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고립무원(孤立無援)
군현에서 공문서를 들고 올라오던 관리가 전염병으로 죽었다.
결국, 다른 관리가 교대하여 문서를 챙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조정과 군현이 단절되고 있었다.
이 시절 역참이 마비되었다는 건 대한민국에서 인터넷이 고장 난 것과 같은 의미였다.
재앙의 스치는 파급효과는 조선 행정의 기초를 흔들어버렸다.
“그야말로 고립무원(孤立無援)이오.”
이연의 한마디는 모든 사람의 속내를 대변했다.
물론 도성이 군현과 아예 단절된 건 아니었다.
그저 ‘소식’을 주고받는 시간이 몇 배 더 걸리게 되었을 뿐이었다.
이 자체로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를 국가 전체로 확대하면 문제의 수위는 결이 달라진다.
“큰일이오. 군현과 군현의 소통도 전처럼 매끄럽지 않을 것이니 말이오.”
바로 이것이었다.
단지 도성과 군현의 소통만 단절되는 것이 아니었다.
군현과 군현도 고립화가 진행되는 것이었다.
하여, 작금의 위기는 고립무원이라는 말이 참으로 적절했다.
세상이 세상과 단절되고 있는 것이니까.
조선 전역이 소통하며 유기적으로 힘을 합쳐도 감당하기 어려운 난리였다.
하지만 재앙의 날갯짓 한 번에 단절됐다.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건 아니었으나 무기력함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당장 이를 해결할 방법이 없사옵니다.”
“역병으로 파발을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는데 어찌 대안이 있겠소. 만일, 있다고 했다면 경을 문책했을 것이외다.”
“하오나 이대로 지켜만 볼 수는 없사옵니다.”
“물론이오. 위생국과 내의원을 총동원하여 역병을 제압해야 할 것이오.”
재앙의 손짓으로 휘청이는 조선의 행정력을 복원하는 것.
지금 조정에서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은 바로 이것이었다.
구휼은 군현과 기구의 재원으로 집행되어야 하니 말이다.
“또한…….”
답답함과 쓰라림이 담긴 이연의 말이 낮게 깔렸다.
“조정의 방침을 각도마다 제대로 알려야 하오.”
“응당 그리해야 하옵니다. 즉각 고립무원의 정국을 전할 것이옵니다.”
상황 파악이 빠른 목민관이라면 현재 상황을 제법 잘 파악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조정에서 일관적인 지침이 내려지는 건 또 다른 영역의 일이었다.
“만일, 나서지 못하겠다면 모두 파직하시오.”
“전하. 심려치 마시옵소서. 이미 관리들이 결의를 다졌기에 그러한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자신감을 보였다.
그러나 이연의 표정이 희한했다.
정확하게는 아무런 기대감도 담겨 있지 않았다.
바라보다가 멈칫할 정도였다.
“작금의 난세는 괴이하기에 파발의 수행에도 목숨을 걸어야 하오. 경은 모든 관리가 겸허하게 이를 감당하며 나설 수 있다고 여기시오?”
“전하.”
“만일 그러했다면 왜란과 호란 때 몸을 사리고 도망치는 관리는 없어야 했소. 한데, 과연 그러했소? 아니외다. 말하고 보니 참으로 우습소. 군주도 그러한 시절이었는데 말이오.”
선조와 인조의 ‘도주’는 관리의 도주와 달리 명백한 정치적 행위였기에 이연의 말은 틀렸다.
하지만 이를 지적할 상황은 아니었다.
당연히 모르고 하는 말이 아닐 것이니 말이다.
“전하. 신은 우리 관리를 믿사옵니다. 하오니 전하께서도 어심을…….”
“괜찮소. 나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니 말이오. 그러나 용인할 생각도 없소. 수행을 거부한다면 그 자리에서 파직하시오. 경과 중대본에 전권을 위임하겠소.”
“응당 어명을 따를 것이옵니다.”
반론을 허용하지 않는 단호함이었기에 동의하며 물러났다.
그러나 나는 이연과 생각이 다소 달랐다.
