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각자도생(各自圖生)
조선은 사대부가 위정자다.
그리하여 조선은 사대부가 남다른 기개(氣槪)를 가지고 있다.
정도를 부르짖을 때는 관직은 물론이거니와 목숨까지 던질 수 있는 기개 말이다.
그러나
“하…….”
이런 저열한 기개는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다.
국가 비상사태에 몸을 사리는 관리들을 보고 있노라니 피가 차갑게 식는 것만 같았다.
“우암. 너무 마음을 쓰지 말게.”
“형님. 제가 너무 답답해서 그럽니다.”
“역병이 광범위하게 창궐하였네. 제 목숨을 귀하게 여기는 건 그들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네.”
송준길은 담담한 목소리로 나를 다독이듯 말했다.
왠지 모르겠으나 나는 괜히 울컥하여 말했다.
“형님은 화도 안 나십니까.”
“왜 화가 나지 않겠나. 한데, 이 또한 우리 조정의 역량이니 인정할 뿐이네.”
“더 답답한 건 이를 타개할 방법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겠지. 사직을 염두에 두고 거절할 것이니까.”
“정말 꼴도 보기 싫지만 이런 엄중한 상황일 때 조정의 실무에 부족함이라도 있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저들의 어처구니없는 행위를 지켜만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더 화가 납니다.”
어쩌면 내가 나도 모르게 조선의 사대부를 지나치게 고평가했을지도 모른다.
단적으로 지금껏 내가 본 이들의 의기는 현대 사회에서는 쉽사리 경험하기 힘들었던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반면, 당대를 살아왔던 송준길은 나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를 고려한다고 할지라도 송준길의 지나친 의연함은 의구심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의문은 쉽게 풀렸다.
“대안이 있을 수도 있네.”
“이런. 그토록 좋은 사실을 어찌하여 홀로 알고 계셨습니까. 목이 빠질 것만 같으니 당장 일러주십시오.”
“어차피 조정의 내용을 전하는 수준의 일이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하면, 관리가 아니어도 된다고 생각하네.”
“예……?”
“자네가 만든 세상일세. 양반이 아니어도 관복을 입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린 세상 말이네. 이를 벌써 잊으셨나?”
“허.”
송준길의 말대로였다.
2차 대청 외교를 거치면서 승려와 서얼의 정치적 위상은 전과 달라졌다.
그들은 훗날 위정자가 될 가능성을 취했다.
내가 정신적으로 충격이 심했던 게 분명하다.
이렇게 간단한 대안을 놓치고 있었다니 말이다.
환하게 웃으며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설마 제가 이토록 간단한 걸 놓쳤겠습니까?”
“뭐……?”
“저는 그저 우리 관리의 대오각성을 우선시했을 뿐입니다.”
“우암……?”
“답답하군요. 되었습니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게.”
“영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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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트자마자 변승업의 사가를 방문한 김근행의 얼굴은 참으로 심각했다.
긴히 상의한 일이 있기에 일찍 서둘렀으나 고민이 깊었기에 섣불리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산전수전을 다 겪으면 조선 최고의 상단을 이끌고 있었다.
그러한데 이토록 뜸을 들이는 걸 보면 사안이 무척이나 심각한 게 분명했다.
이를 고려한 변승업은 재촉하지 않고 차분하게 기다렸다.
그래서 두 사람은 심각한 표정으로 마주 보고 있을 뿐이었다.
“…….”
“…….”
그러다 보니 어느새 해가 중천에 이르렀다.
결국, 참다못한 변승업이 입을 열었다.
“계속 기다려야 하나?”
“음.”
“내가 말을 아끼는 건 아닐 것이네. 하면, 쉽사리 말을 꺼내기 어려운 사안이라는 것이겠지. 대체 무엇인가? 조선의 근간을 흔들 일이라도 되는가?”
“자네는 작금의 상황을 어찌 바라보고 있나?”
“재해를 이르나?”
“그렇다네.”
“파멸적인 수준이라는 건 잘 알고 있네.”
