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다가오는 소빙하기(2)
허적은 알고 있을까.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있을까?
소빙하기가 모습을 보이며 이 땅에 똬리를 틀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의 입으로 전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그러니까 경신 대기근이 다가오는 것이다.
압도적인 두려움이 내 몸을 지배했다.
“지금껏 기근은 특정 지역에 국한되었소. 경상도가 허덕이면 전라도는 버텼소. 또한, 내용도 달랐소. 전라도가 가뭄이 발생하면 경상도는 홍수가 일어났소. 그러나 지금은 모든 지역에서 같은 현상이 발생하고 있소.”
허적의 목소리는 잘게 떨렸다.
두려움마저 느껴졌다.
지금껏 내가 허적의 이런 모습은 경험하지 못했다.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이런 현상이 지속한다면 조선 전역에서 대흉작이 발생할 것이외다.”
너무나도 소름 돋는 통찰력이었다.
멍하게 바라만 봤다.
“곡물값은 폭등하고 역병이 걷잡을 수 없이 창궐할 것이오. 지금까지 없었던 규모의 기민이 생기고 아사자가 발생할 것이외다.”
들을수록 정확한 분석이었다.
그러나 지금 한가롭게 허적의 능력이나 경외하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또 쓰라린 건 다가오는 거대한 위기를 논의할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재앙을 해결하는 데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그러니 현재 해야 할 일은 파멸에 가까운 대자연의 횡포를 막는 것이었다.
막는다고?
아니었다.
필연적으로 만들어질 폐허를 복원하는 정도가 우리의 한계다.
“호판. 피해 규모가 어떻소?”
“더할 나위 없이 최악이오.”
중심을 잡아야 했다.
나는 그래야 한다.
“수치로 나타내는 게 무의미하오.”
그런데도 힘이 빠졌다.
“우리의 일은 오직 하나요.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지원을 감행하는 것이오.”
숨이 턱턱 막혀 인상을 찌푸렸다.
때마침 수북하게 쌓인 장계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장계를 펼쳤다.
“…….”
청 사신단과 외교전을 펼칠 때 허적, 허목, 윤선도 등 중대본의 실무 담당자들이 보낸 시간을 고스란히 알 수 있었다.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사방에서 발생하는 기근과 싸웠다.
물론 알던 사실이었으나 작금의 위기에 봉착하니 체감이 아예 달라졌다.
조선의 비참한 현실을 다시 깨달았다고 해야 할까?
솔직히 대청 전면 무역을 목전에 두면서 획기적인 전환이 이뤄졌다고 기뻐했다.
앞으로는 부지런히 비축하면서 경신 대기근을 방비하면 될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는 크나큰 착각에 불과했다.
자연이라는 존재는 너무나도 일방적이며 강렬했다.
가난한 나라 조선에 숨 쉴 시간 따위는 허락되지 않았다.
“본부장.”
“호판의 판단을 따르겠소. 아니, 전권을 수행하시오. 내게 의견을 물을 필요도 없소.”
실질적인 집행 판단은 내가 아니라 허적이 하는 게 옳았다.
그의 판단이 곧 중대본의 집행이니 말이다.
허적 역시 괜한 말은 집어넣고 바로 말을 꺼냈다.
“여러 감영과 기구에서 은 7,100여 냥, 면포 4만 8천 필, 쌀 3만 석, 벼 1만 석을 확보할 수 있소.”
이건 생각보다 파격적인 의견이었다.
중앙이 아니라 지방에 비축된 재화로 위기를 극복하자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부가 아니라 전액이었다.
반론을 제기할 생각은 없었으나 놀란 건 사실이라서 허적을 쳐다봤다.
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선 전역의 난리가 마치 하나의 군현을 어지럽히는 것과 같소. 아무리 나라의 영토가 크지 않다고 할지라도 전례 없는 현상인 건 분명하오.”
이 말을 들으니 우습게도 하늘이 우리의 사정을 봐줬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조선 전역에서 크고 작은 기근이 발생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중대본이 들썩일 정도의 재앙급 기근은 특정 지역에 국한되었다.
