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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219화 (219/298)

219화 피어나는 꽃(3)

유형원이 발의한 농업 개혁론은 아무런 반발도 없이 통과됐다.

막대한 재원이 필요한 일도 아니었고, 누군가의 이권과 관련한 것도 아니었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문제는 집행할 ‘주체’를 둘러싸고 발생했다.

-조정의 일입니다. 당연히 조정에서 해결해야지요.

-그렇습니다. 조정의 일은 당연히 관리가 집행해야 합니다.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시원하게 사직 상소를 던졌던 무리가 이렇게 나왔다.

서얼과 승려의 정치적 성장을 차단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이거 대감의 뜻대로 되고 있군요.”

가자미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윤휴였다.

그런데 나는 하늘에 맹세할 수 있었다.

이번만큼은 절대 의도가 아니었다.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개구리를 잡아버린 것이다.

그런데 나더러 대체 어쩌라는 것인가.

결국, 나는 억울함을 하소연할 수밖에 없었다.

“자네의 공이 참으로 컸네.”

“기어이 이렇게 양반 중심 질서의 해체를 도모하십니까?”

“허. 이 사람아. 말은 바로 하시게. 해체라니? 책임 있는 인사 중에서 이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네.”

정말이었다.

중대본의 인사 중에서 양반 질서의 해체를 꾀하는 이는 없었다.

유형원이 아무리 과격할지라도 어디까지 기존 질서의 경직성을 비판하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서얼과 승려가 정치적 성장을 이룰지라도 양반의 아성에 도전할 수는 없네.”

“본질을 흐리지 마십시오. 이미 서얼과 승려가 양반의 대체제가 되었습니다. 고작 파발의 일이라고 하지도 마십시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하는 말이 아닌가. 내부 단속을 제대로 했어야지.”

“허. 결국 이렇게 속내를 꺼내십니까?”

“잊었나? 나는 양반의 기득권을 인정하고자 군현의 합법적인 자리까지 마련하자고 했네. 한데, 보신주의에 빠진 무리가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일세. 제 목숨이 아까워서 사직하는 관리를 내가 어찌 바라봐야 하나?”

“이미 서얼을 중용하는 일로 경고가 충분히 되었습니다. 이만하면 거두셔야지요.”

“그럴 수는 없네.”

나의 단호함에 윤휴는 난색을 보였다.

아니, 특유의 고집을 강렬하게 표출했다.

되돌아보면 중대본의 일을 집행할 때 큰 이견은 없었다.

나라 전체를 어지럽힌 초유의 난세를 극복하는 일이었기에, 갈등은 수면 아래로 내려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일이 지날수록 정치적 현안은 도드라졌다.

좁혀질 수 없는 세계관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지금은 윤휴만 이렇게 나섰을 뿐이지만, 원래 남인은 신분제의 완화를 병적으로 싫어했다.

그들의 세계관이 옹졸하다는 게 아니라 남인의 학문 자체가 그랬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를 고려할 때 여태껏 허적, 허목, 윤선도가 별말을 하지 않은 사실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물론 유형원이 남인의 정론과 입장을 달리하긴 하지만, 어차피 그는 정파적 이해관계와 관점을 아예 넘어선 인물이었기에 예외로 둘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이 엄중한 시국에도 윤휴가 굳이 이리 나오는 건, 그동안 애써 숨겼던 세계관의 차이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는 걸 의미했다.

“자네의 말은 잘 알겠네. 한데, 자성의 목소리는 소수에 불과하지 않은가. 여전히 다수는 도성 밖으로 가느니 사직하겠다고 말하지 않는가. 이를 어찌 바라봐야 하나?”

“대감의 목표가 관리의 각성입니까? 만일 그러하다면 소생도 거들겠습니다. 그러나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설령 그러하다고 할지라도 방법이 틀리셨습니다. 이 미증유의 난세를 극복하는 데 기득권과 다투는 길을 선택한 걸, 소생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자초한 일이라고 말했네만.”

“만일 양반들이 중농억상을 명분으로 대청 무역을 반대하면 어찌하실 겁니까?”

“그건…….”

“감당하실 수 있습니까? 아니, 그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대청 전면 무역을 도모하실 수는 있습니까?”

“…….”

