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보이지 않는 그늘
변승업의 눈이 가늘어졌다.
입술을 잘게 깨물면 오른손 엄지로 검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오랜 경쟁자이자 벗인 김근행을 바라봤다.
“조정의 농업 방침을 어찌 생각하나?”
“선대왕 시절만 해도 찾아볼 수 없는 기민함이 아니겠는가.”
“자네도 그리 여기나?”
“되돌아보면 조정은 늘 한발 늦었네. 일국을 통치하니 어쩔 수 없겠으나, 쉽게 움직이려니 생각할 게 너무 많았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작금의 조선 조정은 아니지 않나? 거센 추위가 시작되자 오랜 방침을 바로 변경했네. 우리와 거의 비슷한 속도였으며 대책도 비슷하지.”
“그렇지. 농업 방침이라고 하였으나 사실상 방한 대책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김근행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속도는 느렸지만, 무게는 묵직했다.
손을 내리며 느릿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때늦은 말일지도 모르지만, 금상께서 보위에 오르신 이후 조선은 너무나도 많은 변화를 이뤘네. 상전벽해라는 말이 부족하지 않을 정도일세.”
“거. 내가 삭주에서 우암 대감을 만난 직후 그리될 거라고 하지 않았는가. 한데, 자네가 거칠게 고개를 저었어.”
“허. 내가 언제 그렇게까지 했나? 그저 신중하게 바라봐야 한다고 했지.”
“이보다 억울할 수가 없군. 나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데 말이네.”
“음. 이 대화를 계속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네. 내 생각에는 아주 불필요한 거 같은데 말일세.”
김근행이 끝말을 흐리며 은근슬쩍 말을 돌리기를 권했다.
변승업은 익살스럽게 웃으면서 양손에 힘을 주며 펼쳤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지.”
“반계 선생의 안건이라고 하더군.”
사실 두 사람으로서는 반계 유형원이 조정에서 중용된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변승업의 말이 이어졌다.
“조정이 전례 없이 기민한 건 좋은 일이지만 또 경계할 부분이지 않겠나?”
“물론일세. 중대본 수립 이후 조정의 선제적인 대처로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사실일세. 그러나 그와 별개로 우리가 더 빠르게 움직일 필요는 있네.”
“이번 농업 대책은 우리가 동북면으로 진출하여 초피 등을 확보하려는 움직임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네. 조정의 이러한 방침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언제 우리의 발목을 낚아챌지 모르는 일일세.”
“가령 추위에 떠는 백성을 구제한다는 명분으로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한다거나.”
“애석하게도 가능성이 농후하네.”
“단지 초피를 내놓으라고 한다면 그리할 수 있네.”
김근행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결국, 그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데, 우암 대감의 압박은 다른 조정의 대신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더군.”
“그렇지. 우암 대감이라면 초피가 아니라 상단의 무역로를 내놓으라고 하실 것이네. 백성의 구제를 명분으로 말일세.”
“그리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남지 않겠지. 아니지. 조선의 난세를 극복하는 공을 세웠다는 영광을 얻겠군.”
“큭……. 우리의 선대가 그런 위치에 이르렀으나, 우리는 상인에 불과하지.”
변승업의 선대는 공신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토록 빛나는 영광은 너무나도 빠르게 사라졌다.
이것이 현실이었다.
“옳은 말일세. 아무런 의미가 없네.”
“우리가 원하는 건 당대의 의미 없는 영광이 아니라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니까.”
두 사람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삭주 시절부터 송시열을 보필했던 변승업의 표정은 복잡해졌다.
늘 가벼운 농을 하며 지낼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됐다.
하지만, 송시열의 한마디 한마디에 담긴 뜻을 모를 수가 없다.
“우암 대감은 상단이 정치 세력화하는 걸 크게 경계하셨지.”
“그 사실을 떠나 상단이 정치 세력화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는 것 자체가 놀랍지.”
“자네의 말이 옳네. 우리는 언제든 짓밟힐 수 있는 상인이 아닌가. 말 한마디에 상단의 모든 것이 몰수될 수도 있네. 그 정도로 우리는 양반에게는 하찮은 존재일세. 한데, 어찌 우리가 여기서 더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 혜안에 가끔 소름 끼칠 정도일세.”
“살아 있는 유일 성현의 위치에 이른 분이시네. 범인과 같을 수는 없겠지. 그런데도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네.”
당대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서 조선에 금권이라는 가치가 존재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고자 했다.
철통같은 신분제가 존재하는 조선에서 이런 생각은 망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또 오히려 그러기에 변승업과 김근행이었기에 남 몰래라도 꿈꿀 수 있었다.
그런데 이처럼 상상의 범주 밖에 존재하는 걸 송시열은 꿰뚫어 보고 있었다.
심지어 대놓고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한 적도 있었다.
“되돌아보면 위정자 중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기에 막대한 재원을 소모하면서 중대본의 일을 도맡아 했네. 그래서 삭주 시절부터 우암 대감을 보필한 것이었네.”
“어찌 모르겠나. 중대본의 일을 수행하며 공을 세운다면 적어도 튼튼한 방패는 확보하는 것이니까.”