해서, 우리는 역량을 집중해서 해결할 수 있었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결과, 작금의 중대본은 특정 지역의 기근은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되자 조선 전역에 재앙을 내리고 있지 않은가?
마치 우리의 역량에 맞춰서 공격 수위를 올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두려워졌소. 하늘이 조선 전역에 일괄적으로 재앙을 내리는 일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소. 아니, 더 강도가 강해질 수도 있소.”
“…….”
“그래서 중앙의 진휼미는 최대한 보존하는 게 옳소.”
경신 대기근이라는 재앙을 모르는 허적이었다.
그러나 전례 없는 위기를 느끼고 있는 건 분명했다.
“기근은 갈수록 더 심해질 수도 있다는 본질적인 위기감을 가지고 중대본을 운영해야 하오. 본부장이 동의해주리라고 여겨도 되겠소?”
“이미 조금 전에 말하였소. 호판의 판단이 곧 중대본의 방침이외다.”
“고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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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마음으로 중대본을 나섰다.
그런데 다수의 관리가 내 앞을 막고 있었다.
당상관부터 당하관까지 품계도 다양했다.
의아하여 쳐다봤는데 한 사람이 대표로 나섰다.
“소인의 이름은…….”
“자네의 이름까지 기억할 정도로 한가한 시절이 아닐세. 용건을 말하겠나?”
“소인들은 청국을 진심으로 섬길 수 없습니다.”
하.
이런 미친 새끼들을 봤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눈동자에 경멸의 감정을 실어서 노려봤다.
너무 열이 뻗쳐서 욕도 안 나왔다.
“해서, 상소를 올리고 연좌를 강행하여 거짓 재조지은을 밀어내고자 했습니다.”
“적당히 하게.”
“그러나 미룰까 합니다.”
“……근래 들었던 말 중에서 가장 괴이하군.”
“조선 전역에 재앙이 내렸습니다.”
“…….”
“친명 사대를 품은 건 이 길이야말로 조선과 백성을 위하는 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소인들의 정치적 이권을 앞세운 게 아닙니다. 하여, 미룰 것입니다.”
“이 말을 굳이 내게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네.”
“이를 대감께 전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소인들은 진실로 친청을 동의할 수 없다는 사실만은 알아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
“친명 사대를 속에 품었다고 하여 명분에만 휩싸여 백성을 도외시하며 정치적인 분란을 일삼는 무도한 무리가 아니라는 걸 꼭 알아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그의 말이 끝났다.
그러자 다른 이들이 차례로 나섰다.
“소인은 아직 5현을 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겁니다.”
“소인은 위대한 길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관복의 무게를 잘 알고 있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 겁니다.”
“소인은…….”
그간 나의 길을 반대했던 이들이었다.
치열한 사상 투쟁까지 펼치면서 어쩌면 함께 길을 걷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길이 만나고 있었다.
심장이 간지러웠다.
나라 전체가 위기에 처했는데도 말이다.
슬쩍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잘 알겠네. 오늘의 대화를 기억할 것이네.”
관리들은 말을 더 보태지 않고 자연스레 흩어졌다.
제 역할을 일궈내고자 위치로 돌아가는 것이다.
마음이 한결 가볍고 편해졌다.
파멸적 재앙이 다가오고 있으나 저들이 있기에 버틸 수 있는 게 아닐까.
그저 홀로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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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당은 여러 군현을 종횡하며 사족을 만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반발도 있었으나 함께 하기로 한 사족도 제법 등장하여 성과를 도출할 수 있었다.
일정은 고되었으나 보람찼기에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에서 폭설이 내렸다.
동시에 박세당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아연실색(啞然失色)이라는 말은 그의 현재 상태를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
노상에는 주인 없는 시신들이 가득했다.
생전에 가족이 없었거나 난리 통에 함께 죽었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 움직이는 백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몰골도 말이 아니었다.
대부분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하고 추위에 떨었다.
시신의 옷을 벗기며 추위를 이겨내려는 사람도 있었다.
만류하는 이는 없었다.
