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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207화 (207/298)

207화 만세 만세 만만세(13)

제후국의 예조판서로서 대국 사신단을 상대하는 건 늘 어렵고 고단한 일이다.

대국의 위세를 등에 업은 그들의 억지와 겁박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정은 전과 사정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덫과 덫을 설치하며 짜임새 있고 철저하게 준비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이러한 사정으로 조선 예조판서 윤선거 대감의 언행에는 자신감이 철철 흘렀다.

“간단한 일이었네.”

자리에 앉자마자 들린 건 정말 뜬금포였다.

그런데 놀라운 건 상당한 기백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굉장한 부조화였기에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제가 외교의 사정을 파악할 때 사신단의 보고를 신뢰하는 건 당연한 일일세. 이는 누가 탓할 일이 아니지. 그러하기에 번국의 일과 관련한 황제의 정치적 판단은 사신단의 보고를 기반으로 내려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네. 그래서 우리는 늘 사신단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지.”

“…….”

“생각해보게. 그들이 심술을 부린다면 얼마나 처지가 난처하겠나? 하지만, 사신단이 무슨 억지를 부려도 무방할 정도의 반례가 있다면 사정은 완벽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네.”

“…….”

“보시게. 대국은 늘 번국이 불순한 마음이 있다고 의심한다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으면 늘 억지를 부린 것일세. 그러나 우리는 이미 군영 해산을 감행했지 않은가. 불순함이라는 전제가 아예 성립할 수 없는 상황이지.”

“…….”

“어디 이뿐인가? 현재 가장 중요한 맹점인 조청 어업 협정의 이행도, ‘아직’ 어선을 출항하지 않았을 뿐 실무적인 준비는 모두 마무리된 상황일세. 우리는 황제의 말을 하나도 거역하지 않았다는 것이네.”

“…….”

“이처럼 조선에서 반청은 아무런 흔적도 찾아볼 수 없지 않은가.”

“…….”

“결과적으로 우리 조선의 불순함을 입증하는 건 청 사신단의 세 치 혀밖에 없게 될 것이네. 이러할 때 황제가 정상적으로 정무적 판단을 내린다면 절대로 전처럼 고압적인 태도를 일관할 수 없을 것이네. 아니, 사신단이 조선을 음해한다고 여길 가능성이 더 클 것이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지난 대청 외교부터 지금까지 빌드업은 숨 쉬듯 이뤄졌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정책만을 살필 때 조선은 명실상부 친청국이 되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는 뇌호를 신랄하게 조롱했다.

이연까지 나서서 그를 겁박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들이 이를 황제에게 입증할 방법이나 수단 따위는 없었다.

이러할 때 황제가 억지를 부리면 그냥 장사를 접는 게 옳다.

간, 쓸개를 다 꺼내서 내밀었는데도 더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이니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건 없는 법이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작금의 정세가 이토록 뻔한 이야기나 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내 눈은 정말로 휘둥그레졌다.

“혹시 이 자리에 자네와 나 말고 누가 더 있나?”

“갑자기 무슨 말인가?”

“다 아는 이야기를 이토록 지루하게 설명하지 않았나? 그래서 나 말고 듣는 사람이 있는 줄 알았지 뭔가.”

“…….”

“심지어 나는 졸아버릴 뻔했네, 이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일세.”

“상황을 명확하게 정리하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건 오판의 가능성을 크게 만들 뿐일세. 참으로 답답하군.”

“애초 내가 자네를 찾은 건 이렇게 뻔한 강의나 듣기 위함이 아니지 않나? 뻔히 알면서 이리 나오니 너무나도 당혹스럽군.”

저항 없이 나의 진심을 전달받았기에 감격한 것일까?

윤선거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이건 너무나도 즐거운 일이었으나 나는 한가하지 않았다.

어깨를 으쓱하며 슬쩍 손짓했다.

서론 치우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의미였다.

윤선거는 입을 삐쭉이더니 말을 이었다.

“그간의 여러 공작으로 사신단이 조선 내정에 관여했다는 의혹은 확실하게 키웠네. 사대부를 넘어 전하께서도 친히 추궁하시니 말일세. 그런데 우암. 우리가 고작 뇌호라는 개인을 궁색하게 만들고 궁지로 몰아넣고자 이토록 애를 쓰는 게 아니지 않겠나?”

“그렇지. 그건 지난 대청 외교로 마무리했지. 우리는 더 발전해야 할 역사적 책무가 있지. 안 그런가?”

