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피어나는 꽃(4)
장계가 올라왔다.
독단으로 처리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조선의 체질과 밀접하게 관련했기에 폭넓은 논의가 필요했다.
장계를 내밀며 말했다.
“초피를 백성이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내용이오.”
사치를 경계하는 조선다운 법도였다.
하지만 이제는 철폐되어야 할 악습이었다.
추위로 고통받는 백성을 구제하는 건 당연했고, 상업의 성장을 견인해야 할 시기에 불필요한 악습은 다 치우는 게 옳았다.
“박세당의 의견이 참으로 지당하오. 지금은 불필요한 관계를 모두 치워야 하오. 초피가 아니라 관복이라도 벗어서 백성에게 내어줘야 할 상황이 아니겠소이까.”
“호판의 말대로요. 작금의 난세는 작은 반발이나 거추장스러운 여러 말을 수렴하면서 논의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소.”
그 외 인사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안은 이견이 없었다.
문제는 처능이었다.
역병에 걸린 병자에 대한 치료를 끝까지 책임지자는 내용이었다.
“발상 자체는 틀렸다고 할 수 없소. 역병에 대처하려면 기록이 중요한 건 사실이니 말이외다.”
허목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되돌아보면 과거 삭주에서 이 문제로 허목과 치열한 논쟁을 펼쳤다.
아이러니하게 지금 박세당이 있는 곳도 삭주였다.
자연스레 허목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이번만큼은 물러설 생각이 없는지 눈빛부터가 달랐다.
“본부장. 삭주의 방침은 이제 변화를 둘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오. 우리 조선은 그동안 충분히 역량을 키웠소.”
위생국을 책임지는 그였기에 역병의 대처에 관해서는 발언 하나에도 큰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내 생각은 한 치도 바뀌지 않았다.
열의가 가득한 허목의 눈길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논의를 다시 할 정도로 우리의 역량이 축적됐다고 생각하지 않소.”
“어찌 그렇소? 위생국 설립 이후 우리는 역병을 잘 극복해왔소.”
“잘 극복해왔지요. 개성의 일만 봐도 능히 그러했소. 한데, 이는 위생국의 역량이 총동원된 결과였소. 현재 조선 전역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태는 범위와 파급 자체가 아예 다르오. 내 말이 틀렸소?”
이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개성의 역병을 진압한 건 엄청난 재원을 투입한 결과였다.
우리는 그때 알 수 있었다.
일정 이상의 재원을 사용할 수 있다면 역병도 조기에 진압할 수가 있었다.
그간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건 그럴 만한 재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이 영역에서도 결국 ‘돈’이 문제였다.
우리의 역량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나는 냉정한 현실을 일러주기로 했다.
“조선 전역에 개성처럼 목욕치법을 도입하거나 약재를 무한대로 사용할 수는 없소.”
“본부장의 말을 부정하지 않겠소. 한데, 처능의 의견도 옳지 않소이까. 앞으로 창궐할 역병을 고려해야 하오.”
의학을 발전시키려면 임상 실험은 당연히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지금 허목과 처능이 단지 이를 위해서 기존 방침을 덜어내려는 건 아니었다.
난 정면으로 반박했다.
“초기 대처에서 진행하며 잘 기록하면 되오. 굳이 위험을 감내하면서까지 일을 도모할 수는 없소.”
“본부장. 기어이 살릴 수 있는 백성을 다시 버릴 것이오?”
“살릴 수 있는 백성을 버리는 게 아니라, 죽을지도 모를 백성을 지키는 것이오.”
“묻겠소. 우리의 방침은 언제 병자를 더 위할 수 있소?”
“나야말로 묻겠소. 허 국장의 말대로 위생국의 수립과 승려의 동원으로 의술 역량은 전과 비교할 수도 없는 수준이 되었소. 그들을 모두 죽일 것이오?”
“뭐요……?”
“장담조차 할 수 없는 일이오. 그런데 겨우 육성한 의술 인력을 사지로 넣으면 차후는 어찌할 것이오? 우리는 언제 병자를 더 위할 수 있느냐고 물었소? 적어도 지금은 아니오.”
