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만세 만세 만만세(11)
유형원의 말은 이어졌다.
“조선의 체질이 바뀌고 있는 역사적 대 전환기이거늘 어찌 이토록 근시안적인 시야를 가지고 있단 말인가.”
지극히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서얼은 양반의 선봉대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변혁 그 자체라고 해도 무방한 시절이다.
이를 꿰뚫어 보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나도 답답했다.
“자네들은 양반이 아닐세. 단지 그들의 욕망이 구현되면서 세상에 나왔을 뿐이네. 한데, 양반처럼 행동하는 건 대체 어찌 된 영문이란 말인가. 자네들은 양반이 세운 장벽을 뚫어야 숨을 쉴 수 있지 않나?”
“…….”
“승려는 양반의 세상에 작은 송곳 구멍이라도 내고자 나서고 있네. 이럴 때 자네들은 어찌해야 하겠는가? 양반의 방패가 되어 승려를 막는 건 너무나도 우매한 행동이 아닌가?”
“하지만…….”
“물론, 승려가 승리할 가능성은 희박하지. 직후 자네들은 더 좁아진 출사의 길에 좌절하겠지. 그런데 묻겠네. 이대로 흘러만 간다면 자네들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나? 무엇이 달라지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세상에서 또 한탄만 할 것인가? 아. 내가 실언했군. 변화는 찾아올 것이네. 승려의 도전을 경험한 양반은 이 나라를 더 폐쇄적으로 만들 것이니 말일세. 알겠는가? 지금이 그리울 정도로 경직된 조선이 자네들을 기다릴 것이네. 내 말을 새기게.”
“…….”
누구도 반박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심이 담긴 동의가 나온 것도 아니었다.
유형원은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는 서얼을 지그시 바라봤다.
“끝내 양반의 방패가 될지라도, 그 선택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는 정확하게 계산하게. 그들에게 확실하게 제안하라는 말일세. 이조차도 할 자신이 없다면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존재만 하게. 작금의 변혁은 그런 이들이 끼어들 만큼 호락호락한 게 아니니까. 또한, 잊지 말게. 역사는 침묵하는 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까.”
여전히 답변은 나오지 않았다.
자신들을 우물에 가둔 이와 싸우려면 우물부터 나와야 하는 법이다.
지금부터는 서얼의 영역이었다.
유형원은 등을 돌렸다.
그의 눈에는 산처럼 쌓인 퇴비가 보였다.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
처능의 염주는 쉬지 않고 움직였다.
하지만 전처럼 평정심을 일으키는 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늘 여유가 깃들었던 눈동자에는 불안함이 가득했다.
마주한 이에게 편안함을 주던 자애로운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쉬지 않고 잘게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가 담은 건 이미 수백 명을 상회(上廻)한 승려였다.
노상이었으나 모두 경건하게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다.
“…….”
법회였으나 청 태조의 사당과 연결된 정치적 행사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바라만 봐도 속이 답답했다.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괜찮으십니까.”
옆을 지키던 젊은 승려가 걱정스레 말을 걸었다.
처능은 양손으로 염주를 꽉 쥐며 고개를 저었다.
“내 탓일세.”
“어찌하여 그러십니까.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수상한 시절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꾀를 내었던 것이 시작이었네. 그러지 않았다면 어찌 여기까지 왔겠는가.”
송시열과 비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모든 건 거기서 시작되었다.
처능은 크게 한탄하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저 조선에서 불자(佛子)의 길이 조금이나마 편안하길 바랐을 뿐이네. 전조 고려 시절에 누렸던 성세를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었네. 그런데 이런 건곤일척의 순간까지 이르렀어. 이 길에 나와 불자의 의지는 단 일 할도 없네.”
처능의 시선은 다시 법회의 승려들에게로 향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감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회한이 담겼다.
“조선 200년사에 이토록 많은 승려가 도성에 집결한 적이 없었네. 그러니 가슴이 벅차올라야 하거늘, 도리어 원통함만 커지고 있다네. 부처님의 가르침을 중생들에게 설파하는 법회가 아니라, 청 태조의…….”
물밀듯이 거세게 밀려오는 참담함에 처능은 울컥했다.
가장 고통스러운 건 이 길의 끝에 어떤 결과가 펼쳐질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평생 이토록 무기력한 적이 없었다.