불과 며칠 전에 제 역할을 찾겠다며 나선 관리들이었다.
친명 사대라는 정치적 DNA를 포기할 정도로 작금의 상황을 엄중하게 바라본 이들이었다.
그들이 관찰사에게 어명을 전하는 역할을 미루는 모습은 쉽사리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
“…….”
“…….”
이연의 판단은 너무나도 적중했다.
내 시선을 피하는 관리들을 보며 말문이 막혀버렸다.
며칠 전 결의를 보이던 이들이 맞는지조차 헷갈릴 정도였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어지러운 세상이라서 그러할까?
나는 감정을 추스르는 게 힘들었다.
겨우 갈무리하며 너무나도 힘들게 다시 말을 꺼냈다.
“고립무원의 정국과 관련한 여러 조정의 방침을 각 도로 전해야 하네.”
“…….”
“오늘 채비하고 내일 출발하게.”
“…….”
다시 정확하게 내용을 전했다.
그런데도 나와 시선을 마주치는 관리가 한 명도 없었다.
일제히 어색하고 난처한 미소만 내게 보여줄 뿐이었다.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실렸다.
노기가 뻗쳐 덜덜 떨렸다.
“너희는 사대부로서 제 역할을 찾겠다고 하였다. 한데, 조정의 일을 등한시하는 것인가?”
“소인들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뭐……?”
“그 말을 한 사람은 타인입니다. 소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무슨……!”
걷잡을 수 없는 노기가 치솟았다.
만일, 손에 뭔가 잡혔다면 집어 던졌을 것이다.
“감히 어명을 수행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소인들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저…….”
“하면, 내일 당장 떠나게.”
“…….”
“만일 수행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두 번 다시 관복을 입을 수 없을 것이다.”
대놓고 파직을 언급하였으나 아무런 불만도 제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물러가겠습니다.”
어떠한 미련도 보이지 않고 등을 돌렸다.
관복을 벗고자 하는 관리를 통제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멍하게 그들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그리고 이연의 자조적인 미소와 씁쓸한 표정이 너무나도 진하고 강렬하게 떠올랐다.
처음으로 회의감과 허탈함이 거세게 밀려왔다.
나는 무엇을 위하여 여기까지 달려왔던가?
-----
원래도 도성이나 삼남 지역보다 추운 서북 지역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추위는 너무나도 맹렬했다.
시도 때도 없는 눈과 서리로 농사가 망했는데도 아사자보다 동사하여 죽는 백성이 많았다.
즉, 굶주림보다 추위가 더 두려운 전대미문의 상태였다.
심지어 어제의 추위와 오늘의 추위가 달랐다.
하루가 1년처럼 변화무쌍했다.
땀조차 흐르지 않는 추위였다.
하지만 대책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추위를 감당하려면 불과 옷이 필요할 뿐이었으니 말이었다.
또. 그러했기에 해결책이 간단했다.
즉, 백성에게 옷 따위와 땔감을 제공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이는 시작부터 어려움에 봉착했다.
큰 소란이 발생한 곳에서는 다수의 포졸이 보였다.
가장 앞에는 도호부사가 있었다.
사족과 그들 사이에는 험악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러니까 대치 상황이었다.
황급히 당도한 박세당은 숨을 고를 시간도 없이 말을 꺼냈다.
“대체 무엇이 문제기에 백성을 구휼하는 우리를 막는 겁니까?”
이 추위에도 박세당의 몸은 뜨거웠다.
잠을 자는 시간도 아끼며 대책을 수립하기 위해서 미친 듯이 움직인 결과였다.
도호부사는 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법도를 어겼기 때문이오.”
“법도라고 하셨습니까?”
“지금 공들이 백성의 구휼에 사용하는 복식 재료가 무엇이오?”
“다양합니다.”
“그중 초피(貂皮)가 있다고 들었소.”
“대체 그게 무슨 문제라는…….”
말하던 박세당은 멈칫했다.
추위를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만 앞서서 놓친 부분이었다.
초피는 고가였기에 사대부가의 복식 재료로만 허용됐다.
즉, 양반이 아닌 이는 초피를 사용할 수 없었다.
