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만세 만세 만만세(14)
실로 고압적인 태도였다.
진심으로 대체 얼마 만에 보는 대국 사신단 정사다운 모습인지 모르겠다.
참으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것이었기에 왈칵 눈물을 흘릴 뻔했다.
너무 감격하였기에 서둘러서 말을 꺼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인.”
“감히 조선의 사대부가 청 사신단의 일원을 구타했소.”
크.
과연 압도적인 위압감이었다.
중원을 평정한 대청의 사신단 정사다웠다.
이대로라면 조선의 산천초목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 것만 같았다.
정상적인 상황이었으면 납작 자세를 낮추며 용서를 구하는 게 옳았다.
그러니 나도 뇌호가 간절하게 보고 싶어 할 모습을 연출해주기로 했다.
어쨌거나 황제 대리인의 부활을 진심으로 감축해야 하니 말이다.
“대인. 고정하십시오.”
“하! 내가 지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조선의 사대부들이 황상 폐하의 신하에게 위해를 가했소. 아시겠소? 이는 황상에 대한 도전이외다.”
“소인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다만, 대인께서 이렇게 노여워하신다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허. 그게 무슨 말이오? 설마 내가 은폐하길 바라는 것이오?”
뇌호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눈을 부라렸다.
나는 재빨리 잔뜩 위축된 모습을 보이며 눈동자까지 파르르 흔들어줬다.
“대인. 은폐가 아니라…….”
“시끄럽소!”
두려워하며 자라목을 해줬다.
“확실한 진상 조사를 해야 할 것이오.”
“……응당 그리하겠습니다.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을 겁니다.”
“어찌 이런 일이 생길 수가 있는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소. 무엇보다 조선 조정에서 이 일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질 것이외다.”
하.
정말이지 너무나도 압도적인 위엄이었다.
태산과도 같은 압박에 나는 대경실색하며 자세를 낮출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쯤에서 흐름에 따라 가장 필요한 말을 꺼냈다.
“조만간 대인께서 귀국하시니 최대한 빠르게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하! 이보시오!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대인……?”
“시끄럽소!”
뇌호는 노발대발했다.
나는 허둥지둥했고.
“시간에 쫓기어 대충 일을 무마할 생각은 마시오!”
“대인. 소인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잘 들으시오. 나는 결과를 확인하여 책임자를 본국으로 압송할 수도 있소. 이를 명심하시오.”
청국으로 ‘압송’된다면 십중팔구 죽는다.
그러니 이는 뇌호가 휘두를 수 있는 최고의 협박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고 두려움을 숨길 수가 없는 듯 팔을 번잡하게 움직이며 말했다.
“대인. 어찌하여 이러십니까.”
“시끄럽소!”
뇌호는 계속 눈을 부라렸다.
힘도 꽉 주고 있었다.
이쯤 되니 눈이 안 아픈지 걱정까지 들었다.
“이 일을 모두 명확하게 처리하기 전까지 귀국하지 않을 것이외다.”
“…….”
“아시겠소?”
“……명심하겠습니다.”
“흥!”
대국 사신단의 정사다운 모습을 보이며 축객령을 내리셨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레 퇴장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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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이 물러갔다.
뇌호는 모처럼 속 시원하게 웃었다.
가장 적절한 시기에 일이 터져서 모든 문제가 한 번에 해결됐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던 이일선이 참으로 큰일을 한 것이다.
그야말로 일등 공신이었다.
물론 공식화될 일은 없지만 말이었다.
이제 남은 일은 오만한 조선 왕을 다시 만나는 것이었다.
황제를 능멸하던 그를 짓밟아 버릴 생각을 하니 도저히 기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여기에 친청파의 움직임을 더 격렬하게 부추긴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이제는 대놓고 처능이나 윤증을 만나서 사안을 논의해도 될 정도의 상황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들의 법회와 연좌가 이뤄지고 있으니 곧장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입가를 씰룩이며 태평관을 나섰다.
그런데
“…….”
아무도 없었다.
정국이 엄중하니 병력을 철수시킬 수는 있다.
하지만, 승려나 사대부도 없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뇌호는 당황하여 눈만 껌뻑였다.
그러나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아.”
병력의 철수로 거동이 자유로울 친청파가 육조 거리로 진출한 것이 분명했다.
옳다.
이왕 이렇게 정국이 열렸으니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게 좋지 않겠는가?
뇌호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마에 몸을 실어 서둘러 육조 거리로 향했다.
대청을 향한 재조지은을 바라는 우렁한 외침을 기대하니 들뜬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런데
“…….”
아무도 없었다.
“…….”
뇌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어찌 이토록 우매한 무리가 있을 수가 있는가.
친청을 부르짖기에 가장 적절한 정세가 펼쳐졌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이내 스치는 게 있었고 자연스레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래. 승려와 정치를 경험하지 않은 젊은 학자들이었지.”
이내 상황을 말끔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그들은 정치적 판단력이 부족한 무리였다.
그러니 하나씩 가르쳐 줄 수밖에 없었다.
다소 귀찮은 일이었기에 어쩌겠는가.
쓴 미소를 지으며 여러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궐이었다.
조선 왕과의 독대를 시도했다.
그런데
“전하께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문전박대를 당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뇌호는 눈을 부라리며 내관을 노려봤다.
“다시 고하게.”
“송구합니다. 전하께서 두 번 하교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뭐라……?”
“물러나시지요.”
“하!”
불쾌함을 대놓고 표출했다.
하지만, 내관의 태도는 너무나도 뻣뻣했다.
강제로 밀고 가는 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기에 이를 갈며 말했다.
“전하께서도 통관 이일선이 변을 당한 사실을 아시는가?”
“물론입니다. 아주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
“한데, 계속 이렇게 계실 겁니까?”