“단지 그렇게 시작하면 된다고 여겼으나, 일이…….”
변승업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갑작스레 사랑방의 문이 열렸다.
미간을 찌푸리며 쳐다봤는데
“대, 대감.”
“아니, 대감.”
송시열이 보였다.
변승업과 김근행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편히 앉으시게.”
송시열은 빙그레 웃으면서 대뜸 아무 데나 앉았다.
변승업은 황급히 자리를 권하였으나 송시열은 손을 내저으며 거절했다.
이리되자 두 사람은 좌불안석이었다.
“한데, 이 누추한 곳은 어찌 오셨습니까.”
“아. 그저 지나가는 길이었네.”
“말씀하셨으면 소인이 달려갔을 겁니다.”
“하하하. 그저 지나가는 길이었다고 하지 않는가. 자네가 그러면 내가 불청객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너무 들지 않겠나?”
“이런. 소인이 크게 실수했습니다. 이렇게 아둔하니 늘 대감의 가르침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예. 대감.”
변승업은 진땀을 흘렸다.
가장 속이 타들어 가는 부분은 대체 언제부터 송시열이 당도했느냐는 것이었다.
만일, 김근행과 은밀하게 나눈 대화 중 일부라도 들었다면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송시열은 다른 말을 꺼냈다.
“어선은 언제 출항하나?”
“송구합니다. 소인이 찾아가서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불필요한 말은 할 필요가 없네.”
“수일 내로 출항할 수 있습니다.”
“음.”
송시열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보였다.
변승업이 눈치껏 말을 꺼내려고 할 때였다.
“하지 말게.”
“예……?”
“출항하지 말라고 했네.”
“대, 대감. 무슨 말씀입니까.”
“음?”
송시열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눈이 갈수록 커졌다.
“아니, 내가 자네에게 이유를 설명까지 해야 하나?”
“그, 그것이 아니라…….”
“이런! 설득해야 했나?”
“아, 아닙니다. 다만, 너무 당황하여…….”
“아! 자네의 동의를 얻었어야 했군. 중대본의 재원을 책임지는 거상이니 말이네.”
종잡을 수 없는 송시열의 태도에 변승업은 진땀을 흘렸다.
그러나 빠르게 마음을 다잡으며 처세에 나섰다.
“소인이 늘 이렇게 부족합니다. 대감의 말씀에는 늘 뜻이 있으니 응당 그리하겠습니다.”
“그렇지. 이래야만 변승업답지.”
“송구합니다.”
변승업은 속으로 안도했다.
황명이 내려졌다.
조선이 어찌 거역하겠는가.
어선의 출항을 취소하라는 건 결국 전과 비슷한 수준의 압박이다.
그러니 다시 방긋 웃으면서 농이었다고 할 것이다.
생각을 확실하게 정리한 뒤 말하려고 할 때였다.
“청국 무역의 독점권도 내놓게.”
“예……?”
“자네는 빠지라는 말이네.”
“대, 대감.”
자세를 낮추고 듣고 있던 김근행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송시열은 평소처럼 자신들을 누르고자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감히 나설 수 없었다.
상대는 송시열이었다.
지금은 쥐 죽은 듯 가만히 있어야만 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자네도 빠지게.”
의아하여 고개를 들었더니 송시열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근행은 황급히 말했다.
“대, 대감. 무슨 말씀입니까?”
“대일 독점 무역에서 손을 떼게.”
“대, 대감.”
“화폐 주조는 물론이거니와 동광 채광에서도 다 빠지게.”
“!!!”
조금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둔기로 두들겨 맞아도 이보다 충격적이지 않을 것이다.
변승업과 김근행은 어안이 벙벙하여 멍한 표정으로 송시열을 바라만 봤다.
“가보겠네.”
“!!!”
“!!!”
송시열이 대화의 끝을 알렸다.
일이 이렇게 될 수는 없었다.
너무나도 크게 당황했기 때문일까?
변승업은 다급하게 쏟아내듯 말을 던졌다.
“소, 소인들의 대화가 대감의 심기를 거슬렀다면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그 말과 동시에 김근행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불필요한 말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송시열의 표정이 야릇해졌다.
아니, 지금껏 본 적이 없는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내가 자네들의 말을 엿들었다고 했나?”
“소, 송구합니다.”
“허. 나 송시열이 상인의 말이나 엿들었다고 했나?”
“주, 죽여주십시오.”
“끌. 그리 말하는 걸 보니 은밀한 대화를 나눴나 보군.”
“!!!”
그제야 변승업은 제 실수를 깨달았다.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 모습을 보던 송시열은 피식 웃었다.
또, 무언가를 회상하듯 고개를 몇 번이나 돌리더니 천천히 말을 꺼냈다.
“처음 자네가 나를 찾아왔을 때 공을 세울 기회를 얻고 싶다고 했네.”
“그, 그렇습니다. 소인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가산을 내놓아도 되니 부디 기회를 달라고 했지.”
“지, 진심이었습니다.”
