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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221화 (221/298)

221화 피어나는 꽃(5)

막아야 했다.

반드시 반론을 제기해야 했다.

그런데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목이 꽉 막힌 것처럼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반면, 이연의 말은 그야말로 청산유수였다.

“머지않아 변승업의 어선이 출항할 것이오. 결과, 전례 없는 어류의 풍요로움을 가져올 것이외다. 한데, 어류는 늘 쉽게 상하오. 보관도 어렵소. 어찌할 것이오? 즉시 백성에게 베풀어야 하오. 애초 아낄 일이 아니외다.”

좋다.

이건 인정하겠다.

냉동 시설이 없으니 당연히 그래야만 했다.

최대한 침착하게 이연의 말을 기다렸다.

“대청 무역이 이뤄질 것이외다. 전처럼 제한적으로 규제를 두지 않고 국경을 아예 열어내는 과감한 무역이오. 필시 경험하지 못한 풍요로움이 예상되오.”

“…….”

“한데, 본부장. 우리는 여기까지 대체 왜 달려온 것이오?”

“기어이 기근을 방비하기 위함이옵니다.”

“해서, 묻겠소.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소. 예견할 뿐이오. 이는 확실하지 않소. 한데, 앞날의 재앙이 더 거대할 것이라는 정세 판단으로, 눈앞에서 죽어가는 백성을 외면해야 하오?”

“이미 하교하셨사옵니다. 기근은 걷잡을 수 없이 강해질 것이옵니다.”

나는 경신 대기근의 참혹함을 활자가 만든 수치로 익혔다.

쉽게 피부로 와닿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경신 대기근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약한 강도의 기근이 만든 위력을 경험했다.

경신 대기근의 수치에는 턱없이 부족한 규모의 피해였다.

그런데도 그 실상은 너무나도 참혹했다.

만일 수백만 명이 죽는 세상이 도래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걸 어찌 장담할 수 있소?”

“그건…….”

내가 미래에서 왔으니까.

경신 대기근의 참혹함을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나의 침묵을 치운 건 이연의 말이었다.

“경의 판단을 의심하지 않소.”

이건 무슨 말일까?

“주어진 상황으로 미래를 보는 게 정세를 보는 능력이오. 내일을 예측하는 사람이야말로 선구자이겠지요. 그래요. 나 역시 경의 생각과 같소. 작금의 난세는 오래 이어질 것이며, 기근은 더 강해지겠지요.”

이연의 입을 바라만 봤다.

나는 들어야만 했으니까.

“일찍이 경은 수백만 명이 죽는 기근의 도래를 말하였소.”

과거 나는 허적과 대화를 나눴다.

사상 초유의 기근이 도래할 수도 있다는 다소 허무맹랑한 주제였다.

“나 또한 이를 치열하게 고민했소.”

“……이르시옵소서.”

“그런데도 확신할 수 없기에, 우습게도 나는 경이 미래를 보았다고 가정까지 했소. 정말로 수년 뒤 전대미문의 기근이 도래한다는 불가항력의 가정을 해봤소.”

흥미로운 가정이었다.

나는 이어질 이연의 말이 기대되었으나, 또 두려웠다.

작금의 조선을 책임지는 군왕의 판단이 궁금하였기 때문에 기대됐다.

그러나 여태껏 이어진 이연의 말이 나와는 다른 결론이라는 걸 암시했기에 두려웠다.

“그러한들 나는 지금의 백성에게 재원을 사용할 것이외다.”

“전하…….”

“아낌없이 사용할 것이오. 이것이 나의 선택이며 길이외다.”

“어찌하여 그러하옵니까. 감당할 수 없는 기근이라면 더 철저하게 준비해야 하옵니다. 그러지 않으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진정 가늠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것은 지옥일 것이옵니다. 이 땅에 기록된 적 없는 지옥이 분명할 것이옵니다.”

불경할 정도로 날카로운 내용이었다.

나의 목소리도 격앙되었다.

또한 표정은 와락 일그러져 있었다.

무엇하나 군왕을 향한 극진함은 없었다.

지금의 나는 진정 이러했다.

그리고 이연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용안은 오히려 차분해졌다.

나를 설득하고자 하는 군왕의 진심만이 담겨 있었다.

“가늠하지 않겠소.”

“아니 되옵니다. 살피셔야 하옵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오늘을 살 것이오. 백 년의 대계가 아니라 오늘의 대계를 위해서요.”