“백성은 초피를 사용할 수 없소.”
조선의 법도가 이러했다.
박세당의 얼굴에는 곤혹스러움이 가득했다.
“다른 건 문제 삼지 않겠소. 그러나 초피는 곤란하오.”
“하지만…….”
“법도를 어길 수는 없소.”
“…….”
타협의 여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태도였다.
박세당은 속이 따가웠다.
도호부사의 손짓에 포졸이 움직였다.
그러나 박세당은 이대로 물러나지 않았다.
“영감!”
결국 포졸을 막으며 도호부사를 향해서 눈을 부라렸다.
초피를 놓친 건 명백한 실책이었다.
그러나 인지했어도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짚신을 뜯어서라도 덮을 수 있다면 그리해야 할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당장 백성이 추위에 떨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한데, 어찌 법도만을 내세우는 겁니까.”
“난세에 법도까지 무너지면 어찌 백성을 통제하오? 아무리 상황이 어렵다고 해도 지켜야 하는 게 법도요. 위정자가 이를 사수하지 않으면 또 다른 난세가 개막될 뿐이외다.”
“하지만…….”
“그 마음 잘 아오. 그러나 여기서 나와 다툴 시간에 한시라도 빨리 조정의 동의를 얻어내시오. 하면, 초피를 다시 내어주리다.”
철옹성도 이런 철옹성이 없었다.
그런데도 박세당은 자리를 지켰다.
더 절절하게 말을 꺼냈다.
“조정에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하여, 동의를 얻어내겠습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뜻대로 하시오.”
교지를 받아오라는 말이었다.
박세당은 곤혹스러웠다.
도호부사가 어떤 사람인지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또한, 그가 작금의 난세를 어찌 대처했는지도 알았다.
융통성이 부족했으나 뛰어난 목민관이었다.
무엇보다 과거 송시열이 바로 이곳에서 법도의 중요성을 날카롭게 역설하였다.
군역을 피하고자 고환을 자르던 백성을 모두 처벌하였지 않은가.
사실상 이를 재해 극복의 효시로 삼고 있는 도호부사를 설득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이를 되새길 때 중대본에서 초피의 사용을 허락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다가오는 포졸을 바라보며 곤혹스러움에 잠식됐다.
그때 묘안이 떠올랐다.
바로 조정의 답을 얻는 시간이었다.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불허의 답변이 내려진다면 초피를 자진하여 거두겠습니다.”
“…….”
“당장 동사하는 백성은 줄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부디 소생의 청을 들어주십시오.”
“……선생이 책임질 수 있소?”
“물론입니다.”
“무슨 자격으로 책임질 수 있소?”
다시 말문이 막혔다.
중대본의 일원이었으나 도호부사의 일을 어찌할 자격이 없었다.
또한, 이 일로 문제가 생긴다면 도호부사는 책임을 피할 수가 없었다.
박세당은 이를 무마할 위치도 아니었고, 권한도 없었다.
“책임질 수 없다면 책임이라는 말을 꺼내지 마시오.”
“…….”
“음. 듣자니 모든 군현에 난리가 났다고 하오.”
“예……?”
“도성으로 오고 가는 시일이 길어졌다던데, 결과가 언제 올 수 있을지는 쉽사리 장담할 수 없지 않겠소?”
도호부사가 묘안을 받은 것이다.
박세당의 얼굴이 환해졌다.
“세상이 어지러우니 거기까지 갈 관리를 찾기도 쉬운 일은 아닐 듯하오.”
“의기가 넘치는 관리가 있을 겁니다.”
“잘 없소.”
“아.”
“내가 찾아보긴 할 건데, 잘 없소.”
말뜻을 대번에 이해한 박세당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참으로 답답하오. 안 그렇소?”
“소인이 영감의 어려움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휴. 그건 그렇고 일손이 부족하오. 사대부가에는 여러 하인이 있으니 좀 보태면 좋을 것 같소. 인근의 땔감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겠소?”
“영감의 말을 모두 따를 것입니다.”
이렇게 문제 해결의 방책을 마련하게 됐다.
박세당은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