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만세 만세 만만세(15)
윤휴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쏠렸다.
오래 걸리지 않아 이번에는 왼쪽으로 움직였다.
동시에 그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진 상태였다.
입술을 여러 번 잘게 깨물고 있었다.
양손의 손가락은 번잡하고 잔망스러울 정도로 까닥이며 움직였다.
그러니까 도통 무슨 상황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온몸으로 피력하는 중이었다.
장담하는 데 이는 절대로 윤휴가 우매하여 발생한 현상이 아니었다.
“백 번을 생각해도 모르겠습니다. 대체 어떤 과정을 거치면 이일선을 방패로 사용할 수 있습니까?”
“하하하. 이 사람아. 어디 생각까지 하고 한 행동이겠나? 궁지에 몰리는 황급히 꺼낸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더 의문입니다. 자고로 위기에 봉착할 때 나오는 임시방편은 평소 정치적 역량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건 그렇지.”
“그간 소생이 봤을 때 청사 뇌호의 정치적 역량은 상당했습니다.”
“대국 사신이기에 고압적이긴 했으나 정치적 판단력이 나쁘지는 않았지.”
“그래서 너무나도 의아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미처 파악할 수 없는 오묘한 정략이 담겨 있을 줄 알았는데 결과적으로 아니었습니다. 진실로 최선의 수였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러니 어찌 당황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그중 토사구팽했는데도 변승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야말로 백미가 아니었겠나?”
다른 건 다 떠나서 변승업이 조선의 친청파를 지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대놓고 토사구팽했다.
일이 고약하게 틀어졌다면 변승업은 벌써 국문장에 끌려갔을 일이었다.
“그렇습니다. 음. 뭐 이전부터 이미 친조선 노선을 걷기로 하였기에 오직 조선의 국익을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고 여겨질 정도입니다. 아주 감사하게도 말입니다.”
끝없이 조롱만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뇌호의 선택은 정치적으로는 최악이었다.
정치력이 절정에 이른 이연조차 당황하여 한동안 말문을 닫았을 정도였으니 길게 언급할 이유도 없었다.
“자네의 말이 아주 적절해. 실제로 뇌호의 기민한 판단 덕에 일이 너무나도 수월해졌으니까.”
“한데, 더 놀라운 것도 있습니다. 그토록 점잖은 미촌 대감께서 이일선을 구타하는 방책을 수립하실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래서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자네 지금 뭐 하나? 잘 나가다가 왜 이러는 건가?”
“사실을 전하는 겁니다. 뭐.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뇌호가 조선에 잔류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정치적 영역도 완벽하게 상실되었으니 마음이 급하긴 하겠지만 말입니다.”
“마음만 급할 뿐, 할 수 있는 건 없지.”
“그러니 우리가 또 길을 알려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자네를 만나러 온 게 아닌가.”
“이런. 설마 소생에게 청탁이라도 하러 오셨습니까?”
나는 양손을 휘저으면서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말했다.
“아니, 설마 그걸 이제 알았나? 자네 요즘 감이 많이 떨어졌군.”
“…….”
“벌써 답답하군. 하나씩 다 설명하려니 말일세.”
길고 진한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윤휴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버렸다.
나는 기꺼이 성현으로서 넓은 아량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귀찮지만 하나씩 잘 설명해주기로 했다.
“조정은 이일선을 구타한 사대부를 조사할 것이네. 철저하게 진상을 규명해야 하니 말일세.”
“벌할 생각입니까?”
“그래야겠지?”
“설마 청국으로 압송할 수도 있는 겁니까?”
“그게 원칙이 아니겠는가? 조선의 사대부가 황제의 신하를 개 패듯이 팼는데 어찌 가볍게 넘어갈 수 있겠는가?”
“허. 소생이 그걸 지켜만 볼 것 같습니까?”
“그렇지. 자네가 그냥 지켜보지는 않을 것이네.”
“이런.”
내 말에 윤휴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의 눈동자도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부드럽게 양손을 모아서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기억하실 겁니다. 소생이 오래전부터 북벌을 꿈꾸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야말로 개꿈이었지.”
