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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210화 (210/298)

210화 만세 만세 만만세(16)

뇌호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어깨가 경련하듯 떨렸다.

평생 이런 억지를 들어보지 못했다.

이토록 황당무계한 감정이 생기게 한 주체를 쳐다봤다.

어처구니없게도 손에 쥔 상소를 보고 고뇌하고 있었다.

바로 조선의 군왕이었다.

“……전하.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시선이 마주쳤다.

헛기침이 나올 정도로 눈동자가 청량했다.

이연의 손에서 상소가 내려갔다.

“듣지 못하셨소? 나는 우리 사대부의 압송을 윤허할 수 없소.”

상소를 올린 윤휴를 벌할 수 없다는 말도 아니었다.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호기롭게 행동하고 있다.

종래 정치 문법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뇌호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황상 폐하의 신하가 다쳤습니다.”

“조선의 국법에 따라서 그들을 벌할 것이오. 그러나 압송은 불가하오.”

“분명 압송을 약조받았습니다.”

“그 약조를 내가 했소?”

“전하. 본부장 송시열은 전권을 행사하는 대신입니다.”

“누가 그러오?”

“…….”

“나는 그런 교지를 내리거나 이른 적이 한 번도 없소. 혹시 황상 폐하께서 황명으로 조선의 전권은 본부장 송시열에게 있다고 하셨소? 음. 이건 내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경우라 조금 당혹스럽소만.”

이건 대체 무슨 논리일까?

기력이 쇠하면 듣고 졸도할 정도로 성의를 찾아볼 수 없는 답변이 아닌가.

벽과 대화해도 이보다 답답하고 놀라지 않을 것만 같았다.

작금의 조선에서 가장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은 바로 조선 왕이었다.

“……소인이 모든 사정을 황상께 고할 것입니다.”

“몇 번을 말하오?”

이연의 입꼬리가 걷잡을 수 없이 올라갔다.

바라보는 뇌호의 눈동자에는 불안함이 엄습했다.

“얼마든지 그리하라고 했소. 때가 될 때 조선은 청 태조의 사당을 세우면 그만이오.”

그야말로 무적의 논리였다.

도무지 돌파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청 태조의 사당을 도구로 사용하는 조선 왕을 무슨 수로 감당할 수 있겠는가.

뇌호는 울렁거리는 속을 겨우 진정시키며 말했다.

“대체 소인에게 어찌하여 이러시는 겁니까.”

“더는 할 말이 없소. 그러니 물러가시오.”

“전하…….”

“물러가라는 말을 듣지 못했소? 혹시 황명이라도 받아와야 하오?”

“…….”

끝을 가늠할 수도 없는 조롱을 더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참고 물러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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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을 만날 때마다 충격을 받았다.

얻는 건 근심과 걱정뿐이었다.

넋이 나간 상태로 퇴궐하는 뇌호의 온몸은 땀이 가득했다.

특히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거칠게 오른손을 움직이며 불편함의 원인을 치워낼 때였다.

“대인.”

정말 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목소리였다.

억지로 미소를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윤선거의 얼굴을 본 뇌호는 울컥했다.

그만큼 최근에 경험한 일련의 사안들이 너무나도 끔찍했기 때문이었다.

“소인이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은 무슨 말이라도 들어야 했다.

자연스레 윤선거의 집무실에서 제대로 된 대화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윤선거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뇌호도 근심과 걱정의 영역에서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았기에 떨떠름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약속한 것처럼 거의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눈이 마주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

“…….”

짧게나마 눈빛을 교환했다.

먼저 말을 꺼낸 건 사상 초유의 굴욕과 직면한 뇌호였다.

“조선의 상황이 참으로 괴이하오.”

“실은 대인께 청이 있습니다.”

“……갑자기 청이 있다고요? 기어이 예판도 괴이함을 선택하셨소?”

“송구합니다. 하지만 자식의 일이니 어찌 냉정하게 사고하고 이성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자식이라고 하셨소?”

“부족하지만 소인의 아들이 친청파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알고 있소.”

예조판서 윤선거의 아들은 바로 윤증이었다.

절대 모를 수 없었다.

“한데, 무슨 일이기에 아들의 일로 내게 청을 한다는 것이오?”

“조정의 일각에서 친청파를 벌하라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내가 어찌 모르겠소? 조선이 진실로 대청의 번국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외다.”

윤휴의 일도 있었으나 차마 입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수치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문제를 언급하면 조선 왕의 광기까지 말해야 한다.

그리된다면 그나마 우호적인 윤선거까지 척을 지게 될 것이니 경거망동할 수가 없었다.

“소인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 문제로 예조판서인 소인의 처지가 난처하고, 아들이 화를 입을 수도 있게 되었으니 어찌 난처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했소. 하지만, 그 모든 일은 조선의 내정이외다. 내가 어찌할 방법과 명분이 없소.”

“대인. 설마 소인이 그저 신세 한탄이나 하고자 모셨겠습니까.”

“무슨 말이오?”

“조선은 사대부의 언로가 무엇보다 중요한 나라입니다.”

“지독하게 경험했소.”

“소인의 아들이 주장하는 새로운 재조지은 역시 조정의 방침으로 세워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은……?”

“예. 소인이 지원하겠습니다.”

“허.”

최근 차갑게 식었던 뇌호의 심장이 다시 뛰었다.

이런 흐름이라면 조선의 예조판서가 친청의 구심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복잡하게 생각하거나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아들 윤증이 걸린 일이지 않은가.

