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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212화 (212/298)

212화 만세 만세 만만세(18)

사실관계를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분명하게 뿌리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면 청 황제의 선대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수하였다.

이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확실했다.

하지만 덮고 살았다.

저들의 국세가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성한데 어찌 덮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러한 현실이었기에, 미친 게 아니라면 역사적 ‘사실’을 청나라 사신 앞에서 언급할 수는 없었다.

청 황제의 노발대발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어려운 걸 윤휴가 해냈다.

심지어 말도 아주 못되게 했다.

여기서 이연이 화룡점정(畵龍點睛)을 찍었다.

아주 뇌호를 환장하게 해버렸다.

어쩌면 여기까지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뇌호가 도통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발작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이 대목에서 소름이 끼치는 건 이연의 증언이었다.

-청사 뇌호 말이외다. 그냥 던져나 봐야겠다는 식으로 언급했소.

-…….

-그걸 받아서 두려워하는 시늉을 하려니 아주 어려웠소. 천운이 도와서 일이 잘 풀린 것이외다.

참으로 놀랄 일이 분명했다.

청 황실을 대놓고 조롱했는데 그냥 넘어가려고 했다니 말이다.

상상만 해도 가슴이 철렁할 일이었다.

물론, 우리에게 차선의 시나리오도 있긴 했다.

만일 뇌호가 이연의 압박에 바보처럼 밀려났다면 바로 조선에서 사신단을 파견하려고 했다.

그리고 황은을 베풀어주면 청 태조의 사당을 건립하겠다고 말하면 될 일이었다.

물론, 이건 차선답게 상황이 복잡할 수밖에 없고 지저분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연의 말대로 최선의 시나리오가 구현됐다.

최선은 펼쳐진 대로 뇌호가 이연에게 들이박는 것이었다.

우리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는 말로 다 설명할 수도 없다.

대국 사신단의 정사가 저렇게 위축되고 눈치를 살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물론, 지난번에 지부상소도 경험했고 이번에도 신나게 두들겨 팼더니 정신이 좀 어지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길을 알려줬던가.

그런데도 정신 못 차리고 머뭇거리니 답답해서 환장하고 죽어버릴 노릇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미 차선을 준비하는 대신이 많았다.

설마 뇌호가 최선을 선택할 것이라는 전망 자체가 회의적인 분위기였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뇌호는 기어이 우리의 소원을 이뤄주고야 말았다.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조선 조정 전체가 온 힘을 다해서 펼친 메소드 연기가 헛되지 않은 것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티 내고 다닐 수는 없다.

공식적으로는 우리가 청국의 압박에 무릎을 꿇은 것이니 말이다.

기쁨을 최대한 절제하며 말했다.

“부르셨습니까.”

“조선 조정의 논의가 너무 답답하여 불렀소.”

“휴. 대인. 수백 년의 방침을 손보는 일입니다. 어찌 가볍게 다룰 수 있겠습니까.”

“그렇소? 한데 말이외다. 내가 언제까지 조선에 머물러야 하오?”

“대인…….”

“허. 이보시오. 나는 황상의 대리인으로서 황명을 수행하오. 즉, 황상 폐하께 외교의 결과를 가져가야 할 막중한 임무를 가진 사람이라는 말이외다. 한데, 조선에서 결과를 도출하지 못하여 귀국이 미뤄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솔직히 이건 상당히 당황스러운 발언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동안 귀국 안 하려고 애처로울 정도로 자세를 낮추며 시간을 끌었다는 걸 내가 알고 있다.

이를 뇌호도 인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런 엄청난 발언을 하고 있다.

얼굴 두께가 어느 정도일지 감히 가늠도 할 수가 없었다.

각본, 감독, 주요 인물까지 도맡은 나로서는 흐린 눈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결과론적으로는 나쁜 게 아니었기에 애써 반길 수는 있었다.

“혹시 대인께 묘안이 있습니까?”

“일전에 보니 변승업의 안건이 제법 괜찮았소.”

“혹시 전면 무역을 이르십니까?”

“문제가 있소?”

“하지만…….”

“윤휴가 대국의 황실을 욕보였소. 나는 아직 이 사실을 잊지 않았소.”

“…….”

“이만하면 나도 크게 양보했다고 생각하오만?”

“…….”

아주 궁색한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렸다.

그러자 뇌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턱을 왼쪽으로 틀며 입꼬리까지 말아 올렸다.

과연 대국 사신단의 정사다웠다.

“원한다면 이대로 귀국할 수 있소.”

“……대인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하. 그 말이 그렇게 어렵소?”

“……송구합니다.”

“참으로 답답하오.”

“…….”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할 것이외다.”

“소인이 명심하겠습니다.”