“치우십시오. 아니, 소생이 치워질까요?”
“이런. 진심으로 사과하겠네.”
윤휴는 나를 슬쩍 흘겨보면서 몸을 왼쪽으로 틀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순간 윤휴에게서 괴이할 정도의 호승심이 느껴졌다.
“이참에 황제와 정면 대결을 해볼 수 있으니 어찌 북벌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내가 더 보탤 건 없었다.
불꽃 남자 윤휴가 알아서 조선을 시끄럽고 뜨겁게 만들 거니까.
정말로 화끈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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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빨랐다.
눈 한 번 깜빡이면 일출이었고, 먼 산 한 번 바라보면 일몰이었다.
실로 놀라운 속도가 아닐 수 없었다.
나도 깜짝 놀랄 정도인데 뇌호는 어떨까 싶었다.
필시 속이 새카맣게 타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아니었을까 싶다.
속수무책으로 궁지에 몰리다가 이일선 사태로 겨우 확보한 정치적 시간이었다.
그러하니 친청파의 입지를 강화하고 우리 조정을 쥐어 짜낼 적기라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뇌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때 우리 조정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쓸데없이 기민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러하니 필시 뇌호로서는 참으로 불편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로서는 조선이 일을 조금이라도 천천히 진행하길 바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과연 오늘도 뇌호의 얼굴은 어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썩어 있었다.
하루가 1년처럼 피폐해지는 걸 직접 보는 것도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일이 마무리되었다고 들었소.”
“그렇습니다. 조만간 압송 절차가 마무리될 겁니다.”
“…….”
“대인께서 귀국하실 때 함께 처리될 듯합니다.”
“예상되는 반발이 크지 않겠소?”
“진통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소인이 능히 감당할 수 있으니 크게 신경을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소……?”
진한 아쉬움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정말 고향에 가기 싫은 거 같았다.
우리나라를 이토록 사랑하니, 애국자로서 가슴이 벅차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 역시 진한 아쉬움을 담아서 말했다.
“여러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조정이 기민하게 대처하였으니 대인의 화가 누그러지셨기를 바랄 뿐입니다.”
“…….”
“어찌하여 그러십니까. 혹시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십니까.”
“아.”
“예?”
“아…….”
뇌호는 다시 말끝을 흐렸다.
그의 심정을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원론적으로 접근한다면 황명을 잘 수행했다.
그러나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압도적 성과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변승업을 토사구팽하며 소위 친청파로 불리는 이들과 접선할 수 있는 요건 자체가 상실되었으니, 아쉬움은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고향에 가기 싫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물론, 우리도 뇌호를 이대로 돌아가게 둘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준비했다.
불꽃을.
“대감.”
그 순간 문이 열리면서 온도가 거세게 올라갔다.
이마에서 땀이 주르륵 흘러내릴 정도였다.
정겨운 대화에 침묵을 유지하던 뇌호는 물론, 미리 상황을 알던 나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소매로 땀을 닦으며 물었다.
“백호. 무슨 일인가.”
“단 한 명의 사대부도 청국으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슬쩍 뇌호를 쳐다봤다.
과연 안색이 묘해지고 있었다.
나는 진실로 아주 간절하게 바랐다.
우리가 잘 준비한 떡밥을 확실하게 물어주기만을 말이다.
그리고
“잠시.”
역시 뇌호가 아주 적절하게 개입했다.
나는 황망한 표정을 지으며 난처함을 온몸으로 표출해줬다.
그리고 재빠르게 나섰다.
“백호. 지금 할 이야기는 아닌 듯하네. 차후 시간을 내겠네.”
“아닙니다. 소생은 지금 확답을 들어야겠습니다.”
“허. 백호. 이러실 건가?”
“아. 잠시. 본부장은 기다리시오. 그래. 지금 뭐라고 하셨소?”
“대감. 만일 한 명이라도 압송을 도모한다면 소생을 죽이셔야 할 겁니다.”
“백호…….”
“이보시오. 내 말이 들리지 않소?”
윤휴는 뇌호를 아예 무시하고 나만 쳐다봤다.
