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피어나는 꽃(1)
출중한 의술로 위생국에서 특별히 주목받던 의원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사직하고 사라졌기에 허목이 크게 아쉬워한 기억도 선명했다.
그 백광현을 국경 지역에서 만나서 놀라웠다.
그러나 지금 이런 사사로운 인연을 언급할 때가 아니었다.
당장 병자부터 고쳐야 했기에 박세당은 뒤로 물러났다.
한편, 백광현의 눈꼬리는 찢어질 듯 올라갔다.
근처 의원들을 노려보는 눈은 핏발까지 선 상태였다.
그 기세가 어찌나 사나운지 시선이 마주친 이들은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
“동창의 처방을 말해보라.”
“그것이…….”
“꿩의 뇌수를 환부에 바른다. 또 무엇인가.”
“…….”
“낙소의 뿌리, 줄기, 잎을 진하게 달여서 환부를 담근다.”
“…….”
“돼지비계를 환부에 바른다.”
“…….”
“내가 말한 내용은 향약 구급방에도 나와 있다. 의원이라는 이들이 이조차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
이 시절 향약 구급방은 가장 기본적인 의서였다.
이를 숙지하지 못한다면 의원으로서 자격을 의심받아도 무방했다.
백광현이 이렇게 노여워하는 건 타당했다.
그러나 의원들로서는 일면식도 없는 백광현이 이렇게 나오는 건 불쾌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바로 이때 박세당이 나섰다.
“백 의원. 일단 진정하시게.”
“선생. 진정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애초 저들이 제대로 처방했다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병자의 환부에 쇠가 붙어버리다니요! 최소한의 언질만 있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일입니다.”
“자네의 말은 잘 알겠네. 그러나 지금은 탓을 하기보다는 대처를 빠르게 하는 게 좋지 않겠나?”
박세당은 품계가 낮지만, 중대본의 일원이었다.
도호부사가 아니라면 누구도 입을 댈 수가 없었다.
아니, 이걸 떠나서 천민 출신의 의원인 백광현과는 겸상도 하지 않을 위치였다.
그런데도 부탁하며 설득하는 자세를 취했다.
백광현의 장악력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박세당이 이렇게까지 판을 만들어줬기에 백광현 역시 더 무리하지는 않았다.
“선생의 말씀이 옳습니다.”
“무엇을 먼저 하면 되겠는가.”
“확인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자네가 모두 통제하게. 나 또한 자네의 말을 따를 것이네.”
“감사합니다.”
백광현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조금 전까지 혼쭐나던 의원들은 상황 파악을 끝냈는지 몸을 움츠리며 눈치만 살폈다.
“병자의 환부에 감각이 있는지 파악하게. 만일 있다면 심한 통증, 가려움 따위가 있는지 봐야 할 것이네. 그 뒤 손을 넣을 수 있을 정도로 뜨거운 물을 준비하여 일각(15분) 정도 환부를 담그도록 하게. 만일 귀와 얼굴이면 따뜻하게 눌러줘야 할 것이네. 그리고…….”
백광현은 일사천리로 지침을 ‘하달’했다.
의원들은 지금껏 듣도 보도 못한 내용에 당황하였다.
그러나 백광현의 말은 의문 제기 자체를 차단했다.
“향약 구급방도 숙지하지 못한 의원의 이견은 듣지 않겠네.”
“…….”
“더 말해야 하나?”
“아니외다.”
“또한, 감각이 없는 병자는 모두 내게 데려오게.”
“그리하겠소. 한데, 수저가 붙은 병자는 어찌해야 하오?”
“…….”
백광현은 손가락에 수저가 붙어 괴로워하는 병자를 바라봤다.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꺼냈다.
“환부를 잘라야지.”
“이, 이보시오.”
의원들이 기겁하여 만류했다.
그러나 백광현은 작은 주저함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수저를 제거하지 않으면 병자가 어찌 될지 가늠할 수 없네. 나는 병자를 살리는 의원일 뿐, 사지를 멀쩡하게 지켜주는 사람이 아닐세.”
“그런…….”