“모처럼 맞는 말이 아닐 수 없네.”

윤선거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그의 가벼운 제스처 하나마다 자신감이 넘쳤다.

이쯤 되자 윤선거와 예조가 도출한 결론이 너무나도 기대됐다.

나는 괜한 말을 더 보태지 않고 경청의 의지를 강렬하게 피력했다.

과연 윤선거는 힘찬 미소를 보이면서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나서시면서 화룡점정을 찍었네. 뇌호는 물러설 수밖에 없는 상황일세. 하지만 새로운 재조지은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갈수록 커지고 있으니, 어찌 미련을 버릴 수가 있겠는가?”

“냉정하게 따질 때 뇌호는 무능한 인물이 아닐세. 오히려 정치적 판단력이 뛰어나지. 하지만, 작금의 움직임을 외면할 수는 없네. 이런 절제가 가능해지려면 권력에 미련이 없어야겠지.”

“자네 말대로일세. 그러니 뇌호는 갈등할 수밖에 없어. 강렬한 유혹은 본질은 완벽하게 가리고 있으니 말이네.”

“그렇겠지. 하지만 그 정도로 다시 자리에 앉게 하는 건 어려움이 있지 않겠나? 지금 우리는 그가 귀국을 자발적으로 멈추도록 해야 하니 말일세.”

참으로 웃긴 일이긴 했다.

모든 상황을 사신단이 귀국할 수밖에 없게 몰아넣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이대로 귀국하게 둘 수 없었다.

그래야만 뇌호가 조건 없는 대청 전면 무역의 빗장을 알아서 열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귀국을 무조건 막아야 했다.

“걱정하지 마시게. 자네가 여기까지 판을 이끌고 왔는데, 우리 예조가 마무리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묻는 말일세. 무엇인가?”

“아주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네. 그러니까…….”

이어진 윤선거의 말은 아주 미친 내용이었다.

아니, 이를 집행하기로 한 윤선거가 미친놈이었다.

아니다.

그냥 다 미친놈들이다.

나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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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선은 땅이 꺼질 듯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가도 멍하게 하늘을 바라봤다.

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이 두 가지뿐이었고, 상대해주는 건 하늘과 땅밖에 없었다.

환하게 웃었던 시절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

초점 없는 눈으로 한적한 거리나 걸었다.

답답한 마음을 달랠 유일한 활동이었다.

힘없는 발걸음을 제법 옮기고 조금 지칠 때였다.

“…….”

인기척이 느껴졌다.

여전히 초점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눈동자를 돌렸더니 사대부 몇 명이 보였다.

과거였다면 한껏 오만한 눈으로 쳐다보며 위세를 부렸겠으나,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애써 시선을 돌리며 걸음을 옮겼다.

“…….”

마주한 방향에서도 사대부 몇 명이 걸어왔다.

애석하게도 좁은 골목이었다.

이일선은 쓴 미소를 지으면서 부딪히지 않게 옆으로 몸을 비켰다.

“…….”

사대부들과 눈이 마주쳤다.

혹시 저들이 알아본다면 괜한 시비에 휘말릴까 두려워 고개를 숙였다.

다만 불안한 건 저들의 눈빛이 상당히 험악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별일이 생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은 지나가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하나만 묻겠소.”

누군가의 물음이었다.

이일선은 애써 태연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퍽!

“!!!”

얼굴에서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다.

그냥 너무 아팠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자각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정말 아프기만 했다.

그리고

-퍽!

“!!!”

-퍽!

“!!!”

-퍽!

“!!!”

……

-퍽!

“!!!”

계속 아팠다.

언제부터인지 얼굴은 땅바닥에 붙어 있었다.

고통이 쉬지 않고 이어지면서 뒤늦게 이성이 작동했다.

그리고

“더 밟아!”

“아주 밟아!”

“그냥 밟아!”

“사이 좋게 다 같이 밟아!”

소름이 끼치는 말들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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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현 뒤 퇴궐하던 뇌호는 하마터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퇴로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조선 왕의 압박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이 너무 강렬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

선택지는 오직 하나였다.

이대로 곧장 귀국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황명은 전했고, 조선은 항명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귀국해도 외교적으로는 아무런 탈이 없다.

조선 왕 역시 재차 축객령을 내렸으니 절차상 문제도 없었다.

그러면 될 일이었다.

어느새 태평관에 당도했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자 했을 때였다.

“조선은 새로운 재조지은을 품어야 합니다!”

