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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218화 (218/298)

218화 피어나는 꽃(2)

하늘도 두려워하는 송시열의 졸렬함을 내세웠기에 감히 불만을 토로할 수는 없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만 그럴 뿐, 속에 담고 있을 본질적인 갈등의 싹이 사라질 수는 없다.

작금의 문제는 일신의 영달을 넘어선 기득권의 본능이 자극되었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전국을 흔든 추위로 백성이 고통받는 정세였다.

이럴 때 제 이권을 지키고자 공식화한다면 나의 졸렬함을 극대화하게 된다는 걸 모를 정도로 우매한 이들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적어도 지금은 얌전하게 관복을 입고 있었다.

이러한 소란이 잔잔하게 이어질 때, 모처럼 유형원이 나를 찾았다.

“대감.”

“자네가 나를 찾아왔다는 건 필시 어떤 안건을 제안하기 위함일 것이네.”

“그렇습니다. 사실 소생이 대감과 사담을 나눌 이유는 없지요.”

“당연하지 않겠나? 그건 내가 먼저 거절하고 말 것이네.”

“소생의 말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애초 발생도 하지 않을 것인데 무엇을 거절합니까.”

“전혀 중요하지 않은 대화를 시작하고 말았군. 나는 이 정도에서 이를 덮고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하는데,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모처럼 옳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 자네가 가져온 안건 말일세. 내가 크게 기대해도 되겠는가?”

“기어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개혁에 살고 개혁이 죽는 유형원이었다.

그가 ‘기어이’라는 말을 꺼냈다는 건 주목해야 마땅했다.

“말하게.”

“농법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큰 기대를 했기 때문이었을까?

농법의 변화라는 말은 나를 전혀 충족시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미처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느닷없이 무슨 말인가. 농법의 변화라니?”

“대감께서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실 거라고 여겼습니다.”

“또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중대본이 여러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유독 농업의 일은 소홀히 하였습니다. 같은 맥락으로 유추한 것입니다. 혹시 소생의 말이 틀렸습니까?”

소홀히 한 게 아니라 아예 쳐다도 보지 않았다.

인분을 거름으로 만든 건 유형원의 독창적인 계획이었으나 중대본의 중대 사안이라고 바라볼 수는 없었다.

이리한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최대 쟁점은 결국 경신 대기근이었다.

어차피 그때가 되면 농사 자체가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고 여겼다.

또, 그 전에 농업을 개혁하여 폭발적인 생산력 향상도 이뤄낼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농업의 개혁은 아예 배제하고 일을 도모했다.

그러나 유형원의 생각은 나와는 달랐다.

“대감. 하늘이 무너져도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전쟁이 일어나도 그랬습니다. 하물며 기근이 나라를 뒤덮고 있는데 농업 대책이 전혀 없다는 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물론 대청 무역으로 큰 성과를 낸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별개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조선의 자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기근이다.

그러니 외부로부터 ‘쌀’을 확보하는 것이 주된 방침이었다.

“대감. 되돌아보십시오. 잦은 가뭄에도 우리 중대본은 아무런 대책조차 수립하지 않았습니다.”

“가뭄에 대비하자면 저수지나 보 따위를 축조해야 하는데 백성을 동원할 상황도 아니었지 않은가. 심각한 민심 이반을 우려할 수밖에 없지.”

“어찌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최소한의 방비는 해야 합니다.”

“방비라. 그래 자네 이야기를 더 들어봐야겠군.”

“소생이 세세하게 살폈는데 작금의 농법은 위기 대처에 전혀 적합하지 않습니다.”

유형원의 말은 내가 놓친 부분을 정확하게 겨냥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차분하게 경청하기로 했다.

“작금의 추위는 전례 없는 것입니다. 소생은 이런 위기가 단기간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여깁니다.”

아마도 미증유의 추위로 기근과 역병이 조선 전역을 뒤덮은 이후 생각을 깊게 한 것으로 보였다.

“냉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겁니다.”

“한데,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일인가?”

“간단합니다. 벼의 파종은 소만(小滿)과 망종(芒種) 사이에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를 망종(芒種)과 하지(夏至) 사이로 하게 하면 문제가 일정 부분 해소될 겁니다.”

한마디로 벼의 파종을 조금이라도 온도가 높은 초여름으로 미루자는 말이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간단한 해결책이었다.

“또한, 냉해를 대비할 수 있는 조생종을 만들어 보급한다면 큰 효과를 낼 겁니다.”