한탄하듯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한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상당히 젊었다.
또한, 복색을 보아하니 양반이 분명했다.
처능의 눈동자가 가늘어졌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쩌면 또 폭력 사태를 유발할지도 몰랐다.
이리되면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것이니 반드시 경계해야 마땅했다.
서둘러 나서며 말했다.
“누구기에 무리를 지어 법회에 접근하시오?”
“소생 윤증이라고 합니다.”
처능은 멈칫했다.
실제로 마주친 건 처음이지만 이름을 모를 수가 없었다.
위대한 길이 곧 윤증의 삶이 아니었던가.
또한, 부친이 예조판서 윤선거다.
즉, 나이를 떠나 거물 중의 거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처능은 염주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물었다.
“공께서 어찌 오셨소?”
“법회에 힘을 보태고자 합니다.”
“지금 뭐라고 하셨소……?”
“청 태조의 사당 건립은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대관절 이게 무슨 말인가.
처능은 너무 놀란 나머지 말문이 막혀버렸다.
윤증은 그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자세를 가다듬으며 좌우를 바라봤다.
“위대한 길은 실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청국에서 어장세를 인하하고 대청 무역을 열어낸다면 사당을 어찌 건립하지 못하겠습니까.”
“허.”
“소생은 작금의 조선에 무엇이 필요한지, 딱 이 부분만 바라볼 뿐입니다. 승려의 법회보다 절실하게 필요한 건 없습니다.”
윤증의 오른팔을 뻗어 법회를 가리켰다.
그의 호기로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늘 아래 이보다 더 실리를 찾는 행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응당 배울 일입니다.”
처능은 이제 상황이 개운해졌다.
무리할 정도로 압박하듯 집행되었던 법회의 끝에 무엇이 그려진 상태인지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이 모든 건 송시열과 중대본의 계획이다.
그들은 실패를 상정하지 않는다.
반드시 집행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일의 일등 공신은 누가 뭐라고 해도 승려들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처능의 심장이 묘하게 설렜다.
참으로 알 수 없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간지러운 그 느낌이 절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즐기고 싶었다.
-----
지금은 완화되었으나 선왕 시절만 하더라도 조정은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극렬했다.
되돌아보면 그 시절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과 정면으로 다툴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중 가장 먼저 거론되는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윤휴였다.
그의 학문적 경지를 둘째하고, 불처럼 호전적인 성격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윤휴의 결합은 승려와의 일전을 준비하던 사대부에게는 천군만마와도 같았다.
자연스레 사족의 대표로 자리매김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뒷짐을 쥐고 사가에서 하늘을 바라보던 윤휴가 고개를 대번에 돌렸다.
그의 입가에는 분명한 조소가 담겨 있었다.
“그러니까 힘을 보탤 것이니 대가를 내어달라?”
“……그저 소생들에게도 숨을 쉴 수 있는 틈을 내어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참으로 우습군. 나와 협상하려면 제대로 된 제안을 해야지. 혹은 우리가 위기에 처하였거나. 그런데 너희는 어떤 경우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내가 어찌 반응해야 하나?”
조롱과 멸시가 잔뜩 담긴 윤휴의 일갈은 너무나도 따가웠다.
서얼들의 몸은 절로 움츠려졌다.
“물러가게.”
“선생. 소인들의 말을 잠시만 더 들어주십시오.”
“썩 물러가라고 하였다.”
서슬 퍼런 축객령에 서얼들의 안색은 흙빛이 되었다.
하지만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역사적 대 변환기였으나 난세를 정면으로 정면 돌파하는 중대본은 제 역할을 놓치지 않았다.
허적과 유형원은 민생을 꾸준하게 챙겼고, 허목은 보이지 않게 기근과 싸우고 있었다.
그들은 말없이 나의 행보를 지지했다.
오늘도 모두 바쁜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홀로 중대본을 지키며 천장을 바라봤다.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흔들 때였다.
“우암.”
인기척과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송준길이었다.
그의 표정이 어두웠다.
“오셨습니까.”
“진통이 거대할 것이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나는 싱그럽게 웃었다.
“형님께서 큰 역할을 해주셨습니다.”
