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다가오는 소빙하기(1)
기다리고 기다리던 뇌호의 환송 행사였다.
그런데 걱정됐다.
“하하하.”
저러다가 입이 찢어지는 건 아닐지 너무 걱정됐다.
“하하하.”
너무 아슬아슬해서 내 마음이 불안할 정도였다.
벌써 몇 번이나 마른침을 넘겼다.
“하하하.”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호탕한 웃음을 멈추지 않는 뇌호를 바라만 봤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쳤는데 입꼬리가 하늘까지 올라갔다.
더 올라갔다가는 정말 입이 찢어질 거 같았다.
일이 잘 마무리됐는데 이러다가 탈이라도 생기면 큰 낭패였기에 황급히 말을 꺼냈다.
“이번에도 대인의 역할이 참으로 컸습니다.”
“그렇소?”
“물론입니다. 앞으로의 일이 간단하지는 않으나, 대인께서 계시니 어찌 걱정하겠습니까.”
“하하하. 본부장.”
뇌호는 호탕하게 웃으며 나를 지그시 쳐다봤다.
눈빛이 참으로 부담스러웠다.
“처음부터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소.”
“아.”
“과정에서 불필요한 대립도 있었으니 말이외다.”
“소인이 사죄드립니다.”
“되었소. 나는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으니 공도 털어내시오.”
과연 대국의 일원답게 배포가 남달랐다.
나는 크게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라 간의 일을 하다 보면 크고 작은 대립과 충돌은 늘 있을 수밖에 없소. 나는 이미 잊었으니 공도 그러시오.”
“그리할 것입니다.”
“물론, 앙금이 남아 있을 수도 있으나 오래 담아두지는 마시오.”
“소인은 앙금이 없었습니다.”
“가끔 자다가도 생각날 수도 있으나 그냥 잊으시오.”
“…….”
“밥을 먹을 때도 생각날 수 있을 것이외다.”
“……대인. 마지막 날인데 어찌 이러십니까.”
“음.”
뇌호는 나를 힐끗 보더니 뒷짐을 쥐며 말했다.
“다 들었소.”
“예?”
“공의 졸렬함이 조선 제일이라는 말을 말이외다.”
“…….”
“아니, 대략적인 내용만 들었는데도 대국의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었소. 참으로 놀랍고 두려웠소.”
“…….”
“그간 나와 다툰 일은 털어내는 것이 옳지만, 공이라면 두고두고 담아두고 이를 갈 것이 분명하니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가 있겠소?”
“……대체 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공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한 명이지요.”
“그래서 그게 누굽니까.”
“그가 화를 입을까 두렵소.”
주먹을 꽉 쥐고 말았다.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파르르 떨렸다.
뇌호는 흥미롭다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판이외다.”
“하…….”
“아무쪼록 그가 화를 입지 않길 바라오.”
“…….”
“하하하! 하면, 나는 이만 길을 떠나겠소. 참으로 꽉 찬 일정이었소.”
뇌호는 미친놈처럼 웃으면서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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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거리며 윤선거를 찾았으나 미수에 그쳤다.
눈치 빠르게 몸을 숨긴 게 분명했다.
그 기민함에 크게 감탄하고 한탄하며 귀가했다.
그런데
“대감.”
머리부터 발끝까지 번뇌로 가득한 처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낡고 늙었으며 여기까지 왔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말을 꺼냈다.
“약조는 지킬 것이네.”
번뇌가 밀려나긴 한 거 같다.
하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그늘이 보였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변화 자체에 대한 걱정이 원인일 것이다.
“특혜는 없을 것이며, 인원도 더 확충하지는 않을 것이네. 실력으로 응시하여 급제하길 바라겠네. 그런데 이런 뻔한 말을 듣고자 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네.”
“서얼의 잡과 응시를 박탈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긴 했네.”
“복원(復元)해주실 수는 없습니까.”
“경쟁자인데 복원을 청한다?”
“그렇습니다.”
처능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자애로운 미소와 선한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언행에는 사심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처능은 아니었다.