“하면, 조정이 능히 대처할 수 있겠나?”
상당히 무거운 주제였다.
변승업은 오른손 엄지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중대본이 여러 방책을 집행하고 있네.”
“원론을 묻는 게 아닐세. 역량이 되냐고 묻는 걸세. 정확하게는 재원이네.”
“음. 이런 수준의 기근이나 역병이 지속하여 발생한다면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네. 국고가 완전히 바닥을 보일 수도 있겠지.”
“재원이 부족할수록 조정은 화폐 주조의 유혹은 강렬해지는 법일세. 더욱이 작금의 조정은 화폐 주조의 의지까지 크지 않은가. 모든 상황이 화폐 조선의 길로 나아가고 있네.”
화폐 조선.
듣기만 해도 심장이 뜨거워지는 단어였다.
변승업은 진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의 말이 참으로 지당하네. 혹시 주조의 규모도 가늠해봤나?”
“족히 50만 냥은 가능하지 않겠나?”
“50만 냥이라…….”
실로 엄청난 규모였다.
집행되는 순간 조선의 상단은 엄청난 성장을 할 것이다.
아니, 조선이라는 나라의 체질 자체가 바뀔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화폐 조선의 시작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상상하던 변승업의 입꼬리는 묘한 궤적을 그리며 올라갔다.
“좋군. 한데,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를 그토록 오래 고민하지는 않았을 것이네. 아. 혹시 자네가 동을 독점하고 있으니 나를 배제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건 무슨 말인가?”
“나는 자네를 믿고 있네.”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당연히 자네를 배제해야지. 대청 무역을 독점하는 자네에게 화폐 주조의 지분까지 나눠야 하나?”
“이런 고약한 인사를 봤나.”
“자네가 욕심이 많은 걸세.”
“끙.”
김근행의 단호한 태도에 변승업은 괜히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진심으로 속이 상한 건 아니었다.
애초 청국과 일본의 무역은 철저하게 분리되어 진행하기로 약조된 사안이었다.
그래서 큰 갈등도 없었다.
잔잔한 웃음이 울리듯 번졌다.
“그러면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지. 나를 찾아온 진짜 이유가 무엇인가.”
“추위의 강도와 지속 여부를 어찌 가늠하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길은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겠나? 나는 작금의 위기가 시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네.”
“더 큰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뜻인가?”
김근행의 눈과 입가에서는 미소가 완전히 실종됐다.
표정은 실로 심각했다.
“만일 판돈을 걸어야 한다면 나는 추위가 더 강해지며 길게 이어진다는 쪽을 선택할 것이네. 하여, 무리하더라도 이를 대비하고자 하네.”
“추위를 대비한다고 했나?”
“두만강 이북에서 초피를 구할 수 있지 않나.”
“자네 제정신인가? 그곳은 청국이 철저하게 통제하는 곳이네. 한데, 국경을 넘어 밀수하자는 건가?”
“밀수일 수도 있고, 밀렵일 수도 있겠지.”
“허. 너무 위험한 일일세.”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하여, 찾아온 것일세. 자네 말대로 국경을 넘어서 청국의 눈을 피하는 일이네. 위험한 일이지만 우리 두 사람이 힘을 보태면 능히 가능하다고 생각하네.”
“허.”
“나는 자네 역시 도박에 승부를 걸 생각이 있다고 여기고 있네.”
추위가 어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하늘의 뜻을 어찌 가늠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김근행은 재앙이 더 강해질 것으로 보고 위험한 도박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고민을 이어가던 변승업은 피식 웃었다.
도박이라면 자신도 지고 싶지 않았다.
“하하하. 이런 도박이야말로 우리 상인의 숙명이겠지.”
물론, 단지 모든 걸 도박하듯 결정한 건 아니었다.
변승업은 정국의 핵심을 언급했다.
“대청 전면 무역이 감행되고 있네. 두만강 이북도 국경이니 우리에게도 명분이 있는 걸세.”