“건방지군.”
“……송구합니다.”
“하.”
더 시간을 끌어봤자 소모적인 논쟁만 이어질 뿐이었다.
어차피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갈 방법도 없었다.
그리고 차분하게 생각해보니 조선 왕이 이리 나오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결국, 상황을 회피하려는 게 분명하다.
지금 만나봤자 수모만 당할 것이니 말이다.
참으로 아둔했다.
어차피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한 건 조선인데, 수습하기는커녕 방치한 게 아닌가.
일국의 군주로서 참으로 무책임한 태도였다.
비웃으며 등을 돌렸다.
머지않아 보게 될 조선 왕의 비굴한 모습을 떠올리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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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호는 눈을 껌뻑였다.
처능에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뭐라고 하였소……?”
“송구합니다. 더는 법회를 이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보시오. 분명 일전에 황상 폐하께 내용을 전하고 싶다고 했소.”
“한데, 사정이 변했습니다.”
“사정이 변하다니? 대체 무슨 말이오?”
태산처럼 믿었던 친청파의 수장이 발을 빼고 있었다.
자연스레 뇌호의 목소리에는 당혹감이 가득 담겼다.
“역관 변승업을 알 것입니다.”
“…….”
“그가 중단을 청했습니다.”
“뭐요……?”
“소승으로서는 그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 아니, 어찌 그의 세 치 혀에 이토록 중대한 행사를 중단할 수가 있소?”
“송구합니다만 소승들은 그의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사실상 그가 아니면 이렇게 결집하는 게 불가능하지요. 다수가 움직이고 정치적 행위를 하려면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변승업이 변수로 부각될 줄은 전혀 예상조차 하지 않았다.
이보다 황망할 수가 없었다.
“그가 갑자기 왜 그렇게 행동한 것이오?”
“소승이 거기까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면, 이대로 법회를 영원히 중단할 것이오? 그러지는 않을 것이지 않소이까. 추이를 보고 언제라도 다시 감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오.”
“송구합니다.”
“허.”
“역관 변승업의 동의가 없다면 법회는 이어갈 수 없습니다.”
처능은 담담하게 답하며 합장했다.
뇌호는 곤혹스러움을 숨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럴 때가 아니었다.
당장 변승업을 만나야 했다.
지금 이대로 친청파의 움직임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면 모처럼 찾아온 정치적 기회를 완벽하게 상실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일선 사태의 해결은 아무런 정치적 실익이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소인이 왜 그래야 합니까?”
변승업의 태도는 참으로 건방졌다.
불순함이 가득 담겼기에 보고 들은 뇌호는 속에서 뭔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대국 사신단의 정사가 고작 역관을 상대로 화를 참을 이유는 없었다.
“자네 지금 뭐 하는 건가?”
“소인에게 다시 법회와 연좌의 지원을 하라고 하시기에 어렵다고 답한 겁니다.”
“나와 지금 농을 하나?”
“소인이 어찌 감히 대인과 농을 하겠습니까. 천부당만부당합니다.”
“허.”
뇌호는 헛웃음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냥 정말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친청 행보를 멈추겠다는 건가?”
“소인은 상인입니다. 한데, 상인이 이익만 보고 달리는 불나방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나와 선문답이라도 할 생각인가?”
“신뢰라는 말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지요.”
“해서?”
“소인을 버린 건 대인이었습니다. 아닙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소인이 언제 이일선을 만났습니까?”
“…….”
아차.
뇌호는 멈칫했다.
말문도 막혀버렸다.
“대인의 위기를 벗어나고자 할 수 있습니다. 한데, 소인은 죽이려고 하셨습니다. 이토록 노골적으로 토사구팽을 시도하셨습니다.”
“이보게.”
“조선 조정이 대인의 계책을 우회하였기에 소인은 탈이 없었습니다. 한데, 만일 뜻대로 되었다면 소인은 국문장에 있었을 겁니다. 아닙니까?”
궁색해도 이보다 궁색할 수가 없었다.
뇌호는 진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대국 사신단의 정사이신 대인께서는 무탈하게 위기를 벗어나셨겠지요. 예. 대인께서 보실 때 소인의 목숨은 파리보다 하찮을 수가 있습니다. 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도 소인이 대인의 옆에 설 수는 없습니다.”
“감히…….”
“소인을 벌하십시오.”
“…….”
자리에서 일어난 변승업의 눈빛은 참으로 도전적이었다.
“통관 이일선의 피습으로 상당히 유리한 국면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일을 해결하는 게 대인께 무슨 정치적 실익이 있습니까? 그리고 조선은 절대 사대부를 청국으로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대인께서도 거기까지 바라는 건 아니실 겁니다.”
“하. 변승업. 말이 과하군.”
“사실이지 않습니까.”
“내가 자네 하나 어찌하지 못할 것 같나?”
“무슨 명분으로요?”
“변승업!”
“소인은 설득되지 않을 겁니다. 또한, 겁박하셔도 아무런 변화는 없을 겁니다. 아니, 대인께서는 아무것도 하실 수 없을 겁니다. 어떤 말씀이든 하는 순간 조선의 내정에 관여한다는 소문이 진실로 될 것이니까요.”
“!!!”
난처한 상황은 분명했다.
변승업의 말대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는 건 조선 내정에 관여했다는 완벽한 증거가 될 것이니 말이다.
“대인께서 소인을 벌하시려고 할지라도 조선 조정이 용인하지는 않을 겁니다.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소인은 중대본에 꼭 필요한 사람이니 말입니다.”
“기어이 네놈을 벌할 것이다.”
“기대하겠습니다.”
변승업은 가벼운 예를 취하더니 등을 돌렸다.
뇌호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야말로 최악의 수모였다.
주먹을 꽉 쥐었다.
머릿속이 너무 엉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