“반론은 허용하지 않을 것이네. 또한, 이는 내가 직접 행할 것이니 자네들은 부담을 갖지 말게.”
“…….”
의원들의 말을 단호하게 자른 백광현이었다.
결국, 시선은 사실상 총책임자인 박세당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한 번의 행동으로 백광현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표현한 것이었다.
“소, 소인의 손가락을 자르는 겁니까?”
“아플 것이네. 하지만 참게.”
“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없네.”
“그, 그런…….”
병자의 눈은 공포에 질렸다.
그러나 백광현은 아무런 머뭇거림도 없었다.
오히려 저돌적이라고 보일 정도였다.
“병자의 사지를 묶게. 그리고 움직이지 못하게 잡아야 할 것이네.”
“!!!”
“뭐 하나? 시간을 끌수록 상태만 악화할 뿐이네.”
“그, 그리하겠소.”
“아, 안 됩니다.”
“이자의 입도 막게.”
“!!!”
등을 돌린 박세당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이어질 비명을 감당하기 어려웠기에 발걸음을 옮겼다.
고통을 함께 나누기 싫은 게 아니었다.
백광현의 말이 심장에 비수처럼 찔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병자를 살리는 의원일 뿐, 사지를 멀쩡하게 지켜주는 사람이 아닐세.
사지를 멀쩡하게 지켜주는 사람.
이는 결국 위정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흐린 하늘을 바라봤다.
참으로 마음이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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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현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의복에 묻은 병자의 피도 미처 수습하지 못한 상태로 찬 바람을 쐬고 있었다.
“고생하셨네.”
문뜩 들린 말에 고개를 돌렸다.
박세당이었다.
백광현은 가볍게 묵례하며 말했다.
“선생이 아니셨다면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었습니다.”
“난세일세. 그런 불필요한 공치사는 넣어두게.”
“송구합니다.”
“다만…….”
박세당이 말끝을 흐렸다.
백광현은 무슨 말인지 짐작한다는 듯 쓰게 웃었다.
“세상에는 병자의 마음을 다스리는 의원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소인의 길이 아닙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그 길을 걸으려면 불필요한 말을 해야 하며, 교감이라는 걸 해야 합니다. 한데, 소인은 그 시간이 아깝습니다. 차라리 한 명이라도 더 살리겠습니다.”
“…….”
“소인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원리주의를 세상에 꺼내기 전후 많은 백성을 직접 만나며 소통하고 교감했던 박세당이었다.
백광현의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 말문이 막혔다.
“병자의 마음을 품는 건 선생과 사대부의 역할이 아니겠습니까.”
“…….”
“소인은 그저 병마와 싸우겠습니다. 이를 배려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백광현의 태도는 불순했고 뻣뻣했다.
하지만 박세당은 이조차도 문제로 삼을 생각이 없었다.
중요한 건 말투와 태도가 아니라 본심이라는 걸 깨달은 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투박하였으나 의술에 대한 열의는 진심이었다.
또한, 실력도 조선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뛰어나다.
다소 보이는 불손한 언행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걸 언급했다.
“고맙네.”
“고맙다고 하셨습니까?”
“백성의 손을 잡을 기회를, 부족한 내게 양보해주어서 말이네.”
“…….”
“나와 사대부는 자네가 만들어준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네.”
백광현의 눈동자가 철렁였다.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깊게 숙이며 말했다.
“그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화려한 미사여구를 사용하지 않고, 과장된 행동을 하지 않는 백광현이었다.
그에게 이런 행동은 진심을 담을 수 있는 가장 담백한 행동이었다.
박세당 역시 미소로써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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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듬직했다.
눈빛부터 그냥 다 마음에 들었다.
넉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들이 나서주니 참으로 든든하군.”
“아닙니다. 이렇게 기회를 주시니 감사하며 기쁩니다.”
“하하하. 그래. 늘 내게 감사하게.”
“…….”
각 도로 파견될 서얼들은 갑자기 말문을 닫아버렸다.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는 조금 전과 느낌이 아예 달랐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고개를 틀며 말했다.