“안 됩니다. 불가능합니다. 이건 대감이 아니라 누가 와도 불가능합니다.”

조선의 역사를 이어온 양반에게 선전포고했다.

그리고 나라의 속성을 변화시키려는 정책을 추진한다.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무조건 실패한다.

“우리 중대본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최소한의 합의점이 존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적어도 양반‘만’이 조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나라는 유지하겠다는 암묵적인 약조였습니다. 한데, 대감은 기어이 이를 집어 던지신 겁니다.”

세계관의 차이는 현실을 좌우하는 구체적인 정책의 본질까지도 이렇게 다르게 만들었다.

그래서 일단 냉수 한잔 시원하게 들이켰다.

정신도 맑게 하고 칼칼한 목도 좀 멀쩡하게 만들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다.

“백호. 다 알겠네. 자네의 말이 다 옳아. 그런데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게 있네.”

“무엇입니까.”

서로 다른 세계관이었다.

충돌은 거대한 충격을 유발할 뿐이다.

이는 바람직하지도 않고 올바르지도 않다.

해서, 세계관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위정자로서의 언짢음을 표출했다.

“내가 왜 저들을 용서해야 하나?”

“예……?”

“나라가 무너지고 있는데 제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무리의 입장을, 내가 왜 생각해야 하나?”

“그들이 이 나라를 이끄는 위정자입니다.”

“다시 말하지. 제 안위만을 생각하는 위정자의 자리를, 내가 왜 고려해야 하나?”

“위정자 전체가 아니었습니다.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하면, 나서는 이가 없었다는 건 어찌 설명할 것인가?”

“시일이 있었다면 자생적으로 해결되었을 겁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윤휴의 고집스러움을 답답하게 여길 필요도 없었다.

하는 말을 듣고, 생각을 이해하면 될 일이다.

그러니 나도 생각하고 말을 하면 된다.

“신라와 고려는 달랐는가?”

“예……?”

“모두 결정적 시기가 있었네. 신라의 진골 귀족에게 그 시기에 시간이 허락되었으면 1천 년이 아니라 2천 년의 역사를 가졌을 것이네. 고려의 귀족에게 시간이 허락되었다면 지금 이 땅의 주인은 왕씨였을 것이네.”

“대체 무슨 말씀을 하는 겁니까.”

“말 그대로일세. 어느 나라일지라도 어떤 세력일지라도 결정적 시기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세. 이 시기를 놓친 결과는 자네가 알고 있는 역사 그대로일세.”

“작금의 조선과는 사정이 다릅니다. 신라와 고려는 위정자가 모순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시대는 하늘이 만든 난세입니다. 어찌 비교할 수 있습니까.”

“비교해야지. 소름 끼칠 정도로 본질은 같으니까.”

윤휴는 황당하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신라는 진골 귀족이 관복의 문을 닫으며 무너졌고, 고려는 귀족이 나라의 영토보다 제 사전의 광활함을 중시하면서 끝이 났네.”

“…….”

“하면, 우리 조선은 어찌 무너질 것인가. 사대부가 민본보다는 붕당의 이권, 조선의 안위보다는 제 가문의 영달, 왕실보다는 황실, 종묘보다는 서원을 앞세우면서 시작되는 것일세. 그런데 지금 내가 한 말이 너무나도 익숙하지 않은가? 이 나라 조선이 걸어온 역사가 바로 이러하지 않았는가? 결과, 백성보다 제 목숨을 앞세우는 작금의 작태로 구현되었네.”

신라가 무너진 건 진골 귀족의 탓이다.

고려가 무너진 건 귀족의 탓이다.

그런데 조선의 붕괴는 사대부의 탓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망국에 어찌 위정자의 책임이 없을 수 있는가.

나는 이를 꼬집었다.

“위정자의 정신이 틀려먹은 나라는 반드시 무너질 수밖에 없네. 천년 신라가 그러했고, 500년 고려도 끝을 보았어. 한데, 고작 300년의 조선은 다른가?”

“조선은 전조 고려나 신라와는 다릅니다.”

“다르지. 너무나도 달라. 조선은 너무나도 졸렬한 나라이니 말일세.”

“…….”

“되돌아보게. 신라의 진골 귀족은 그토록 폐쇄적이었으나 6두품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국운을 키웠네.”