단적으로 서얼의 잡과 응시 복원을 청하는 것만 해도 그랬다.
이는 그저 세상의 평화를 바라는 말이 아니라 고도의 정치였다.
“자네, 변했군.”
“매사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합니다. 그러나 언제 살이 찢어질지 모르는 정치의 영역에 발을 내밀었다면 잠시 불자가 아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얼과 손을 잡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인가?”
“이미 손은 잡았지요. 거기에 소승이 작은 도움이라도 준다면 명백한 우호 세력이 될 것입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좋은 마음가짐일세.”
“하면, 좋은 답변 기대하겠습니다.”
“허. 듣지도 않고 가는가?”
“소승은 전했습니다. 결정은 대감의 일이지요. 한데, 기어이 이 자리에서 긍정적인 답변을 기다리고자 한다면 필시 조건이 생길 것이니 말만 전하는 것입니다.”
“허. 자네 정치력이 예사롭지 않군.”
“그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하하하. 알겠네. 그래도 답은 듣고 가시게.”
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의 말대로 하지.”
“소승은 의견을 전하였을 뿐입니다. 결정은 대감께서 하셨으니 아무런 빚이 없습니다.”
“끌. 그게 또 그렇게 되나?”
“그렇습니다.”
아주 단호했다.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로서도 처능이 정치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좋은 일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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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렇다.
이번 대청 외교를 진행하면서 조선의 뇌관을 제대로 건드렸다.
그래서 양반은 제 기득권에 도전하는 세력의 존재를 인지하게 됐다.
“소생은 이대로라면 곤란할 듯합니다만.”
그냥 편히 쉬려고 했으나 윤휴가 기다리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윤휴는 처능과는 달리 깔끔하고 담백한 대화를 선호하는 이가 아니었다.
질척이고 아주 귀찮은 사람이었다.
참으려고 해도 인상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정말 싫었다.
“자네가 불시에 찾아와서 내가 곤란할 것 같다는 생각은 안 하나?”
“소생이 거기까지 고려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허.”
요즘 내 주먹을 꽉 쥐게 만드는 사람이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다.
가늘어진 내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던 윤휴는 제 할 말만 쉬지 않고 이어갔다.
“그러니까…….”
너무 뻔한 말들이라고 졸음이 밀려왔다.
정말로 저항할 수 없는 하품도 이어졌다.
눈에서 물기까지 흘러나왔다.
흐린 눈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어지럽게 오른손을 휘저으며 윤휴의 말을 끊었다.
“그래서 양반을 어찌 달래자는 것인가.”
“그들에게 믿음을 줄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은 사대부가 위정자라는 사실은 불변(不變)하다는 믿음을 말하나?”
“그렇습니다.”
“그럴 것이네.”
“생각해두신 게 있습니까.”
늘 그렇지만 상황이라는 건 잘 고려해야 한다.
대청 전면 무역까지 목전에 왔다.
이는 경신 대기근을 방비하기 위한 정책적 흐름은 사실상 완성단계라는 걸 의미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열심히 일만 해야 했다.
이러할 때 내부의 분란이 커지는 건 절대 바람직하지 않았다.
상대가 조선의 위정자인 ‘양반’ 자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소생이 대감을 믿는 건 아니지만 들어봐야겠군요.”
“자네 화법이 대체 왜 그러나?”
“비단 소생의 탓만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아닙니다. 그러니 서둘러 일러주시겠습니까?”
“허. 거참.”
절로 헛웃음을 유발하는 윤휴였다.
정말 못마땅한 인사였다.
“특별하게 준비한 건 없네. 자네 말대로 ‘믿음’을 주면 되는 일이니까. 누구도 양반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다는 걸 분명하게 확인해주면 되는 일일세.”
“차린 게 없다고 하여 밥상이 아닌 건 아니지요. 그러니 더 자세히 말씀해주겠습니까?”
“다수의 양반은 결국 사족일세.”
“그렇습니다.”
“종래 그들이 행하였던 군현에서의 영향력을 공인해주면 될 일일세. 이리한다면 그들의 권위가 전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를 것이네.”