조생종은 냉해에 강한 품종이었다.

이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쉬운 일이었다.

“내한성이 강한 산벼(산도)와 한전적 수전 농법을 권장해야 합니다.”

“…….”

“밭에 심는 밀과 보리도 추위와 바람을 이길 수 있는 밀작을 명하면 어찌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

“지금이라도 결심만 하면 집행하여 결과를 도출할 수 있습니다.”

“반면, 시기를 놓치면 효과를 볼 수 없겠지.”

“그렇습니다. 더 늦기 전에 도모해야 합니다.”

지금 유형원이 제안하는 건 개혁이라고 부를 성질의 일들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마음만 먹으면 종래 조선의 시스템으로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간 중대본의 여러 개혁은 소생의 제안을 바로 집행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그렇군. 수레 제작을 통하여 장인을 육성했으니 수차 제작을 도모할 수 있겠군.”

“예. 하지만 그뿐만이 아닙니다. 방한 대책을 수립할 수 있는 토양도 충분합니다.”

방한 대책.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난방과 방한복이었다.

전자는 석탄의 채광으로 성과를 볼 것이다.

후자도 잘 준비가 되고 있었다.

중대본 수립 전후로 윤휴와 송준길이 뽕나무를 열심히 심었으니 말이다.

“목화씨도 대대적으로 파종해야겠지요.”

중대본 수립 이전이었다면 버벅거렸을 일들이었다.

그러나 유형원이 한 말대로 작금의 조선은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허덕이며 기근과 싸웠던 시간이 절대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이 모든 내용을 하나로 모아봤다.

그랬더니 참으로 흥겨운 그림이 하나 그려졌다.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 가지가 더 있군.”

“그렇습니다.”

유형원의 눈이 반짝였다.

입가의 입꼬리는 설레듯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미 군현의 의술은 승려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럴 때 변화할 농업의 장려를 서얼과 승려가 도맡아 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일대 파란이 발생하겠지.”

“결과, 경직되어 변화를 거부한 양반 사회에서는 자생의 목소리가 봇물 터지듯 나올 겁니다. 최근 각 도로 파견되는 걸 두려워 사직한 비루한 행동이 두드러지면서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었다.

놀랍게도 우리의 길은 조선의 근본을 뒤틀고 있었다.

유형원은 생각만으로도 즐거운지 흥에 겨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기근이 가속화되어 조정의 국고는 어려움에 부닥칠 수밖에 없습니다. 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이제 화폐 주조를 본격화해야겠지.”

“그렇습니다.”

우습게도 이 모든 것이 향하는 방향은 다시 서원의 해산이었다.

그러니까 양반 사회의 몰락과 이어졌다.

참으로 괴이한 일이었다.

꿈틀거리는 입꼬리를 그대로 뒀다.

새어 나오는 웃음도 방치했다.

그냥 말했다.

“단번에 집행하지.”

“소생이 거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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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능은 탄식했다.

하루가 갈수록 나오는 건 탄식밖에 없었다.

대체 어찌해야 할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기에 너무나도 참담했다.

역병의 창궐부터 지금까지 잠잘 시간과 먹는 시간도 줄이며 뛰어다녔다.

하지만, 병마의 꼬리도 잡아내지 못했다.

그새 많은 병자가 죽었고, 역병은 번졌다.

숨 쉬는 시간 내내 속이 새카맣게 탔다.

“…….”

“…….”

“…….”

“…….”

병자들은 고통이 담긴 비명도 내지 않았다.

그냥 입을 벌리고 눈만 껌뻑거렸다.

언제부터인지 살려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죽을 날이 다가오는 걸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걸 말이다.

이를 느꼈기에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아팠다.

결국, 처능은 잠시라도 회피할 수밖에 없었다.

크게 숨을 내쉬며 하늘을 바라봤다.

엄청난 추위와 역병이 사방을 집어삼켰으나 하늘은 지독할 정도로 맑았다.

이를 악물며 부족한 역량에 염주를 꽉 쥐었다.

“대사.”

군현의 수령이었다.

처능은 가볍게 합장했다.

“승려들의 노고를 알지만 더는 이렇게 두고만 볼 수가 없소.”

“……갑자기 무슨 말씀입니까.”

“역병에 걸린 병자는 격리하는 게 원칙이오.”

“소승이 여쭤본 건 그게 아닙니다. 이미 격리가 되어 있는데 언급하니 의아한 것입니다.”

