할 겁니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흉악한 무리입니다.”

너무 머리가 아파서 이마에 오른손을 올리며 왼손을 훠이 훠이 내저었다.

이미 개판 됐으니 하고 싶은 거 그냥 다 하라는 뜻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기도 했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사족들이 좌우로 물러났다.

화를 참지 못했는지 여전히 씩씩거리면서 깔끔하게 내가 걸어갈 길을 잘 만들었다.

동태 눈처럼 썩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걸었다.

내키지 않는 걸음이었으나 가야 했다.

이연이 나를 호출했기 때문이었다.

하.

정말 가기 싫었다.

박살 날 게 뻔해서였다.

숨통이 붙어 있으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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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이었다.

궁색한 표정으로 오직 먼 산만 쳐다보는 건 말이다.

이연의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으나 애써 모른 척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먼 산의 경치를 최대한 오래 감상하는 것이었다.

“묻겠소. 내가 나서야 하오?”

이런.

이렇게 대놓고 치고 들어오면 먼 산 관광을 멈출 수밖에 없다.

나는 재빠르게 자세를 바로잡고 몸을 숙였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황공한 말은 넣어두시오. 내가 나서야 하는 상황인지 물었소. 이를 답하시오.”

“작금의 상황이 어심을 어지럽힌 것을 부정하지 않겠사옵니다. 하오나, 전하께서 친히 나서실 필요는 전혀 없사옵니다.”

“내가 나설 필요가 없다?”

“그러하옵니다.”

“하!”

결국, 이연의 언성이 올라갔다.

내 말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는 걸 의미했다.

결국, 나는 몸을 더 낮출 수밖에 없었다.

“이 나라 조선에서 청국 태조의 사당을 건립하자고 떠들었소. 언급조차 하고 싶지 않건만 기어이 했소.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내가 윤허했소. 내가 명했소. 왜? 오직 이 나라 조선의 국익을 위해서. 한데, 일이 이토록 엉망이 되었소.”

“황공하옵니다.”

“황공?!”

“…….”

“그래요. 당연히 황공할 수 있소. 그러나 이번 사안만큼은 그 말이 나올 일이 없어야 했소만.”

“…….”

“하아…….”

변명할 부분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이 판을 움직인 건 나였다.

변수가 발생했을지라도 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건 오롯이 나의 탓이었다.

최소한 2번째 유혈 사태는 막아야 했다.

하지만, 나는 이조차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제대로 된 상황이라면 나는 거센 책임론에 휘말려야 할 정도였다.

만일, 붕당의 대립이 존재했다면 나는 최소 귀양이었다.

결국, 변명의 여지가 없는 나의 탓이었다.

“나는 숨만 쉬고 용상에 앉아서 왕권을 만끽하는 존재가 아니오.”

“신이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다시 묻겠소. 내가 나서야 하오?”

“신이 감당할 것이옵니다.”

“경은…….”

이연이 숨을 크게 마셨다.

그런데 아무런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는 노기를 참지 못하여 숨조차 멈춘 것이다.

진땀을 흘리며 자세를 더욱 낮췄다.

“작금의 상황이 얼마나 엄중한지 깨닫지 못하는 것 같소만.”

“…….”

“승려가 사대부를 구타했소.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 일이 어찌 될 것 같소? 이 땅의 사대부가 모두 도끼를 들고 도성으로 달려올 것이오. 청 태조의 사당을 건립하는 걸 반대하는 게 아니라, 불교를 개입시켜 기근을 극복하는 또 하나의 날개로 삼으려고 한 나와 중대본을 대대적으로 규탄할 것이오. 변명의 여지가 없이 그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야 하오. 이는 조선이 지금껏 걸어온 기근 방비의 길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는 것이오. 경은 이를 인지하고 있소?”

과장이 아니었다.

상황은 그 정도로 심각해지고 있었다.

청 태조의 사당은 이미 논제에서 사라졌다.

누구도 그 문제를 언급하고 있지 않았다.

사대부와 승려의 유혈 사태가 조선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조선의 기득권이었던 사족에게 작금의 사안은 역모와 비교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고개를 들었다.

이연과 눈이 마주쳤다.

크게 심호흡하며 말했다.

“신이 변명하지 않는 건 책임을 통감하고 있기에 그러한 것이옵니다. 단지 이뿐이며, 작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아니옵니다.”

“훗날 조선의 역사는 이렇게 기록될 것이오.”

“…….”

“기근이 나라를 집어삼켜 백성이 굶주리고 죽어가는데 왕과 사대부 그리고 여러 세력은 제 이권을 지키고자 다툼을 멈추지 않았다고 말이외다.”

당대를 살아가는 위정자로서 가장 두려운 건 누가 뭐라고 해도 역사였다.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는 위정자는 무책임하고 무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기억하고 있다.