“수령의 통치에 개입할 수 있게 한다는 말씀입니까?”
“합법적인 조언이라는 좋은 표현도 있지 않나? 아. 서원에서 5현을 섬기는 군현은 제외하겠네. 의술 교육에 비협조적인 곳도 마찬가지일세.”
내 말에 무언가를 생각하던 윤휴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깊고 검은 눈동자로 나를 지그시 쳐다봤다.
희한하게도 오늘은 평소의 열기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예판 대감께 10년이라고 하셨다지요?”
“그랬네. 딱 10년만 어장세를 없애면 된다고 전했지.”
“10년이면 조선의 기근 대비가 완성된다고 여기시는 겁니까?”
경신 대기근을 알지 못하는 윤휴로서는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기도 했다.
10년이라는 세월 간 조선을 기근 대비에 가장 적합한 역량을 갖춘 나라로 만들겠다는 선언으로 분석되었을 것이니까.
그러니 얼추 맞는 말이긴 했다.
“그 이상 허비하면 이 나라 조선이 너무 비루하지 않겠나?”
“바꿔 말해서, 사족의 권위를 보장해주는 건 산발적인 기근이 발생했을 때 그들의 책임감을 극대화하는 결과로 귀결되겠군요. 반대로 10년간 군현의 공적 역량은 지킬 수 있을 것이고요.”
“바로 보았네.”
“사족이 모르겠습니까?”
“그러한들 따르지 않을 이유는 없지 않겠나?”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 알지 않은가. 우리 조선의 위정자는 일방적인 권한만 탐하는 이들이 아닐세. 현실의 위치와 권한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안다는 말일세. 그러니 거절하지 않을 것이네. 물론, 받지 않아도 상관은 없네. 이건 그들이 거절한 것이니까.”
“진통이 없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지금 사족의 대표인 자네에게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는 게 아니겠나?”
윤휴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얼굴에 그늘까지 생겼다.
“결국 소생에게 일을 떠넘길 생각이셨군요.”
“왜 이러나? 나를 찾아온 건 자네였네.”
“…….”
“아무쪼록 일을 잘 해결하길 바라네.”
“…….”
“내부 분란으로 기근 대비를 하지 못하는 건 참으로 슬픈 일이니까 말일세.”
윤휴의 얼굴이 상당히 붉어졌다.
아주 기분 좋은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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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푹 잤다.
“…….”
사실 며칠 푹 쉬었다.
큰일을 치르고 기력이 많이 떨어졌기에 어쩔 수 없었다.
개운해서 기분이 너무 좋았다.
더 쉬고 싶었으나 한창 일해야 할 나이라서 출근했다.
평화롭게 등청했는데 허적이 굉장히 무서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마터면 곧장 퇴청할 뻔했다.
하지만 다른 인사들이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지 않고 함께 무거운 안색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 이는 내가 아니라 중대본의 일이었다.
그래서 도주하지는 않았다.
차분하게 착석한 뒤 말을 꺼냈다.
“호판. 무슨 일이오?”
“각지에서 장계가 올라왔소.”
필시 기근과 관련된 내용일 것이다.
관성에 빠진 건 아니지만 하루 이틀의 일도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의연하게 대처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공기가 무거운 이유가 무엇일까?
“평안도 강계를 비롯한 여러 도에서 눈이 내렸소.”
여름에 눈이 내리는 미친 날씨는 제법 포착됐다.
“경기도, 충청도, 평안도, 강원도 등에 연달아 서리가 내렸다는 장계가 올라왔소.”
서리가 내릴 수도 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정확하게 원인을 잡아내지는 못하겠는데 묘하게 걸렸다.
머릿속이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내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 걸까.
“지금까지 발생한 재해와는 결이 다르오.”
허적을 쳐다봤다.
동시에 그의 말이 들렸다.
“조선 전역에 비슷한 현상이 일괄적으로 발생하고 있소.”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드디어 본격화되고 있었다.
소빙하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