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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211화 (211/298)

211화 만세 만세 만만세(17)

강태공이 울고 갈 윤선거의 낚시와 변승업의 열연은 기어이 친청의 불길을 일으켰다.

이전에 이연이 조선에서 청 태조의 사당이 건립될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했다.

그런데도 들불처럼 일어선 처능과 윤증의 ‘진실한’ 움직임에 담긴 정치적 무게감은 전과 비교할 수 없었다.

조선의 도성 한양도성의 심장부인 육조거리에서 군왕의 방침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연좌와 법회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자연스레 최고 수혜자가 된 뇌호는 크게 기쁠 수밖에 없었다.

이건 필연적인 일이기에 가볍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도 놀라운 건 있었다.

나는 사람의 표정이 이토록 입체적일 수 있다는 걸 지금에서야 알았다.

한때 분명 존재했던 품위 있고 절제된 표정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너무 신기해서 무례해 보일 정도로 빤히 쳐다봤다.

눈 한 번 껌뻑이지 않고 계속 쳐다봤다.

“사람을 찾아와서 이 무슨 무례한 행위요?”

이런.

대국 사신단의 정사께서 노여워하신다.

나는 크게 두려워 손을 어지럽게 움직이면서 말했다.

“대인의 안색이 밝으시어 기쁜 마음에 바라본 것이었습니다. 언짢으셨다면 너그럽게 이해해주십시오.”

“되었소.”

“사실 오랜 조선 일정을 끝나고 귀국이 다가오고 있으니 어찌 마음이 가볍지 않으시겠습니까.”

“뭐요?”

“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소? 이보시오. 대체 누가 귀국을 앞두었소?”

“대인께서는 조만간 귀국하지 않습니까?”

나는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그러자 뇌호가 불쾌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고 코웃음까지 치며 말했다.

“다시 묻겠소. 대답 똑바로 하시오. 누가 귀국하오?”

“응당 대인이지요.”

“이보시오. 나와 농이라도 하자는 것이오?”

“아니, 농이라니요? 이토록 중차대한 사안에 소인이 어찌 농이나 하고 있겠습니까.”

“됐소. 이참에 분명하게 말하리다. 나는 귀국하지 않소.”

“예……?”

“흥. 조선에서 대국의 재조지은을 청하는데 어찌 사신단의 정사로 그냥 물러날 수 있겠소?”

“대인. 윤증과 처능이 나섰으나 오래갈 수 없습니다. 이미 우리 전하께서 불허하신 일입니다.”

“참으로 모순이구려. 그간 조선은 언로를 중시하기에 탄압할 수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소. 하여, 나는 불쾌함이 밀려오는 순간에도 매번 참았소. 한데, 희한하게도 이번은 정리가 되오?”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소인의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시끄럽소. 조선의 정치와 별개로 더는 조선에서 본국의 태조를 가볍게 여기는 걸 용납할 수 없소. 그러니 감히 함부로 나서지 마시오.”

엄청난 자신감이었다.

무려 예조판서인 윤선거의 개입이라는 정치적 이유와 더불어 더 물러설 수 없다는 각오가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엄청나게 악에 받친 상태라는 것이다.

지금 보니까 눈빛도 정상이 아니었다.

이 정도라면 이연이 축객령을 내려도 싫다며 버틸 것 같았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고단하오. 나를 찾아온 이유나 꺼내시오.”

“음. 일전에 대인께서는 변승업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 또 그 일이오? 공과 조선의 조정이 믿지 않더라도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소. 물론 내가 변승업과 만난 건 사실이오. 이것을 문제로 삼는다면 나는 더 할 말이 없소.”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정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몰랐다면 믿게 될 정도로 탁월한 연기력이었다.

과연 초강대국인 대청 황제의 신하다운 패기였다.

절로 몸이 위축되어야만 했다.

이건 이대로 힘들었으나 나는 기어이 해내고 말았다.

“대인. 변승업이 소인을 찾아왔습니다.”

“해서요? 그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소?”

“조선과 대국의 전면 무역을 제안했습니다.”

“내게도 청탁한 건 사실이외다.”

“혹시 대인께서는 어찌 답하셨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점입가경이란 이럴 때 사용하는 말이 아니겠소?”

다시 시작된 엄청난 압박이었다.

어깨를 조금씩 오므리며 움츠려줬다.

“양국의 무역이 이번에 공식적으로 논의된 바도 없소. 설령 말이 나온다면 공론을 통해야 하오. 한데, 고작 상인 따위의 청탁에 내가 무슨 의견을 피력해야 하오?”

“어찌 대인의 말씀이 틀렸다고 하겠습니까.”