아니, 서로 차지하고자 다투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참혹한 광경이었다.
박세당은 시선을 돌리지 않고 이를 악물며 모두 눈에 담았다.
주먹을 꽉 쥐며 바라보고 있을 때 사족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 우리 군현만의 일이 아닙니다.”
“일대가 모두 그리되었구려.”
“그렇습니다. 천지가 이렇습니다. 아마 지금쯤 조정으로 장계가 올라갔으니 어떤 대책이 있을 겁니다.”
사족의 말에 박세당은 고개를 저었다.
중대본이라고 해서 뾰족한 대책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연의 횡포에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저항이 아니라 생존을 모색하는 것에 불과하니 말이다.
박세당은 몸을 돌려서 그들을 쳐다봤다.
시선을 마주했다.
그들의 눈동자를 모두 살폈다.
“당장 백성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소.”
간결한 말이었다.
그러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사족은 없었다.
적어도 이 자리에 박세당과 발걸음을 맞춘 이들이라면 말이다.
“우리가 해야 하오.”
누구도 답변을 꺼내지는 않았다.
무겁게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를 치르고 위생을 집행해야 할 것이외다.”
“굶주린 백성에게 쌀을 내어줘야겠지요.”
“땔감이 참으로 많이 필요할 듯합니다.”
현재 가장 중요한 건 쌀과 땔감이었다.
늘 부족한 것들이었다.
“할 수 있는 만큼 해야 할 것이외다. 인근 군현에도 사람을 보내어 내 뜻을 전해주겠소?”
“물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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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아침에 군현 전체가 서리로 뒤덮였다.
얼마 뒤, 원인도 알 수 없는 역병이 창궐하여 순식간에 백성을 집어삼켰다.
하늘이 무너졌다는 말은 바로 이런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딱딱하게 굳은 처능의 안색은 도무지 펼쳐지지 않았다.
“대사. 아비규환이 따로 없습니다.”
“…….”
“조정에서 의원을 보내지 않는 이상 해결할 방안이 없습니다.”
처능은 고개를 저었다.
고통스러움이 잔뜩 담긴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그사이 얼마나 많은 백성이 죽어 나가겠는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역병입니다. 소승들의 의술로는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잡과를 준비하고자 도성으로 간 환속 승려들이 있을 것이다.”
“설마 그들을 부르실 생각입니까?”
“우리가 능력이 부족하여 모든 백성을 구할 수는 없네. 하지만 적어도 한 명은 더 살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자면 한 곳에 우리 역량을 집중할 필요가 있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을 부른다면 잡과를 치르지 못합니다.”
승려의 우려에 처능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세상이 혼란하여 뜻하지 않게 정치에 깊게 관여하였네. 그러나 중생들의 죽음을 모르쇠로 일관할 수는 없네.”
“…….”
“현실이 야박하다고 하여 우리가 독해질 수는 없지 않은가.”
처능은 염주를 꽉 쥐면서 승려들을 쳐다봤다.
“모든 환속 승려를 이곳으로 부르게. 그새 우리는 병자를 관리하고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저들을 보살펴야 할 것이네. 이견이 있는가?”
“어찌 반대하겠습니까. 가장 부처님에 가까운 행보이시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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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지에서 장계가 올라왔다.
늘 있는 일이지만 무언가 매끄럽지 않았다.
국가 비상사태인데 군현의 상황 수렴과 정책의 집행이 전처럼 부드럽지 않다고 해야 할까?
그러니까 말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 상황이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평양에서 온 관리를 쳐다봤다.
“비상시국인데 참으로 한가하군.”
“송구합니다. 사정이 있었습니다.”
“사정? 평양에서 도성까지 오는 데 3일이나 걸린 합당한 사정이 있나?”
“그렇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하루면 충분한 거리이거늘.”
“기근과 역병으로 역참이 텅 비고 파발이 부족하여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뭐……?”
“소인이 듣기로 심한 곳은 파발을 수행한 인원이 부재한 곳도 있었습니다.”
“…….”
머리가 어지러웠다.
기층에서 조선의 행정력이 뒤틀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