“다만, 바라는 게 있다면 양반의 부당한 요구를 막아달라는 것이라고 했지.”
“대감께서 나서신 이후 누구도 소인에게 뇌물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건 대감의 덕이었습니다.”
“그래. 그랬는데 그게 진심이 아니었던 것 같군. 사람이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애초 다른 목적을 가지고 내게 접근한 것인가?”
“대감. 천부당만부당합니다.”
“음.”
송시열은 고개를 몇 번이나 좌우로 움직였다.
오른손으로 수염을 만졌다.
참으로 여유가 가득했다.
“내가 오늘 이곳에 찾아온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군.”
“이, 이르십시오.”
“예조판서 윤선거가 청국으로 떠날 것이네.”
무슨 의미를 담은 말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대청 전면 무역을 앞당기고자 조정이 더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었다.
변승업과 김근행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이토록 결정적인 시기가 도래했으니 분명하게 해둬야 하므로 찾아왔네. 하면, 내가 무엇을 분명하게 하고자 했는가.”
송시열은 익살스럽게 웃었다.
그런데 그건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다.
순식간에 안색에서 감정이라는 것이 사라졌다.
“새기게.”
그의 목소리에도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이 나라 조선에서 금권이라는 단어가 탄생하면 선혈이 낭자(狼藉)할 것이네.”
“!!!”
“!!!”
혼비백산이라는 건 이런 걸 의미할 것이다.
변승업과 김근행은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지금의 위치에서 만족하게.”
송시열의 말은 느리게 이어졌다.
“그리만 한다면 자네들의 재산을 아무도 사사롭게 탐할 수 없을 것이네.”
아직 송시열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막대한 재원을 중대본에 보태기에 억울할 수도 있네. 한데, 이 또한 새기게. 작금의 난세를 극복하기 위해서 조선의 위정자인 양반도 기득권을 포기하고 있네. 눈으로 봤으니 잘 알 것이네. 이러한데, 상단의 재원을 동원하는 게 무엇이 문제인가?”
“대, 대감. 소인은 감히 그런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하면, 아까 내가 한 말은 모두 거두겠네. 계획대로 일을 진행하게.”
“응당 그리할 것입니다.”
“아. 이 또한 잊지 말게.”
“이르십시오.”
“이곳은 조선일세.”
“예……?”
변승업과 김근행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송시열의 표정이 너무나도 싸늘했다.
시선을 마주치기도 두려울 정도였다.
“일국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재산을 축적하더라도, 옥새가 찍힌 교지 한 장이면 자네들은 흔적도 남길 수 없다는 걸 부디 잊지 말게.”
청국, 일본과의 전면 무역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거두게 될 것이다.
그렇게 확보할 이익으로 정치적 이권을 탐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언제라도 정치권력이 어떤 것인지 보여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아무쪼록 내가 말로만 끝내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것도 잊지 말게.”
“명심하겠습니다.”
“심장에 새기겠습니다.”
두 사람은 진심으로 답했다.
그러나 송시열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새기게. 자손들에게도 전하게. 조선은 자네들이 아니라도 대안이 있다는 사실을 말일세. 이를 망각하는 순간 멸문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네.”
감히 말도 할 수 없었다.
온몸으로 바닥에 붙이며 답할 뿐이었다.
-----
처능은 고통스러웠다.
도저히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끝내 주저앉고 말았다.
“어찌 산 사람을 이렇게 죽일 수가 있습니까…….”
그의 절규에 수령은 눈을 질끈 감으며 시선을 돌렸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정녕 이럴 수는 없습니다.”
“…….”
“영감. 다시 사람을 보내어 조정을 설득해주십시오.”
“대사…….”
“수십 명의 백성입니다. 어찌 죽으라고 내칠 수 있습니까.”
“…….”
처능의 통곡은 너무나도 구슬펐다.
그러자
“……저희는 괜찮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눈물을 거두십시오.”
병자들이 눈물을 애써 참으며 말했다.
죽으러 가는 이들이었건만 오히려 처능을 위로했다.
이는 참으로 괴이한 현상이었다.
“진작에 버려졌어야 할 하찮은 목숨이었습니다.”
“하지만, 대사께서 지금까지 지켜주셨습니다.”
“여태껏 이놈들을 이렇게까지 보살펴주신 분은 없었습니다.”
“부처님을 뵙는 것만 같았습니다.”
병자들의 말은 끊이지 않았다.
처능은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그런데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대사께서 소인들끼리도 할 수 있는 처방을 알려주십시오.”
“모두 따를 것입니다.”
이 말에 처능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황급히 수령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 영감. 약재라도 이들과 함께 보낼 수 있게 해주십시오.”
“…….”
“모든 재원은 소승이 마련하겠습니다. 그러니 딱 하루만 시간을 내어주십시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던 수령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무지 반대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처능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즉시 승려들에게 말을 전했다.
병자들의 얼굴에도 작은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던 수령은 한탄하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민심이 이동하겠구나.”
그러다가 등골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이 참담한 상황에서도 권한을 고민하는 나는 목민관인가, 아니면 그저 양반에 불과한가.”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