만일 송준길이 대사헌으로서 일을 도모하지 않았다면 제대로 시작조차 할 수 없었을 정도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래서 내 말은 진심이었다.
“되었네. 한데, 윤증은 탈이 없어야 할 건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의 길은 늘 옳았습니다.”
윤증의 행보는 거센 저항에 봉착할 것이다.
어쩌면 윤선거까지 신랄한 비난에 휩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잘 극복해낼 것이다.
“자력으로 극복하기 어렵기에 이러한 ‘협잡’을 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처지가 안쓰러울 뿐일세. 나는 그저 후대가 우리의 고민을 잘 이해해주길 바랄 뿐이네.”
역사를 두려워하는 위정자의 자세가 여실하게 나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당 그리될 것입니다.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그때였다.
관리 한 명이 모습을 보였다.
그의 얼굴은 상당히 경직된 상태였다.
“승려의 수가 천여 명을 넘었습니다.”
송준길과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다.
아니,
“시작하지요.”
“그리하지.”
마무리였다.
-----
처능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수십 명에 불과했으니 절대적인 수가 많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도 아닌 서얼은 환속 승려와 잡과 응시 권한을 두고 첨예하게 경쟁 중이었다. 그러하니 법회를 비판하고 사족의 선봉 부대가 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여기에 왔다.
“지금 뭐라고 하셨소?”
“소생들도 대사와 뜻을 함께하겠습니다.”
“귀공들은 우리의 대립 관계로 알고 있소만.”
서얼 중 한 명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쓰게 웃었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 길이 옳다고 여겨서 힘을 보태고자 합니다.”
“속내가 따로 있는 듯한데 더 묻지는 않겠소. 그러나 절대로 경거망동하실 수 없소. 내 말을 아시겠소?”
서얼들은 어색한 미소를 짓다가 지켜보던 윤증과 눈이 마주쳤다.
언젠가 자신들은 감히 쳐다도 볼 수 없는 위치에 올라갈 인물이었다.
그렇게 홀린 듯 서얼들의 말이 이어졌다.
“물론입니다.”
모처럼 훈풍이 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저 멀찍이서 무장 병력이 다가오고 있었다.
선두에는 송시열이 있었다.
공기가 얼어붙었다.
그런데 송시열의 시선이 향한 곳은 법회가 아니었다.
이 사실이 너무 묘했다.
-----
뇌호의 눈이 아주 동그랗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지만, 밖에 무장 병력이 집결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점차 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불교의 법회를 탄압하는 건 조선 조정의 일이오. 한데, 공이 어찌하여 여기에 들어오셨소?”
불쾌감을 담은 경고성 발언이었다.
그러나 나는 가볍게 밀어내며 말했다.
“대인께서 개입하셨습니까?”
“대관절 무슨 말이오?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하시오.”
“하!”
“허. 본부장! 이게 무슨 무례요!”
결국 뇌호는 노발대발했다.
손을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보아하니 노여움이 머리끝까지 치민 것만 같았다.
나는 비웃으며 쳐다봤다.
막상 이리되자 뇌호는 당황한 듯 멈칫했다.
눈동자가 복잡하게 움직였다.
나는 몸을 앞으로 내밀며 싸늘하게 말했다.
“감찰 결과 변승업이 개입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
“한데, 대인과 그가 은밀한 만남을 가졌다지요?”
“!!!”
뇌호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이보시오. 그건…….”
“아무리 대국의 사신이라고 할지라도 제후국의 내정에 이렇게 개입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아무리 대국의 사신이라고 할지라도 제후의 내정에 관여할 수는 없다.
심지어 현재 도성을 흔들고 조정을 잠식한 사태의 원흉으로 지목된 것이다.
완벽하게 궁지로 몰아넣었다.
최고의 덫이었기에 변수는 있을 수 없다.
싸늘한 시선으로 뇌호를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초점을 잃었고, 낯빛은 창백해졌다.
입술은 쉬지 않고 달싹거렸다.
오늘 모든 걸 마무리할 것이다.
그런데
“이일선이외다.”
이건 무슨 말이야?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일선이 변승업과 은밀한 만남을 가졌다고 들었소.”
“…….”
“나는 진상을 파악하고자 변승업을 만난 것이오.”
와.
이걸 이렇게 방어할 줄은 몰랐다.
황당해서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