“하. 되돌아보면 공은 물론이거니와 조선 조정에 여러 편의를 제공한 건 사실이외다. 하지만 이는 굳건하게 손을 맞잡았기 때문이오. 그러나 더는 곤란하오. 과유불급도 지금 상황을 담아내지 못할 것이외다.”

뇌호는 턱을 끌어 올리기까지 했다.

감히 시선을 마주하기도 어려운 기세였다.

나는 난처하여 멋쩍은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대인의 말씀입니다. 어찌 새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되었소. 한데, 양국의 무역을 어쩌겠다는 것이오?”

“말씀대로 변승업은 일개 상인에 불과한 인물입니다. 그가 중대본의 수립과 운영에 큰 공을 세운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수백 년간 이어진 조정의 방침입니다. 변동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해서요?”

“그런데도 여쭤본 것은 혹시라도 대인의 뜻이 담겼을까 확인하고자 한 것입니다.”

“허.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와 어떠한 논의도 하지 않았소. 황상 폐하의 대리인인 내가 어찌 일개 상인과…….”

“물론입니다.”

계속 들어주는 건 괜찮다.

하지만 사시나무 떨듯 두려워하는 리액션을 계속하는 건 너무 곤혹스럽다.

그래서 그냥 잘라버렸다.

나도 살아야 하니까.

과연 뇌호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로서는 이 사안으로 계속 질척이고 싶을 건데 내가 끝낼 듯 딱 잘라버리자 속이 따가울 것이다.

또한, 제 능력으로는 이 사안을 제대로 끌고 갈 수 없다는 걸 다시 각인시켜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고로 모래성에 올라선 허장성세란 이토록 허망한 것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애써 보지 못한 척 오른손으로 이마를 잠시 짚어줬다.

정말 마지막이었기에 아주 짧은 시간만 자세를 유지했다.

자연스레 손을 내리며 말했다.

“대인은 황상 폐하의 대리인입니다. 이토록 지고한 위치에 계시기에 대인의 말은 곧 황상 폐하의 황명입니다. 만일, 변승업에게 짧게라도 언질 주셨다면 우리 조정이 제대로 논의하는 게 합당하여 여쭤본 것이었습니다.”

정석대로라면 청 사신단이 말이라도 꺼내면 우리는 무조건 논의해야 한다.

즉, 내 말은 지극한 원론이었고 가장 위력적인 정치적 언어였다.

물론, 작금의 조선이 꾀하는 괴상망측한 음모는 덮어두자.

“단지 이를 확인하고자 한 것이니 노여워 마십시오.”

“…….”

“또, 소인이 결례를 범했다면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하면…….”

말끝을 흐렸고, 목소리가 떨렸다.

심지어 눈동자도 어지럽게 흔들렸다.

정말로 진짜 이번까지만 못 본 척해줬다.

단전의 모든 내공과 영혼까지 끌어 올린 연기력이었다.

영혼까지 끌어낸 연기력이었다.

“백지화되는 것이오?”

“양국의 전면 무역을 이르십니까? 애초 논의가 된 적이 없는데 백지화라는 말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소. 한데, 공의 말을 듣다 보니 문뜩 떠오르는 것이 있소.”

“무슨 말씀입니까.”

“일찍이 공과 나는 크게 의기투합하였소.”

“어찌 잊겠습니까.”

“하지만 이번에 여러 불미스러운 일로 크게 틀어졌소.”

“되돌아보면 오해가 커진 게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소인은 진실로 대인과의 관계가 어그러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한 것이 아니외다.”

“음. 혹시 대인께서 뜻한 바가 있으십니까.”

“실은 양국의 무역을 확대하는 건 결국 우호를 증진하는 방향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잠시 해봤소.”

“허.”

곤혹스럽다는 듯 시선도 피해줬다.

하지만 뇌호는 이미 말을 내뱉었기에 상당히 저돌적이었다.

“물론, 내가 어떤 결과를 염두에 둔 건 아니외다. 이건 전혀 중요하지 않소.”

“…….”

“조선의 오랜 방침도 있지 않겠소? 내가 다 알고 있소. 그러나 양국의 우호를 더 증진한다는 과정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니겠소?”

“음.”

“왜 그러시오?”

“아닙니다. 대인의 말씀이 참으로 지당합니다.”

짧게 감돌던 미세한 긴장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또한, 뇌호의 안색도 대번에 밝아졌다.

지금은 아예 숨길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기에 숨 쉬듯 그냥 알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였다.

“한데, 염두에 두신 방향이 있습니까?”

“사실 귀공과 나는 정치하는 사람이오. 무역이라면 상인의 말이 가장 정확하지 않겠소?”

“그건 그렇습니다.”