“윤휴가 상소를 올렸으나 연좌로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조선의 도성이지만 반청을 부르짖는 연좌를 감행한다는 건 정치적으로 불가능하니 말입니다.”

“감히 그리 나선다는 건 선전포고요.”

“그렇습니다. 이러하니 결국 친청은 연좌를 진행할 수 있으나 반청은 고작 상소에 그칠 것입니다. 하면, 능히 승산이 있습니다.”

“음.”

“결국, 대인께서 대국 사신단 정사로서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어찌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

빈틈을 찾아볼 수 없는 건 당연했다.

가장 핵심적인 건 화가 미칠 경우의 수가 존재하지 않으며, 품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뇌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대인께서 결심을 세우신다면 소인이 진행해보겠습니다.”

“예판이 이렇게까지 청하는데 어찌 거절만 할 수 있겠소이까.”

흔쾌히 동의하자 윤선거가 환하게 웃었다.

뇌호도 화답하듯 진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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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거와 제대로 된 대화라는 걸 하고 고작 하루가 지났다.

뇌호의 눈앞에는 딱딱하게 굳은 안색을 한 변승업이 몸을 잔뜩 낮추고 있었다.

“지난날의 무례는 너그럽게 용서해주십시오.”

“참으로 뻔뻔하군.”

“다시는 대인의 심기를 상하게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뇌호는 오만한 시선으로 자세를 낮출 수 있을 만큼 낮춘 변승업을 내려봤다.

“참으로 우습군. 그토록 건방지게 행동하더니 바로 이렇게 태세를 전환하다니 말이야.”

“송구합니다.”

“대국 사신단의 정사인 나는 우습고, 조선의 대신을 그토록 두려워하니 뭐 하러 여기에 있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예조판서인 윤선거의 압박에 변승업이 이 자리를 찾아온 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좋은 일이지만, 과정이 너무 불쾌했다.

뇌호가 참을 이유가 전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네가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승려들의 법회를 지원하겠습니다.”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지 않나?”

“……뜻한 바를 이르시면 수행할 것입니다.”

자세와 관점이 너무 훌륭하지 않은가.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뇌호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꿈틀거렸다.

“일전에 본국과 조선의 무역을 언급했다.”

“그렇습니다.”

“이는 너의 이익이다. 그러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네가 해내야 할 것이다.”

변승업의 안색이 다소 어두워졌다.

그 꼴이 못마땅한 뇌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노려봤다.

“애초 그 일을 내게 언급한 건 네놈이었다. 한데, 오늘 보니 내키지 않나 보군.”

“아, 아닙니다. 다만, 소인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기에 머뭇거려질 뿐입니다.”

“우습군. 누가 이 일을 모두 네가 해내라고 했겠느냐?”

“대인의 말씀은…….”

“단지 무역을 확대하는 것이 아니다. 양국의 국경을 전면적으로 열어낸다면 조선이 어찌 대국의 위세를 감당할 수 있겠나?”

변승업의 눈동자가 출렁이듯 흔들렸다.

뇌호의 눈동자는 끈적한 열기가 담겨 있었다.

“무역의 일원화로 조선은 대국에 더욱 예속될 것이다. 우리 황상 폐하께서는 이를 아주 반기실 것이야. 그러니 이제 알겠느냐? 나는 너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야.”

“소인은 죽을 때까지 대인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뭐하나? 당장 움직이게.”

변승업은 황급히 예를 취하며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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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너무 기쁜 나머지 변승업을 끌어안을 뻔했다.

물론 이런 엄청난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미치도록 답답하던 뇌호가 드디어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했군.”

“휴. 그렇습니다. 하마터면 소인이 직접 하나씩 가르쳐 줄 뻔했습니다.”

“하하하. 일전에 이미 방법을 충분히 일러주지 않았는가.”

“그 정도로는 알아듣지 못하여 여기까지 흘러온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나는 생글거리며 웃었다.

지금의 즐거움을 마음껏 만끽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좋은 일만 생길 것이니 너무나도 뿌듯했다.

“이로써 무역의 확대는 우리 조선이 아니라 청국의 일방적인 요구로 진행될 것이네.”

“그렇습니다. 최종안을 황제가 반려할 가능성이 급격하게 줄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이 고생을 한 건, 최종 결정권자가 이연도 아니고 뇌호도 아닌 청나라 황제이기 때문이었다.

그와 직접 협상할 수는 없기에 최대한 상황을 비틀고 돌려서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세부적인 내용을 논의할 때 우리의 요구를 정확하게 관철해야 할 것이야.”

“물론입니다. 한데, 대감.”

“말하게.”

“대국과 무역을 일원화하는 일입니다. 우리 조선이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지극히 당연한 의문이었다.

양국의 체급은 아예 비교조차 될 수 없다.

그러니 조선의 경제가 청국에 예속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시절에서는 그러했다.

“원래라면 감당할 수 없지.”

경신 대기근이라는 변수는 그동안 인간이 축적한 보편성을 잘근잘근 씹어 먹을 것이다.

나의 자신감을 본 변승업은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조선 최고의 상인으로서 여러 생각이 들 수밖에 없겠지만 나에 대한 신뢰가 앞섰기에 더 나서지 않은 것이다.

이건 아주 참되고 좋은 자세였다.

“그러면 어장세는 어찌하실 겁니까.”

“단 일 할도 내지 않을 것이네.”

“가능하겠습니까?”

진심을 담아서 방긋 웃었다.

“우리는 충성스러운 신하의 나라가 아니겠는가.”

절대로 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자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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