조선의 의술 르네상스가 있다면 바로 지금 태동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위생국이 중심을 잡고 승려가 진출했다.
또한, 누구라도 의지가 있다면 서원에서 의술을 배울 수 있는 시대의 문을 열었다.
이 모든 것이 언제 꽃을 피울지는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건 꽃 피우기도 전에 꺾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하여, 의술 인력은 반드시 지켜야만 했다.
나는 물러설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세상 모든 이가 나를 욕해도 어쩔 수 없다.
“병자보다 병자가 아닌 백성의 수가 더 많소. 우리는 여전히 백성을 살펴야 하오. 여기서 한 가지를 더 보태겠소. 이제 막 성장하는 의술 역량을 허비할 수 없소.”
“본부장!”
“병자에 대한 대처는 완벽한 격리를 진행하기 전에 최선을 다하면 될 것이외다.”
“지금 그 방침이 파발을 거부하며 사직을 던진 관리와 무엇이 다르오?”
“그들은 제 목숨을 아낀 것이오. 나는 다수의 목숨을 지킬 수 있는 길을 열어보려는 것이외다.”
현대 국가도 전염병은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
창궐을 막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얼마나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겠는가.
되돌아본다.
아니, 다시 되새겨본다.
애초 나의 목표가 무엇이었던가.
100만 명의 병자가 발생하는 역사를 90만 명으로 줄일 수 있길 바라고 노력할 뿐이었다.
이것이 현실이었다.
그러한데 우리가 100만 명을 다 감당하겠다는 건 오만이었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바로 위생이었다.
“허 국장. 그간 우리가 가장 집중한 건 위생을 보급하는 것이었소.”
우리의 준비 태세는 역병의 치료가 아니라 위생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것이 가장 현명했고 현실적이었으니 말이다.
또한, 위생의 보급은 큰 비용도 필요하지 않았다.
“반면, 이미 창궐한 역병에 대한 대처가 전과 얼마나 다르오?”
우리는 아직 걸음마 단계였다.
섣불리 결정했다가 자칫 상실하게 될 의료 역량을 복구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확실하게 하겠소.”
이 문제로 더 논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누구라도 이를 어긴다면 파직할 것이니 그리 아시오.”
“…….”
허목은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지금 이럴 때
-나 역시 병자들의 죽음이 고통스럽소.
이런 말은 서로를 더 괴롭힐 뿐이었다.
그저 속에만 담아둬야 할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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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판단에 대한 신뢰를 떠나서 마음이 무거웠다.
잠시라도 안정시킬 시간이 필요했으나 군왕의 부름을 받았다.
“전하.”
“오셨소?”
막상 알현하니 이연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나라 전체가 추위로 고통받고 있으니 당연하긴 하다.
그런데 이것만이 이유라고 보기에는 영 이상했다.
“전하. 용안이 어둡사옵니다.”
“본부장.”
“이르시옵소서. 전하.”
“비축은 중요하오.”
“그러하옵니다. 작금의 조선은 오직 비축해야 할 시기가 맞사옵니다.”
줄기차게 국고의 고갈을 추진했던 건 어디까지나 대청 무역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사실상 이룬 목표였다.
그러니 철저하게 비축에 돌입하는 게 옳았다.
다만, 의아한 건 이 사안이 언급된 지금 상황 그 자체였다.
대청 전면 무역을 둘러싼 여러 방책은 나의 독단이 아니라 이연과 세밀하게 상의했기 때문이었다.
의구심이 커질 때 이연의 말이 이어졌다.
“한데, 점차 비축에 대한 회의감이 나를 휘감고 있소. 하루가 갈수록 정도가 심해지더니 이제는 숨을 쉬는 것도 버겁소.”
“……회의감이라고 하셨사옵니까?”
“그렇소. 회의감이오.”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흐름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 역시 상황을 명료하게 정리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니 지금은 무언가를 정리하기보다는 듣는 것에 집중하는 게 옳았다.