“나도 이참에 변승업과 허심탄회하게 대화해볼까 하는데 공의 생각은 어떻소?”

“나쁘지 않은 듯합니다.”

“음.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의 말대로 전면 무역은 어떻소?”

“……전면 무역이라고 하셨습니까?”

뇌호는 다소 어색하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저 양국의 우호를 논하자는 것이외다.”

“음.”

“그저 조선 조정의 논의이기에 황명이 개입할 여지도 없소. 그러니 어려울 게 뭐가 있겠소?”

이만하면 충분했다.

고개를 한두 번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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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호는 기어이 여기까지 일을 일궈낸 스스로가 너무나도 자랑스러웠다.

흡족함이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육조거리를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그런데 갑자기 더워졌다.

이런 불쾌하고 황당한 상황을 확실하게 느낀 적이 있었다.

“대인.”

오만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역시 윤휴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 즉시 미간 사이에 깊게 팬 주름이 흉악해질 정도였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필요 없소.”

“소생이 최근 ‘역사’를 공부했습니다.”

“나는 귀공과 할 말이 없소.”

“들으셔야 할 겁니다.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이니 말입니다.”

“허.”

어찌 이토록 오만방자할 수가 있단 말인가.

꽉 쥔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오른손 소매를 움직여 펄럭이며 말했다.

“듣기 싫소.”

“우리 조선에 대국의 사서(史書)가 있습니다. 이를 알려드리지 않을 수가 없지요.”

“뭐요……?”

“소생이 우연히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니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썩 내키지 않았으나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다만 의문을 먼저 풀고자 했다.

“대국의 역사라고 했소. 한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는 건 무슨 말이오?”

“아.”

윤휴가 화사하게 웃었다.

바라보던 뇌호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당장 말문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치밀었다.

“일찍이 우리 조선의 태조께서는 여진 26개 부족을 거느리셨습니다.”

“……무슨 말이오?”

“그중 맹특목(아이신기오로 먼터무, 청의 원 황제, 청 태조 누르하치의 6대조)이라는 부족장이 있더군요.”

“!!!”

“혹시 대인께서도 이를 알고 계십니까?”

“감히!”

감히 청 태조의 6대조를 언급했다.

심지어 조롱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뇌호의 화가 폭발하는 건 당연했다.

“목숨이 몇 개라도 되는가? 당장 죽고 싶나?”

그런데 윤휴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화가 나십니까?”

“혀를 자르고 사지를 찢을 것이다.”

“큭. 해보십시오.”

“!!!”

“그리 주장한들 반대하는 사람은 많으나 찬성하는 이는 한 명도 없을 겁니다.”

윤휴의 언행에는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당장 내일 죽을 사람도 이럴 수는 없을 것이다.

심지어 손끝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구름을 가를 듯 휘젓기까지 했다.

“결론적으로 소생은 역사의 진실을 마주하며 참으로 소름이 끼쳤습니다. 우리 태조의 수하였던 인물의 후손을 어찌 기릴 수 있겠습니까?”

“뭐라!”

“마음껏 노여워하십시오. 하지만 진실이 가려지는 건 아닙니다.”

윤휴는 너무나도 여유롭게 등을 돌렸다.

뇌호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다시 말을 섞고 싶지 않은 조선 왕이었으니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따져야 했다.

숨도 안 쉬고 달려서 알현을 청했다.

그런데

“증좌(證左)가 있소?”

조선 왕의 반응이 그야말로 걸작이었다.

그냥 말문이 막혔다.

숨 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예상을 넘어서는 광기였다.

“한데 말이외다.”

“…….”

“그 말만 보면 사실이긴 하지 않소?”

“!!!”

뇌호는 목젖까지 떨리는 것만 같았다.

하마터면 험한 말이 나올 뻔했다.

조금만 수양이 될 됐다면 참지 못했을 것 같았다.

“내 말이 틀렸소?”

그냥 궐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지금.

이대로.

영원히.

아무도 없는 곳에서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조선 왕은 광인(狂人)이 분명하다고 말이다.

그러나 전후 맥락을 모두 살펴봐도 윤휴의 죄가 명백하다.

이조차도 문제 삼을 수 없다면 대국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뇌호는 강수를 두기로 했다.

“그리하지요.”

“무슨 뜻이오?”

“황상 폐하께서 누구의 말을 신뢰하는지 한번 보시지요.”

“…….”

“소인은 곧장 귀국하겠습니다.”

그런데

“전면 무역이 논의된다고 들었소.”

“그렇습니다.”

“공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겠소.”

오만하고 광증까지 보이던 조선 왕이 백기를 들었다.

결국, 고작 이 정도였다.

여태껏 보였던 패기가 어처구니없을 정도였다.

뇌호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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