진골 귀족이 아무리 폐쇄적이라고 할지라도, 필요하면 다른 계층을 활용했다.

“고려의 귀족은 부패하고 용렬했기에 용기가 없었지. 그러나 누군가 사지에 나선다고 하면 적극적으로 지원했네.”

화살받이로 활용하기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배려는 해주었다.

“만일 저 자리에 우리 사대부가 있었다면 어찌했을까? 6두품이 자리를 탐한다며 크게 화를 낼 것이네. 또한, 누군가 사지로 나선다고 하면 그가 공을 세울까 두려워서 목숨을 걸고 반대했을 것이네. 내가 작금의 사대부를 보고 느낀 바가 바로 이러하네.”

조선이 그토록 비웃는 고려의 귀족도 사대부를 용인할 배포는 있었다.

그런데 조선의 사대부는, 고려 귀족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졸렬했다.

“강대한 외세의 침략이나 내부의 반란도 아닐세. 고작 한 자리를 내어준 것에 불과하지. 그런데도 이를 경계하고 있네. 어째서? 우습게도 그들은 너무나도 영리하고 졸렬하기 때문일세. 어쩌면 이것이 시작이라는 걸 알기에 막으려거나 시작이기에 두려워하는 걸지도 모르지.”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가 지독할 정도로 본질을 꿰뚫는 눈이 뛰어나기에 발생한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것이 세상을 옳게 만들지 않고 비틀어버린 것이다.

“신라 그리고 고려의 마지막은 난세였네. 하지만, 누구도 이를 고치지 않았네. 시기를 놓쳤네. 그래서 등장한 새로운 무리가 왕조를 열었어. 그렇게 새로운 역사가 열린 것이네. 우리라고 다를 것인가? 적어도 이 나라의 끝이 신라와 고려처럼 비루하지는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

“우리의 노력을 감히 위대한 길을 걸었던 선대와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네. 한데, 작금의 난세가 고려 말의 난세보다 덜한가? 나는 감히 아니라고 말할 수 있네.”

많은 이가 입을 모아 말한다.

작금의 난세는 왜란과 호란보다 참혹하다고.

“이 나라를 멸망의 벼랑으로 몰았던 전란보다 위력적인 난세일세. 한데, 이 나라의 위정자라는 무리는 제 안위를 먼저 생각했네.”

“…….”

“다시 묻겠네. 내가 그들의 입장을 왜 고려해야 하나?”

“대감.”

“내가 왜 흘러가는 역사를 바꿔야 하나?”

“대감.”

“나의 의도라고 했나? 틀렸네. 난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았네. 처음부터 지금까지 오직 하나, 기근을 대비하고자 했을 뿐이네.”

정말이었다.

나는 경신 대기근만 바라보며 오늘까지 달려왔다.

그 이면에는 다른 생각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송시열이 된 이유이니까.

“나는 오직 기근을 대비하고자 달려왔을 뿐이네. 하나씩, 하나씩 맞춰가면서 꾸리고 집행했을 뿐이네. 그런데 우습게도 그 모든 길이 양반 중심의 정치 질서 해체로 귀결되었네. 이것이 과연 우연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지. 이는 이 나라가 위기를 극복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 양반의 기득권이었다고 말하는 걸세. 그런데도 이를 누가 의도했다고 말한다면, 그건 지독한 억지일세.”

모든 길이 이렇게 이어졌을 뿐이었다.

이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양반의 무능력함을 덮고자 누군가를 앞세워 희생시키는 것에 불과하네.”

“…….”

“그래. 그 희생양이 나 송시열이라면 참으로 적합하겠지.”

기득권의 수호는 기어이 희생이 따른다.

이대로 방관한다면 저들은 나를 불태우고자 할 것이다.

그래야만 세상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한데, 아는가? 이미 물꼬는 트이고 말았네.”

“…….”

“이를 양반이 대체 무슨 수로 막을 수 있겠는가.”

“…….”

윤휴는 끝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느낄 수 있었다.

더는 이를 문제 삼지 않으리라는 걸.

그리고 마지막 순간 깨달았다.

오늘 조선의 신분제를 사수하는 최후의 논리를 넘었다는 걸.

이 난세가 끝날 어느 날…….

조선은 변화하고 있는 게 아니라, 변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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