“응? 기쁘게 감사하라니까?”
“그, 그리하겠습니다.”
서얼들은 어색하게 웃었으나 황급히 답변했다.
참으로 바람직한 자세였다.
“그래. 이렇게 길을 찾기로 한 것인가?”
“불교계의 도움으로 잡과 응시가 가능해졌습니다. 이후는 소생들이 개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예. 대감께서 일전에 이르신 말씀을 새기고 있습니다. 또한, 백성이 도탄에 빠진 난세를 반길 수는 없으나 소생들이 복무할 기회를 얻었으니 그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각오가 대단했다.
무언가라도 해보겠다고 나선 자세도 기특했다.
물론, 아주 순수하지는 않겠지만 전혀 중요한 건 아니었다.
엷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앞으로도 자네들에게 기회를 줄 것이네. 하지만, 쉽고 순탄한 건 하나도 없을 것이네. 모두가 기피하고 두려워하는 임무가 다수일 것이야.”
“서얼로 태어난 소생들에게 죽음보다 두려운 건 꿈을 꾸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그러니 모두 해낼 것입니다.”
“훌륭하군.”
덕담을 내리고 각오를 듣는 건 이 정도면 충분했다.
한시라도 빨리 조정의 지침을 하달해야 하니 말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모두 물린 뒤 홀로 생각에 잠겼다.
서얼이 공식적으로 관복을 입을 수 있는 길이 열리고 말았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내가 의도한 건 아니었으나 위정자의 저변이 확대되는 건 너무나도 바람직하니 말이다.
지금껏 이를 바라보지 않은 양반의 반발을 우려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은 그들이 입을 다물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서얼이 물러난 직후 관리가 나를 찾아온 것이다.
찾아올 수는 있는데, 그 분위기가 아주 불쾌했다.
거대한 변화의 물꼬를 열었다는 기쁨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싸늘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무슨 일인가. 바쁘니 짧게 말하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너희는 내가 한가해 보이나?”
“예……?”
“내가 너희의 불만이나 들어주는 사람으로 보이냐는 것이다. 정식적인 체계상 너희가 이렇게 몰려와서 내게 이런저런 말을 할 수는 없다. 그동안 받아준 건 그만한 사정이 있었을 뿐이다. 한데, 이토록 엄중한 정세에 몰려와서 내게 밑도 끝도 없이 불평을 토로하나?”
압도적인 권위를 소환하여 짓눌러버렸다.
관리들은 허둥거리면서 황급히 말했다.
“서얼들에게 조정의 일을 맡기셨다고 들었습니다.”
“귀가 있으니 듣는 건 어쩔 수가 없지. 한데, 입이 있다고 하여 마음대로 지껄여도 되나?”
“……그들은 관리가 아닙니다. 한데, 어찌 조정의 일을 수행할 수 있습니까.”
“하면, 내가 말을 타고 각 도를 순회라도 해야 하나?”
“…….”
“내 말이 안 들리나?”
“소인들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가나?”
죽어도 말을 해야 하는 사대부다.
내가 노여움을 이렇게까지 표출하였으나 기어이 물러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조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람을 지목하면 사직서를 던지는 너희였다.”
“대감.”
“한데, 서얼은 가겠다고 나섰다. 하면, 내가 어찌해야 하나?”
“대감. 오해가 있습니다.”
“너희가 지금 나를 가르치나?”
“그저 오해를 풀고 싶어질 뿐입니다.”
“다시 말하지. 지금 너희 따위가 살아 있는 성현인 나 ‘송자’를 가르치나?”
“!!!”
“전례 없는 추위와 기근 그리고 역병으로 백성이 고통에 허덕이고 있다. 이때 관리의 책임을 저버리고 목숨을 찾아서 사직을 던진 무리를, 내가 너그럽게 이해해야 하나? 분명하게 말하지.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이는 내가 최선을 다해서 상대해줄 것이다.”
“!!!”
한마디를 더 보탰다.
“잊지 말라.”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하늘이 경악할 만큼 졸렬하다는 사실을.”
“!!!”
최고의 협박을 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