“초안을 논의할 때를 되돌아보시오. 대청 전면 무역을 공식화하면 거센 저항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소.”
“그러하옵니다. 하오나, 그간 꾸준하게 추진한 개혁은 반대할 무리의 기세를 완벽하게 제압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우습게도 기근을 방비하는 개혁은 그들의 이권을 거두는 것과 일치하였기 때문이옵니다.”
여러 번 언급했듯 우리는 오직 기근을 대비했을 뿐이다.
결과 놀랍게도 반드시 저항할 무리는 구심점을 상당히 상실했다.
저들은 나서기보다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윤휴가 나를 설득하려고 한 것 역시 세상이 이리되었다는 걸 의미했다.
그 결과 모든 건 조선의 변화로 이어졌다.
“내가 묻고 싶은 건 바로 이것이외다. 과정의 어려움을 떠나서 우리는 물 흐르듯 자연스레 목표를 달성했소. 결과, 작금의 조선은 전례 없는 풍요로움을 목전에 두고 있소.”
난세가 지독하긴 했다.
그런데 앞으로 기대되는 조선의 수익은 태조 이성계 이래 최대인 것은 분명했다.
북으로는 청, 남으로는 일본과 전면 무역을 단행했고, 서로는 어업 협정이 이뤄졌으니 말이다.
이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건 왜……?
그 순간 스치는 게 있었다.
황급히 말을 꺼내려고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한데, 어찌하여 비축에만 전념해야 하오.”
이건 곤란했다.
지금은 곳간을 채울 때였다.
“저, 전하.”
“본부장. 백성이 추위에 떨고 있소. 얼어붙은 손발을 자르는 백성이 한둘이 아니외다. 동사자도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소. 아사자보다 많소. 이 추세로라면 역병보다 더 많은 백성의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소.”
이런.
이연의 고민이 여기까지 이르렀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면서 말했다.
“전하. 백성을 위하는 어심을 신이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하오나…….”
“본부장.”
“……예. 전하.”
“날씨가 너무나도 춥소. 하여, 백성에게 초피를 허락했소. 어디 초피뿐이겠소? 할 수만 있다면 용포라도 벗어 그들을 덮어주고 싶소.”
백성에 대한 연민을 앞세우는 군왕의 말은 천금보다 무거운 법이다.
나는 마음껏 표출할 수 없는 애민이지만 군왕은 늘 품고 꺼내야 한다.
이것이 나와 이연의 포지션이었다.
그래서 다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본부장.”
“……이르시옵소서.”
“훈련도감을 동원하여 석탄을 구하고 있소.”
“전하. 석탄은…….”
“그 놀라운 효력을 나는 알고 있소.”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아직은 때가 아니옵니다.”
“본부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소. 한데, 지금 석탄을 사용한다면 더 많은 백성을 구할 수 있소. 나는 이들을 포기할 수 없소.”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전하. 작금의 위기는 땔감으로도 충분하옵니다.”
“그래요. 땔감. 바로 그것이었소. 경은 과거 내가 땔감을 마음껏 사용하라고 했던 사실을 잊지 않으셨을 것이외다.”
“조선과 백성을 위한 결단이셨사옵니다. 신이 어찌 잊겠사옵니까.”
“내가 왜 그러한 어명을 내렸는지는 잊으셨소?”
어찌 잊겠는가.
너무나도 선명하고 정확하게 기억났다.
그때 이연은, 100년 뒤의 백성을 위해서 오늘 다스릴 백성을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내일의 백성을 위해서 오늘의 백성이 희생할 수 없다는 취지였소.”
“신은 기억하고 있사옵니다.”
“하늘이 내일은 어떤 재앙을 내릴지 어찌 가늠할 수 있겠소. 어쩌면 경이 우려한 것처럼 더 맹렬한 추위로 조선을 괴롭힐 수도 있소. 한데, 본부장. 그런데도 당장 오늘이 너무 춥지 않소이까.”
이유는 모르겠다.
외로워졌다.
지독할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