후대의 평가를 전혀 고려하지 않겠다던 이연의 일성을.

오직 이 시절을 살아가는 백성만을 위하겠다는 진심을 나는 아직도 새기고 있었다.

“그래도 좋소.”

과연 이연 역시 초심을 잃지 않았다.

“나를 설득하시오.”

“…….”

“설득하지 못하면 내가 나설 것이오.”

이 난국을 돌파할 수 있는 신기(神技)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게 주어진 건 하나였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하겠사옵니다.”

죽기를 각오하는 것이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

“신을 한 번 더 믿어주시옵소서.”

이연은 침묵으로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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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호는 돌아가는 정황을 몇 번이나 되새겼다.

무려 두 번의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그런데도 조선 조정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오래 걸리지 않아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생각도 하지 못한 이유였다.

“상당한 자금을 사용했습니다.”

변승업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또한, 그토록 고고하게 굴었던 조선의 조정을 고작 ‘뇌물’로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뇌호의 뇌리로 천만금으로도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던 중대본의 대신들이 떠올랐다.

속으로 비웃으며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놀랍군. 자네가 중대본까지 통제할 수 있었나?”

“결과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허.”

혹시나 해본 말이었으나 정말이었다.

또한, 답변이 간단하였으나 과정은 실로 복잡할 것이다.

이미 물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건만 변승업은 재차 이마를 닦는 시늉을 했다.

“중대본이 수립된 이후 여러 정책을 집행했습니다. 그중 8할이 소인의 재원을 사용한 것입니다.”

“…….”

“지금이라도 소인이 마음만 먹으면 중대본을 와해시킬 수 있습니다.”

“조선 조정이 그걸 지켜만 보고 있지는 않을 것인데.”

“그렇다고 소인의 상단을 강제로 뺏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

“소인은 상단을 운영하여 끝없이 이윤을 창출할 수 있으나, 조정은 아닙니다. 그저 많은 돈을 거두어 사용할 뿐인데 어찌 그토록 우매한 짓을 하겠습니까.”

너무 맞는 말이었다.

아무리 변승업의 부가 막대할지라도 일국의 재원으로 사용한다면 순식간에 고갈될 수밖에 없다.

몇 년간 중대본의 정책을 지탱할 수 있었던 걸출한 상인이 상단을 통하여 끝없이 재원을 창출했기 때문이었다.

조선 조정으로서는 속이 쓰리겠으나 이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생각을 이어가던 뇌호는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켜보던 변승업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뿐이겠습니까. 이번에 유혈 사태를 유도한 사족과 소인이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정말인가?”

“소인이 어찌 감히 대인께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허.”

“본질이 완벽하게 덮어지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사대부의 반발이 거세질 수밖에 없는 상황일세. 이를 일부러 유도했다는 건가? 대체 어째서?”

“대인. 첫술에 배가 부를 수는 없습니다.”

“해서?”

“사대부의 반발이 거세면 거셀수록 대응도 최대한으로 준비하면 될 것입니다.”

“피하지 않고 오히려 논란을 키우겠다?”

“그렇습니다. 대인. 소인은 지금 최대 규모의 법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뇌호의 놀란 표정을 빤히 바라보던 변승업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대인. 조선에서 이 사안으로 큰 충돌이 발생하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습니다.”

“자네 생각을 잘못하고 있네.”

“어찌 그러십니까.”

“과정의 중요성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황상께서는 이 문제를 절대 가볍게 여기지 않을 것이네.”

맞는 말이었다.

청 황제는 제 나라의 태조를 두고 논란이 생기는 걸 우호적으로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변승업은 태연하게 말을 꺼냈다.

“소인이 어찌 그 부분을 생각하지 못했겠습니까. 해서, 일을 이렇게 키운 겁니다.”

“…….”

“사대부와 승려의 대립은 때리고 맞은 일만 거론될 겁니다. 그러나 본질이 ‘사당(祠堂)’의 건립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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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참으로 밝았다.

유독 구름이 보이지 않아서 그런데 평소와 비교할 수 없는 청명함이 전해졌다.

한참이나 고개를 들고 사가 앞을 서성였다.

시원한 밤공기를 충분히 만끽했을 때 인기척이 들렸다.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어찌 되었나?”

“뇌호를 완벽하게 포섭하였습니다.”

서서히 몸을 돌렸다.

그 어느 때보다 자신만만한 표정을 한 변승업이 보였다.

“정확하게 말하게.”

“소인이 평생 진행한 모든 장사 중에서 가장 승산이 있습니다.”

“고생했네.”

이번이 이 땅의 마지막 연좌이길 바랄 뿐이었다.

아니, 적어도 이연 치세에서는 그러하길 바랐다,

이미 이런 시간조차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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