예사롭지 않은 외침이 들렸다.

주체는 익히 아는 인물이었다.

바로 윤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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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능은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부르짖는 윤증을 빤히 쳐다봤다.

볼수록 놀라운 학자였다.

남들처럼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체면을 내세우지도 않았다.

말도 길거나 많지 않았다.

간결하게 말하고, 곧장 행동에 나섰다.

무엇을 위해서인지 물었을 때 돌아오는 답변도 간단했다.

-백성에게 더 좋은 옷을 내주기 위해서입니다.

상황과 입장을 떠나서 참으로 훌륭한 답이었다.

만일 과거에 윤증을 만났다면 진심으로 감탄하며 극찬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순수하게 사대부의 열의에 감격하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왔다.

처능의 머릿속에는 송시열과 나눈 대화만 가득했다.

-불교 200년의 한을 풀도록 하게.

-그리할 것입니다. 소승이 이번에 확실히 알았습니다. 결국, 힘이 있어야만 무언가를 지킬 수 있다는 걸 말입니다.

-가장 정확한 말일세.

-천하 만민이 무슨 말을 할지라도 물러서지 않고 불교의 이권만을 바라볼 것입니다.

-그것이 자네의 숙명일세. 너무나도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 수 없어. 나는 믿네. 자네의 지도력과 불교의 세력이라면 능히 이뤄낼 것이네.

-응당 그리할 것입니다. 하여, 다시는 이런 수모를 불자가 당하지 않게 할 것입니다.

-거는 기대가 크다네.

이것이 전부였다.

지금부터는 부처님의 뜻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제자를 지키고자 나설 것이다.

염주를 든 처능의 손이 하늘을 향해서 뻗었다.

그 순간 승려들이 일제히 자세를 고쳐 잡았다.

“청 태조의 사당을 건립하여 국익을 도모해야 하옵니다.”

본격적으로 정치적 구호를 실은 법회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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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호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조금 전 비워졌던 마음은 어느새 꽉 차고 말았다.

귀국을 미루고 싶어졌다.

“새로운 재조지은이 필요하옵니다!”

이토록 강하게 발목을 잡는데 어찌 움직일 수 있겠는가.

청국의 일원으로서 저토록 진실한 이들을 뿌리칠 수는 없다.

만일 저들을 올곧게 품어낼 수만 있다면 대청의 역사에서 누구도 하지 못한 대업(大業)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천하를 평정한 대군(大軍)의 위력으로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내는 것이었으니 최고의 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황제의 흡족함이 내릴 황은은 사해를 진동시킬 것이다.

상상만 해도 심장이 떨려왔다.

설령 상황이 어려워서 큰 뜻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확실한 관계는 수립해야 했다.

최소한 변승업을 통하지 않고 따로 서찰을 주고받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

하지만 상황은 이조차도 쉽지 않았다.

조선 왕의 강력한 압박이 있는데 적극적으로 행동한다는 건 대놓고 배후 세력이라는 걸 자인하는 것이니 말이다.

아무리 대국의 위력을 등에 업고 있다고 할지라도, 제후국의 내정에 직접 관여하는 건 용납될 수 없는 행위였다.

물론, 실체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면 모를까 조선은 이를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다.

그래서 마음이 너무나도 무거웠다.

깊은 한숨을 쉬며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대인.”

어쩌면 누군가 불러주길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순식간에 발걸음을 멈춰서 고개를 돌렸다.

친청파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처능이었다.

“대인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크게 반길 일이었으나 지금은 도저히 적극적으로 반길 수가 없었다.

조금 전 조선 왕으로부터 엄중한 경고를 받고 왔다.

이러한데 백주에 처능과 긴밀한 대화를 하는 건 도발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이런 갈등은 타인과 무관한 오직 혼자만의 것이었다.

“대인께서 소승들의 뜻을 황상께 전해줄 수 있습니까.”

뇌호는 온몸이 굳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기다렸던 말이었으나 지금은 너무나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짧게라도 대화를 하는 게 현명했다.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말하려던 뇌호의 눈에 황급히 달려오는 청의 관리가 보였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황망함이 가득한 표정이 강하게 인지됐다.

묘하게 기시감이 들 때 관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 대인.”

“……무슨 일인가?”

“토, 통관 이일선이 습격(被襲)당했습니다.”

“!!!”

심장이 철렁거렸다.

동시에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이건 기회였다.

귀국을 미룰 수 있는 최고의 기회 말이다.

하늘은 야속하기만 한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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