나와 대화만 했다.
이를 당연히 인지했을 뇌호의 눈동자가 매섭게 찢어졌다.
아마 본능적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호기라는 것을.
“한 번만 더 다시 묻겠소. 뭐라고 하셨소?”
드디어 윤휴의 이글거리고 날카로운 눈동자가 뇌호를 향했다.
마주 보고 있으면 누구라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열기였다.
동시에 아주 뜨거울 것이다.
“단 한 명의 사대부도 청국으로 보낼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
나는 봤다.
찰나였으나 뇌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리는 걸 말이다.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다.
“황상 폐하의 신하를 구타한 죄인을 압송하는 일이외다. 한데, 반대하는 것이오?”
“여태 무엇을 들으셨습니까. 바로 그러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이는 조선의 일입니다. 대인께서 직접 소생에게 이래라저래라할 일이 아니지요.”
“감히!”
“대감.”
뇌호가 노발대발했으나 윤휴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시 내게 말했다.
사실 같이 각본을 짠 나도 윤휴가 이토록 속이 꽉 찬 도발을 시도할 줄은 몰랐다.
“이건 청이나 논의가 아닙니다. 소생의 경고입니다.”
“허. 백호. 진정하시게.”
“압송이 시작되면 소생부터 시전 거리에서 목숨을 버릴 것이니 그리 아십시오.”
그러면서 윤휴가 뇌호를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도끼로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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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호는 잔뜩 화가 난 상태였다.
윤휴가 대놓고 무시했으니 속에서 꽉 찬 노기가 터질 듯 굴러다니고 있을 것이다.
나는 오른손으로 이마의 땀을 닦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작은 소동에 불과합니다.”
“참으로 태평하시오? 저토록 노골적으로 황상 폐하를 모독하는 말을 했는데 말이오?”
“오해가 있으신 듯합니다. 어찌 윤휴가 황상 폐하를 모독했겠습니까?”
“하! 어디 그뿐이오?”
뇌호의 눈동자는 그새 산처럼 쌓인 상소로 향했다.
윤휴의 퇴장 이후 짜둔 각본대로 상소를 등장시켰다.
“저것이 무엇이오? 죄인의 압송을 반대하는 상소가 빗발치고 있소.”
“그저 상소에 불과합니다.”
“이보시오!”
화가 제대로 치밀어 오른 것 같았다.
그런데 화를 낼 때 내더라도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 제 수명만 단축할 뿐이다.
정치라는 영역에서 노여움을 표출할 때는 다스릴 수 있는 영역이 한계선이어야 한다.
즉, 지금 뇌호는 정상적인 판단을 내릴 수가 없는 상태라는 것이었다.
남은 건 대국 사신단의 정사로서 황제의 대리인이라는 오기밖에 없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대인. 조선에서 상소와 연좌는 일상적입니다.”
“감히 황상 폐하의 권위에 도전하였소! 나는 이를…….”
“압송이 무산될 일은 없을 겁니다.”
뇌호는 멈칫했다.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압송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이들까지 처벌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관련한 사안은 모두 절차대로 진행될 것입니다.”
흔들리는 뇌호의 눈동자를 보는 것도 이제 슬슬 지겨웠다.
이번에 와서 하는 일이라고는 눈동자를 흔드는 것뿐이었으니 나의 감정은 지극히 당연했다.
너무나도 보편타당했고.
적당하게 한숨을 쉬며 슬며시 손을 뻗어서 상소 하나를 잡았다.
펼치면서 더 크게 한숨을 또 내뱉어줬다.
글자가 보이는 상황에 이르자 눈을 동그랗게 만들어줬다.
“허.”
나지막한 침음성을 내뱉었다.
곁눈길로 보니, 불안한지 뇌호의 눈동자가 부지런히 흔들려주고 있었다.
나는 과장되게 쓰게 웃었다.
“윤휴의 상소도 있군요.”
“그가 또 뭐라고 했소? 압송을 운운하며 황상 폐하의 권위를…….”
“연좌와 법회를 주도한 친청파를 모조리 벌하라는 내용입니다.”
뇌호의 안색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