“바로 그것이네. 또한, 추위를 대비하기 위한 행보이기에 문제가 생길 시 조정에서도 모르쇠로 일관하지는 않을 것이네.”
위험한 일이었었다.
또한, 막대한 재원과 뛰어난 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성사만 한다면 엄청난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일이었다.
두 거상은 기어이 이를 해보기로 의기투합했다.
“하면, 어서 보따리를 풀어보게. 두만강 이북의 사정을 파악해봤을 게 아닌가.”
“물론일세. 일단 이를 확인해보게.”
김근행은 품에서 문서를 꺼내어 내밀었다.
서둘러 넘겨받고 내용을 확인한 변승업의 눈이 가늘어졌다.
급히 수집한 정보라고 보기에는 너무 상세했다.
이는 바꿔 말해서 오랫동안 준비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대청 전면 무역이 언급되었을 때부터 하나씩 준비한 게 분명했다.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송화강이나 우수리강 등 흑룡강 중하류에 거주하는 부족이라.”
“비아객(費雅喀, Fiyaka), 혁철(赫哲, Heje), 악륜춘(鄂倫春, Orochen) 등 다양한 부족이 수렵에 종사하고 있네.”
“청에 초피를 바치는 변민의 규모가 어찌 되나?”
“1,000호가 넘네. 매년 호마다 초피 1장을 내는 방식일세.”
“음.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는가?”
“청국의 위세가 있는데 쉽지는 않겠지. 다만, 파악한 바에 의하면 아라사(러시아)로 인하여 여러 부족이 청국으로 위탁하고 있네. 바꿔 말해서 두만강 이북의 초피를 둘러싸고 두 나라가 다투고 있는 형국이지.”
“양국의 대립이라.”
흥미로운 사실에 변승업의 입꼬리가 실룩였다.
“이거 잘하면 우리 상단이 대대적으로 진출할 수 있겠군.”
“그렇다네. 참으로 해볼 만한 일이네.”
“이거 이제 보니까 자네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대청 전면 무역의 허점을 이용하기 위해서였군.”
“하하하. 자네는 대표적인 친청파가 아니었는가.”
“이런 고약한 사람을 봤나.”
변승업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김근행은 익살스럽게 웃으면서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함께 하겠는가?”
“당연한 물음을 여러 번 하지 말게.”
“좋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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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호부사의 전폭적인 협조를 얻어냈다.
아니, 협조가 아니라 도호부 방침을 사실상 변경한 것이었다.
남은 건 순탄한 백성 구제였다.
하지만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미 동상에 걸린 백성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의원의 수가 너무나도 부족했다.
특히, 실력 있는 의원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서, 선생. 너무 아픕니다.”
“손가락이 너무 이상합니다.”
“안 움직여요……. 아무런 느낌도 없어요.”
병자들은 보는 이가 어지러울 정도로 몸을 떨었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눈물도 멈출 기미가 없었다.
“선생…….”
의원의 표정은 어두웠다.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건…….”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사실상 환부(患部)가 괴사(槐司)
그러나 마땅히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박세당은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으아아악!”
좌중을 집어삼키는 엄청난 비명이 들렸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됐다.
“으어어…….”
동상에 걸린 병자 한 명의 손에 수저가 붙은 상태였다.
이를 억지로 떼어내려다가 생살이 뜯어진 것이다.
“허어어…….”
이제는 비명도 지르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운지 흐느끼며 울기만 했다.
생살이 뜯어진 그의 손에서는 피가 쉬지 않고 흘렀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지혈(止血)하는 것밖에 없었다.
“으어어…….”
감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비명이 병상을 지배했다.
모두 눈을 질끈 감거나 시선을 돌렸다.
바로 그때였다.
“그러면 안 됩니다.”
가래 끓는 소리였다.
일제히 시선이 돌려졌다.
박세당의 눈이 커졌다.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자네는 백 의원이 아닌가.”
바로 백광현이었다.
그는 가볍게 목례하며 말했다.
“지금부터 이곳을 소인이 통제해도 되겠습니까?”
박세당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