“잘합시다.”

“예…….”

“이거 원 답답해서…….”

“…….”

참아야 하느니라.

진짜 조금만 덜 배웠으면 욕할 뻔했다.

딱 느낌이 왔다.

이대로라면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다는 걸 말이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릴 수는 없다.

그래서 말했다.

“차후 세세한 내용은 예조판서 윤선거가 전담하기로 했습니다.”

“아주 좋은 생각이오.”

“대인께서 만족하시니 참으로 기쁩니다.”

“흥. 처음부터 그랬어야 했소.”

와.

진짜 울컥해서 육두문자 꺼낼 뻔했다.

더는 위험하다는 적색신호가 제대로 울렸다.

꾹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면, 소인은 물러가겠습니다.”

“뭐. 그러시오.”

서둘러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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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호는 턱을 보기 불편할 정도로 올리고 있었다.

그래서 같은 눈높이라도 윤선거를 아래로 내려보는 모양새였다.

자세로서 위계가 무엇인지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다.

“변승업이 제시한 안건을 대인께 전하러 왔습니다.”

“허. 설마 일개 상인의 제안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오?”

“무역을 확대하는 건 조선이 황은을 입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예로운 일에 어찌 상인의 의견을 전적으로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분명히 변승업의 초안을 중시해야 한다고 언급했소만?”

뇌호는 거침없이 압박했다.

윤선거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송시열의 말을 떠올렸다.

-오랫동안 애를 먹인 우리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네. 그러니 뇌호는 본능적으로 대국 사신의 오만함‘만’을 앞세울 것이네. 그가 이성을 되찾기 전에 일을 모두 마무리해야만 하네.

정확한 판단이었다.

심지어 군왕조차도 물러선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는 모두 상황이 만들어낸 착각의 기회일 뿐이었다.

청사 뇌호는 절대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기에 최대한 빨리 일을 정리해야 했다.

재차 이를 상기한 윤선거는 가장 적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인이 실언했습니다. 그의 안건을 수용하되…….”

“되었소.”

뇌호는 일언지하로 말을 잘랐다.

여전히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변승업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대인. 조정은 소인의 안건을 수정할 겁니다.

-음. 자네의 초안이 좀 희한하긴 해. 들어보지 못한 내용이 많으니 조선 조정에서는 당연히 반려하지 않겠나?

-대인.

-가령 상단마다 관세(關稅)를 쌀로 징수한다는 내용은 쉽게 수용하기 어렵네만.

-국경을 거치는 모든 상단이 관세를 낼 것입니다. 어찌 대국에 손해가 되겠습니까.

-우리 상단의 규모가 크고 수가 많지 않은가. 그러니 더 많은 관세를 내게 될 것이네.

-대국과 조선의 상업 규모는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 큽니다. 점차 조선의 상업을 대국의 상단이 쥐락펴락할 것인데 어찌 탈이 있겠습니까. 결국 조선 조정은 징수한 관세를 상단의 보호에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대국의 상단이 다시 가져갈 것입니다.

-장담할 수 없는 일일세.

-해서, 조선은 대청 무역 상단을 일원화하는 것입니다.

-일원화?

-소인이 모두 전담할 것입니다. 그러니 조선 조정의 지원도 소인에게‘만’ 내려질 것입니다.

-이런. 가장 중요한 내용을 이제 말하는군.

-대인. 소인이 조선의 대청 무역을 장악한다면 대인께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더 말을 하지 않아도 이어질 말은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상념에서 벗어난 뇌호는 윤선거를 지그시 바라봤다.

“예판이라면 내 뜻을 알 것으로 생각했소만.”

“대인.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엇이오?”

“대청 전면 무역을 변승업의 제안대로 한다면 조선의 상단은 큰 위기를 맞이할 겁니다.”

“허. 그건 지나친 억측이오. 보시오. 상단마다 관세를 징수한다면 한 개의 상단으로 일원화한 조선보다 대국이 무조건 손해를 볼 수밖에 없소. 이를 황상 폐하의 황은으로 너그럽게 넘어가려는 것이외다.”

“황은을 어찌 가볍게 여기겠습니까. 하지만 소인에게도 명분이 필요합니다.”

“명분?”

“어장세의 조율입니다.”

“허. 이보시오. 예판. 감히 황상 폐하의 황명에 손을 대려는 것이오?”

뇌호가 재차 불쾌함을 표출했다.

그러나 윤선거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정색하며 따지듯 말했다.

“대인. 소인의 공은 잊으셨습니까?”

“뭐요? 예판. 지금 뭐라고 했소?”