“백 년이 아니옵니다. 고작 몇 년이옵니다. 이를 인내해야 하옵니다. 지금껏 조선은 잘해왔사옵니다. 이제 다 왔사옵니다.”

“본부장.”

“전하. 노신이 간곡하게 청하옵니다. 부디 신의 충언을 새겨주시옵소서.”

“…….”

작금의 재앙은 원 역사도 경험했다.

바뀐 역사의 조선보다 준비 태세가 부족하였을 원 역사의 조선도 이를 버텼다.

하여, 나는 이연의 말을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다.

파멸적인 위기에 처하는 건 경신 대기근이 아니었던가.

나를 매 순간 이를 심장에 새겼다.

해서, 말했다.

“조선은 나뭇가지 하나라도 비축해야 하옵니다.”

“우리는…….”

나의 간곡한 말에도 이연은 물러서지 않았다.

“청국으로부터 쌀을 확보할 것이외다. 만일 내일의 백성을 담보해야 한다면 이를 통하면 될 것이오. 조선에서 확보하는 재원은 오늘의 백성에게 사용해야 하오.”

조선의 외부에서 수혈할 ‘자원’이 경신 대기근을 감당해내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현대 국가도 휘청일 재앙을 이 시절 무슨 수로 막아내겠는가.

그저 최선을 다해서 방비하는 게 목표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우리는 그 모든 걸 비축해야 한다.

“틀리셨사옵니다.”

“한 치도 물러설 생각이 없소?”

“기어이 신의 뜻을 꺾으시고자 하시면 파직하시옵소서.”

“허.”

파직을 운운한다는 건 군왕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심지어 송자로서 성현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한데 파직을 언급한다면 선대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파급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청사 뇌호의 오금을 저리게 한 지부상소조차 그 위력의 일부에 불과했다.

이를 상기하였을 용안에는 불쾌함이 담겼다.

볼이 크게 씰룩였고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무리 강대한 왕권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송자였기에 파직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의외로 이연의 노여움은 금방 가라앉았다.

다시 나를 설득하듯 말을 꺼냈다.

“기어이 외길을 가고자 하시오?”

“전하. 신은 일신의 안위를 위한 것이 아니옵니다. 조선이…….”

토로하듯 격정적으로 말했다.

“이 난세를 극복할 길을 걷고자 하는 것이옵니다.”

“경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소. 그랬다면 이런 번거로운 과정도 생략했을 것이오.”

이는 언제라도 나를 파직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압도적 왕권에 대한 자부심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피할 생각이 없었다.

“파직이 아니면 신이 사직하겠사옵니다.”

이 또한 군왕에 대한 도발로 인지될 수 있다.

아니, 도발이었다.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이렇게 낙향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는 기어이 경신 대기근과 싸울 것이다.

중대본에서.

“마음에도 없는 말은 집어넣으시오.”

“어심을 되돌리기 위함이옵니다. 이는 진심이옵니다.”

“그거 아시오? 가끔 너무 답답하오.”

“…….”

“본부장과 이런 대화를 할 때마다 너무 답답하다는 말이외다.”

“……어인 하교이시옵니까.”

“늘 무언가만을 바라보며 모든 걸 희생해야 한다고 말하오.”

“신은…….”

“그런데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모르오. 경은 알겠지만 우리는 모르오.”

“감당할 수 없는 기근이 바로 그 무언가이옵니다.”

“과정을 생략하였다는 것이오. 한데, 위정자가 이럴 수는 없소. 어째서? 위정자가 생략하는 과정에는 백성의 고통이 수반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외다. 정치는 결과가 위대해야 하지만 과정도 훌륭해야 하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할 수 없다는 어설픈 정의가 아니외다.”

“…….”

“본부장이 대의라고 생각하는 그 무언가를 위해서 희생하고자 하는 작은 것이, 지금은 대라는 것이외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속이 꿈틀거리듯 간지러웠다.

손끝이 튀듯 떨렸다.

입술이 건조해졌고, 입안은 따가웠다.

세상은 이런 상태를 혼란이라고 불렀다.

그새 이연의 말이 이어졌다.

“백보 양보하여 본부장이 말을 다 수용할지라도, 무엇이 문제인지 아시오?”

“……무엇이옵니까.”

“지금 조선을 휘청이게 하는 추위는 전과 다르오. 특정 지역이 아니라 조선 팔도 전체를 휘감고 있소. 재앙의 양상이 변했다는 것이외다. 그렇다면 응당 방침도 변해야 하오. 위정자란 당연히 이래야 하오. 하지만 본부장은 어떤 경우라도 방침을 사수하고자 하오.”