의구심이 가득한 말에 수령은 고개를 돌리며 쓰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는 처능의 눈동자에는 불안함이 감돌기 시작했다.

“역병이외다. 병자를 확실하게 살릴 길을 찾지 못한다면 확산이라도 막아야 하오.”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설마 저 많은 병자를 포기라도 하시겠다는 겁니까.”

“포기가 아니라 다른 백성을 살리기 위한 방책이오.”

“여, 영감.”

수령의 말은 결국 병자를 외딴곳으로 이주시키겠다는 의미였다.

그리된다면 제대로 된 지원을 받는 게 어려웠다.

결국, 죽게 될 것이다.

처능은 대경실색하여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 안 됩니다.”

“대사. 이는 조정의 지침이외다.”

“대체 그런 지침이 어찌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중대본의 지침이오. 아니, 우암 대감이 직접 관철한 내용이외다.”

송시열이 언급됐다.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그의 모습을 떠올린 처능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아니, 그의 이름은 불교계 전체가 동원되어도 덮을 수 없는 압도적인 권위였다.

그러니 더 반대하는 건 무의미했다.

씁쓸한 표정으로 처능을 바라보던 수령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라고 하여 저들을 이대로 포기하는 게 마음이 편하겠소? 하지만 더는 시일을 끌 수가 없소.”

“…….”

“대사. 나는 더 많은 백성이 죽는 걸 막아야 하오.”

“…….”

“내 뜻을 알아주시리라 믿소.”

“하면…….”

잠시 뜸을 들인 처능은 결심한 듯 이내 말을 이었다.

“소승이 승려들을 대동하여 저들과 함께 가겠습니다.”

“대사.”

“이는 허락해주십시오.”

“그럴 수는 없소.”

“어째서 이조차 허락하지 않습니까.”

“대사와 승려들은 살아서 더 많은 일을 해야 하오.”

“그 일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미 무리하던 승려 몇 명이 역병에 걸렸소. 더는 곤란하오.”

“……하면, 약탕이라도 전하게 해주십시오.”

“그 또한 어렵소.”

“소승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통치는 동의가 아니라 집행과 관철이외다.”

수령은 너무나도 단호했다.

처능은 숨을 쉴 수도 없을 정도로 답답했다.

그때였다.

“우리 양반이 참으로 박하다고 느낀 적이 있을 것이오.”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하지만 수령의 표정이 참으로 구슬펐다.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데, 통치는 선의로만 하는 것이 아니외다. 우리 양반도 피가 흐르고 심장이 움직이거늘 어찌 백성의 어려움에 마음이 아프지 않겠소.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소.”

“그러나 어찌 저들을 이대로 포기할 수가 있습니까. 수십 명의 백성입니다.”

“조선이 이러하오.”

수령의 말은 느리게 이어졌다.

“박하다고 여길지라도 조정과 군현이 유기적으로 움직여야만 탈이 생기지 않소.”

“…….”

“현재 중대본의 가장 큰 원칙은 한 명을 살리는 게 아니라 백성을 지키는 것이외다. 더 많은 백성을 살려야 하니 말이오. 한정된 인력과 재원으로는 이리할 수밖에 없소.”

“…….”

“휴. 보시오. 조선의 역량 밖에 존재했던 승려까지 동원되었으나 역병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소. 통치는 이 모든 걸 고려할 수밖에 없소. 불교계도 새로운 조류가 불고 있다는데, 이를 새겨야 하오.”

처능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었다.

“더 많은 백성을 살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소.”

“이대로 병자를 격리한다는 건 저들만 포기하는 게 아닙니다.”

“무슨 말이오?”

“영감. 역병을 제대로 대처하려면 증상을 기록하고 처방을 확보해야 합니다. 한데, 이대로 포기한다면 차후 동일한 역병을 대처할 기록이 없어지게 됩니다.”

“…….”

“영감. 소승이 기어이 저들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앞으로 발생할 역병에 희생될 수도 있는 백성을 구할 기록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더 많은 백성을 살리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이 또한 맞는 말이었다.

수령은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처능의 간곡한 눈을 더는 피할 수가 없었다.

“조정에 사람을 보내겠소.”

“하면…….”

“대사의 제안을 전할 것이외다. 답이 올 때까지 이곳에서 병자를 살피시오.”

수령의 말에 처능의 눈동자가 커졌다.

사실상 승낙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너무나도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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