“소인이 대청 무역에서 변승업을 제외할 수 있다고 여기지는 않으십니까? 설마 조선의 상단까지 대인께서 지정하실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뇌호는 멈칫했다.

큰 승리에 고취되어 잠시 잊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미동도 하지 않던 변승업을 하루 만에 움직이게 한 건 바로 윤선거였다.

조선의 상인일 수밖에 없는 변승업은 윤선거를 절대 감당할 수가 없었다.

단지 예조판서일 뿐만이 아니라 엄청난 존재감을 가진 인사가 아니었던가.

“변승업이 중대본에서 큰 역할을 하는 건 사실입니다. 우리 조정에서 그를 기특하게 여기지요. 한데, 그가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오판입니다. 조선은 변승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김근행이라는 상인도 있습니다. 그가 대일 무역을 담당하는데, 대청 무역까지 넘긴다면 참으로 기뻐할 겁니다.”

무조건 변승업이 조선의 대표 상단이 되어야 했다.

다른 상인이 등장하면 좋은 게 없었다.

뇌호는 일단 윤선거를 달래기로 했다.

그러나 미수에 그쳤다.

윤선거가 조금 더 빨랐기 때문이었다.

“소인이 아무런 조건도 없이 말을 꺼낸 건 아닙니다. 혹시 들어주시겠습니까?”

머뭇거리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윤선거의 말은 바람직했다.

뇌호는 넉넉하게 웃으며 답했다.

“물론이오. 내가 어찌 예판의 말을 가볍게 여기겠소?”

“영구적인 인하가 아닙니다. 단 10년만 어장세를 백지화해주십시오.”

“10년이라고 하셨소?”

“그렇습니다. 하면, 조선에서도 충분히 성의를 보일 겁니다.”

뇌호의 반응을 살피는 윤선거의 뇌리로 송시열의 말이 다시 스쳤다.

-미촌. 딱 10년이면 충분하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송시열이 없었다면 조선은 여기까지 달려올 수도 없었다.

동지로서 벗으로서 그를 신뢰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말을 따랐다.

“성의는 대인께서 생각하시는 그것이 맞습니다.”

무슨 말인지 대번에 이해했다.

뇌호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언젠가는 도모하고자 했으나 당장은 포기할 수밖에 없던 일이었다.

그런데 어쩌면 이를 단번에 집행할 수 있게 될 수도 있다.

물론 의문이 없는 건 아니었다.

“조선 내부의 반발이 거셀 것이오.”

“윤휴의 실언으로 조선은 궁지에 몰렸습니다. 소인이 이를 잘 활용한다면 어찌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직접 조선 조정에 활을 겨누겠다는 의미였다.

만일 수행한다면 지금껏 없었던 최고 거물의 친청파가 탄생하는 것이다.

실패해도 엄청난 정치적 의미가 있다.

뇌호는 승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황상 폐하의 황명을 얻어낼 것이오.”

“즉시 어선을 출항하게 할 것입니다.”

“허. 기다리지 않을 것이오?”

“대인. 신뢰는 이렇게 주고받아야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최종 결정권자는 결국 황제였다.

어떤 결론이 내려질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리 나온다는 건 완벽한 정치적 동거를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뇌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을 가득 담아서 말했다.

“공의 의리를 잊지 않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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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참으로 밝았다.

조선의 내일도 저와 같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한참이나 고개를 들어서 달을 바라봤다.

이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볍고 즐거웠다.

“참으로 오랜만이외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예를 취했다.

“노신이 전하를 오래 기다렸사옵니다.”

“신하는 당연히 그래야 하오.”

“하온데 노신이옵니다.”

“다 같은 신하요.”

“참으로 가혹하시옵니다?”

“그럴까 봐 묻고자 하오.”

이연이 웃음을 거두며 내게 말했다.

“아직도 경은 함께 노래할 수 없소?”

절대 잊을 수 없는 대화가 있었다.

오래전 이연과 나눈 것이었다.

-이판. 언젠가 조선을 노래할 날이 온다면 그때만큼은 꼭 함께하길 바라오.

-……반드시 함께 노래할 것이옵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다.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직은 아니옵니다.”

“아직도 아니오?”

“그러하옵니다.”

“허.”

이 대화 여기서 멈추고 싶었다.

적어도 오늘은 역사의 준엄한 기록이 아니라 작금의 대승을 자축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냥 피식 웃었다.

“전하.”

이심전심이었을까?

이연도 화답하듯 빙그레 웃었다.

웃음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참으로…….”

“만세 만세 만만세이옵니다.”

“과연 그렇소.”

그리고 결국

“하하하!”

이연은 크게 웃었다.

그리고 나도

“하하하!”

웃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간단하고 짧았으나 이보다 더 큰 자축은 없다.

진실로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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