“전하.”

해명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변명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연은 내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고려의 많은 권력자가 왕을 압도했으나 감히 용상을 탐하지 못한 건 과정이 부실했기 때문이외다. 최충헌과 같은 무신들이 속에 용을 품지 않았겠소? 하지만 엄두도 낼 수 없었소. 그들은 칼을 휘둘러 피를 본 것이 전부였기에, 딱 그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소.”

“…….”

“되돌아보시오. 그 옛날 태조께서 고려를 무너뜨린 대업을 우리는 역성이라고 하오. 한데, 태조께서 역성만으로 바라보며 달리셨소? 아니외다. 외적과 싸우며 백성을 지키셨소. 그들을 위로하며 다독이고 살리셨소. 그 길을 달리셨기에 조선이 이 땅의 주인이 된 것이오.”

“…….”

“만일 태조께서도 그들처럼 과정이 없었다면 어찌 대업을 이루실 수 있었겠소? 설령 용상의 주인이 되셨다고 한들 그저 찬탈에 그쳤을 것이외다.”

“…….”

“본부장의 기근 방비가 이러하오.”

다시 나서고자 했으나 이번에도 미수에 그쳤다.

이연의 용포가 내 시선을 사로잡을 때, 그의 말이 다시 시작됐다.

“적이 있소. 변방을 간헐적으로 어지럽혔으나 국지전에 불과하오. 하지만 정세를 살피니 몇 년 후면 10만 대군을 이끌고 전면전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되오.”

“…….”

“우리는 전면전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소. 군량을 비축하고, 정예군을 육성했소. 동시에 국지전도 잘 막았소. 이렇게 전면전을 대비했단 말이외다. 한데, 어느 날이었소. 적군이 5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국경을 넘었소. 어찌해야 하오?”

“…….”

“애초 예상했던 10만 대군이 아니었으니 기존의 방침을 그대로 유지해야 하오? 총력전이 아니라 국지전의 전력으로 적을 막아야 하오? 언젠가 발생할 10만 대군의 공격을 대비하여 국력을 아껴야 하오? 백성이 죽고, 강토가 약탈당하는데도 우리는 최선을 다하지 않고 힘을 비축하며 전처럼 싸워야 하오?”

“…….”

“이리하면 다 죽소.”

“…….”

“가진 힘을 사용해보지도 못하고 도성이 함락당할 것이외다.”

이건 대체 무엇일까?

대책 없이 말문이 막혔다.

“경을 파직할 수 있소. 사직 상소를 윤허할 수 있소. 다 할 수 있소.”

언제부터였을까?

이연의 어조가 간곡해진 건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이제야 이를 인지하고야 말았다.

“그런데 나는 경과 함께 가고자 하오.”

“…….”

“함께 이 나라 조선을 노래하기로 했던 그 약조를 지키고자 하오.”

어째서일까?

왜 이연은 나와 손을 잡고 조선을 노래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에게 나는 많은 신하 중 한 명에 불과할 것인데 말이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지금 이것이 너무나도 궁금해졌다.

내 속내를 읽었을까?

이연의 말이 이어졌다.

“경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조선의 위정자이니까.”

“……다시 일러주시옵소서.”

“경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머릿속이 창백해졌다.

오늘 왜 이런 논쟁이 발생했는지 알게 되었다.

왜 이토록 이연과 생각이 달라졌는지 깨닫고 말았다.

나는 송시열이지만 조선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조서에서 숨을 쉬고 있지만 조선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조선의 땅을 밟고 있지만 조선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조선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지만 조선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를 경신 대기근을 방비하기 위해서 송시열이 된 대한민국인으로 인지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역사를 알고 있는 초인의 시선으로 이 시절을 바라봤을 뿐이었다.

그래서…… 오늘의 희생을 수치화할 수 있었다.

이연과 조선의 위정자들처럼 진심으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수치화한 것이었다.

나는 너무나도 산술적으로 경신 대기근을 방비한 것이다.

이것이 나와 조선인의 차이였다.

이를 깨닫고 나도 모르게 말했다.

“진실로 신이 설복(說伏)되었사옵니다.”

“참으로 다행이오.”

다시 아니, 이제 조선인으로 조선을 바라봐야 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하여, 더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자 하오.”

“청국 황제의 황명을 하루라도 빨리 얻어내야 하옵니다.”

“예조판서 윤선거를 보내겠소.”

“참으로 지당하옵니다.”

왜인지는 모른다.

더는 외롭지 않았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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